제307화
죄이조를 공포했을 때, 그는 고뇌에 몸부림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해 주길, 과감하게 행동하고 용감하게 책임을 지는 사람이며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그 잘못을 용감하게 인정할 줄 아는 훌륭한 황제라고 생각하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시간이 좀 흐르자 마음이 바뀌어 세상 사람들이 죄이조를 잊어버리게 만들고 싶었다. 죄이조가 애초에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이 되길 간절히 바랄 정도였다.
자신이 뭘 잘못했는가? 자신은 잘못한 게 없었다! 잘못한 건 소씨 가문을 모함한 사람들이고, 어리석고 무지한 백성들이었다.
다만 양왕에게는 여전히 마음이 쓰여, 가진 모든 것을 이용해 아끼는 아들을 기쁘게 해 주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 천하는 태자의 것이었다. 태자의 혈통이야말로 가장 깨끗하고 순수했다.
양왕이 정비의 소생이라지만 태자가 형인 데다 적자이고 이미 황태자로 책봉이 되었으니 당연히 태자야말로 정통성이 있었다. 자신은 양왕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지만 천하만은 양왕에게 내줄 수 없었다.
이런 모순된 감정들이 늘 마음속에서 줄다리기를 하며 정선제를 괴롭게 만들었다.
태자를 감싸고돌 때마다 그는 양왕에게 또 빚을 지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도 요리에게 지시를 내린 사람이 태자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태자를 비호했고, 이에 아래에 선 양왕은 두 눈을 부릅뜨고 금방이라도 화를 낼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떠올리니 황릉에서 외롭게 숨을 거뒀을 누님과 과거 번성했던 소씨 가문이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죄책감과 괴로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어지니 또다시 운하 공주가 그리워졌다.
그해 운하 공주가 도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목숨을 잃어 시체로 황궁에 들어섰을 때, 자신은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는 딸의 시체를 보면서도 그렇게 애통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 몇 년간 점점 더 그 딸이 그리워졌다. 딸의 어릴 적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미소가 떠올랐고, 자신이 피곤하거나 아플 때 침상 곁에서 『지장경地藏經』이나 『효경孝經』을 읽어 주던 모습이 떠올랐다.
생각이 여기에 닿자 정선제는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아찔했다.
“황제 폐하, 좀… 쉬셔야 하지 않을는지요?”
정선제가 침통한 기색을 내비치자 채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정선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채결은 얼른 그를 부축했고, 두 사람은 침전寢殿이 아닌 어서방 한쪽에 있는 내실로 들어갔다. 내실 한편엔 기다란 탑상이 보였고, 그 위에는 용 문양이 수놓인 황금색 베개와 이불이 깔려 있었다.
정선제는 그 위에 누워 잠시 생각을 하다가 말문을 뗐다.
“장원 급제자는 어디 있느냐?”
“한림원에 있사옵니다.”
“그자를 데려와 짐에게 서책을 읽어 주게 하거라.”
“예, 폐하.”
채결은 대답한 뒤 바로 밖으로 나갔다.
* * *
그 시각, 한림원.
주운환은 집무실 안에서 국사를 수정하고 있었고 진지항과 조범수도 자신들이 맡은 일을 처리하느라 분주했다. 장원학사 필 씨는 상석에 놓인 긴 책상에서 상주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이때, 누군가의 발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채결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장원학사 필 씨는 채결의 옷자락을 보더니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웃으면서 그에게 다가갔다.
“아이고, 채 공공이 아니신가?”
“필 대인.”
채결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인사했다.
“황제 폐하께서 서책을 읽을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이… 이런 일은 수하를 통해 전달하면 되는데 어째서 채 공공께서 직접 오셨소.”
장원학사 필 씨는 의아함과 놀라움, 기쁨이 섞인 얼굴로 말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장원학사 필 씨는 손짓을 하며 채결을 밖으로 불러내려고 했다. 채결은 어리둥절했으나 그의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해 일단 밖으로 걸어 나갔다.
방 안에 있던 진지항과 조범수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고, 조범수는 낯빛이 어두워지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경서를 강독할 사람을 불러오라 하셨는데 장원학사가 환관을 밖으로 부르다니 이게 무슨 뜻인가?”
“말할 것도 없죠. 분명 그자를 부르려는 겁니다! 그자가 재상의 손녀사위잖아요.”
진지항 역시 언짢음을 드러냈다.
장원학사 필 씨는 채결을 데리고 문밖으로 나가 반대편 집무실로 향했다.
“그 초 편수가 경서 강독이 수준급…….”
“그분은…….”
채결은 초 편수가 누구인지 떠올랐다. 황제가 여러 번 강독할 사람을 데려오라고 했을 때 어린 환관이 한림원으로 가서 사람을 불러왔는데, 그자가 바로 초 편수로 이번 전시에서 4등을 한 전여였다.
채결이 발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그런데 황제 폐하께서 장원 급제자를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장원학사 필 씨가 표정을 굳히더니 난감한 투로 말을 받았다.
“아… 그런 거였구먼! 내가 괜히 쓸데없는 짓을 했소. 장원도 아주 뛰어난 자요. 다만 강독은 초 편수가 더욱 명쾌하게 해서 그자를 데려가라고 제안한 것이오.”
그가 얼렁뚱땅 상황을 수습하려 하자 채결은 주운환을 대신해 의분을 좀 느꼈다.
“필 대인. 다시 그쪽으로 돌아가시지요!”
“그럽시다.”
두 사람은 함께 왔던 길을 되돌아갔고 주운환 등 세 사람이 자리한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채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장원학사 필 씨는 표정을 굳히더니 하는 수 없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주 수찬修撰, 자네는 채 공공을 따라 상서방上書房(황자를 비롯한 황손들이 공부하던 장소)으로 가서 황제 폐하께 강독을 하시게!”
조범수와 진지항은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눈빛에 조롱기를 비쳤다. 채결과 장원학사 필 씨가 회랑에서 나눈 말을 전부 들었기 때문이다.
주운환은 코웃음을 치더니 청화자기로 만든 작은 붓걸이에 붓을 걸어 놓은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 수찬께서는 절 따라오시지요.”
채결은 몸을 굽히며 자신을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주운환은 채결을 따라 그곳을 떠났다.
장원학사 필 씨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초 편수는 재상의 예비 손녀사위이니 그의 환심을 사려고 아첨하지 않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자신 역시 무슨 좋은 기회만 있다 하면 우선 그에게 주려고 했다. 그런데 채결이 직접 찾아와 장원을 데려가겠다고 말할 줄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주운환은 채결의 뒤를 따라 한림원을 나섰고, 반각半刻쯤 걸어 마침내 상서방에 도착했다. 내실 안의 정선제는 용 문양이 조각된 박달나무 탑상 위에 누워 있다가 밖에서 기척이 나자 바로 눈을 떴다. 채결이 훤칠한 체형의 사내를 데리고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황제 폐하. 주 수찬이 도착했사옵니다.”
채결이 몸을 굽히며 먼저 앞으로 다가섰다.
“소신,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주운환도 황제에게 예를 올렸다.
정선제는 저 멀리 서 있는 진녹색 관복 차림의 사내를 살폈다. 청수하고 수려한 용모에 다소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가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앞으로 다가오너라.”
주운환이 고개를 숙인 채 앞으로 두 걸음 내딛자 정선제와의 거리가 일 장 정도로 좁혀졌다.
“더 가까이 오너라.”
정선제의 말에 주운환이 침상 곁으로 걸어가며 답했다.
“예, 폐하.”
정선제가 몸을 일으키려고 안간힘을 쓰자 주운환은 얼른 그를 부축했고 채결도 재빨리 다가와 그를 도왔다. 그러고 나서 밝은 황색의 부드러운 베개를 정선제의 등 뒤에 받쳐 그가 침상 머리맡에 기댈 수 있게 해 주었다.
정선제는 숨을 크게 쉬며 말했다.
“앉거라! 채 공공은 걸상을 가져오너라.”
“예, 폐하.”
뜻밖에도 채결은 돌아서서 자신이 직접 걸상을 가지러 갔다. 잠시 후, 그는 다리 끝부분이 안쪽으로 휘어 있는 둥근 의자를 가져와 침상 머리맡에 내려놓았다.
“주 수찬, 앉으시지요.”
“황제 폐하, 황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주운환은 어리둥절했으나 이내 사의謝意를 표하고는 의자에 앉았다.
정선제는 처음으로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보게 된 주운환을 찬찬히 관찰했다. 기다란 눈썹과 눈, 살짝 위로 올라간 눈꼬리는 화려하고 매력적이면서도 우아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곡선을 드러내고 있었다. 맑고 산뜻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는 이 사내는 보면 볼수록 자신의 딸과 닮은 듯이 느껴졌다.
“황제 폐하, 어떤 서책을 읽고 싶으신지요?”
주운환이 묻자 정선제는 정신을 차리고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효경』을 읽어 보아라!”
“예, 폐하.”
주운환이 고개를 끄덕이자 채결이 서재 쪽으로 걸어가 서책을 들고 왔다.
주운환은 『효경』을 건네받더니 첫 장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하루는 공자께서 집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시는데, 제자 증자曾子가 곁에 함께 앉아 있었다. 공자께서 가라사대 ‘선대 제왕께서는 지고지상한 덕행을 갖추고 중요한 도리를 알고 있어 이로써 천하를 다스리고 백성들이 화목하게 지내도록 했으며 윗사람과 아랫사람 간에 원망과 불만이 없었다. 너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느냐?’…….”
정선제는 주운환의 맑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차가운 달처럼 새하얗고 밝은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다. 앞에 앉아 있는 주운환의 모습이 어린 딸의 모습과 겹쳐졌기 때문이었다. 마치 딸이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난 것만 같았다.
『효경』을 다 읽은 주운환이 고개를 들어 황제를 쳐다보니 그는 멍한 얼굴로 말없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주운환은 의아한 눈빛을 보이더니 하는 수 없이 『효경』을 처음부터 다시 한번 읽었다.
그렇게 이각 동안 서책을 반복해 읽으니 정선제는 그제야 두 눈을 감고는 그만하라는 손짓을 했다.
“이제 그만 읽거라.”
주운환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고 시립侍立했다.
정선제는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두 눈을 뜨더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구나. 채 공공.”
“예, 폐하.”
채결이 몸을 굽히며 앞으로 다가갔다.
“짐의 별장을…….”
정선제는 말을 하다 말고 멈추었다. 온천이 딸린 그 별장을 주운환에게 하사하면 양왕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말을 바꾸었다.
“짐의 책상 위에 놓인 짙푸른 벼루를 주 수찬에게 하사하겠다.”
주운환은 어리둥절해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황제는 어째서 하사품을 내리려 한단 말인가?
“예, 폐하.”
채결은 대답한 뒤 서재로 향했다. 상주서가 한 무더기 쌓인 책상 앞으로 가서 짙은 녹색의 윤기가 나는 투명한 벼루를 쟁반에 받쳐 들고 왔다.
“아, 그리고 혈옥여의血玉如意 한 쌍도 가져오너라.”
정선제는 부족하다 싶었는지 또 다른 물건도 가져오라고 했다. 채결은 이내 서재로 되돌아갔고 그가 돌아왔을 때 쟁반 위엔 짙은 녹색 빛깔의 벼루와 혈옥여의 한 쌍이 놓여 있었다. 그는 쟁반을 들고 주운환 앞으로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