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306화 (306/858)

제306화

풍 노장군은 비장한 표정으로 고했다.

“황제 폐하. 이 노신이 다시 출정하고자 하옵니다.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조정의 관리들은 순간 멍해졌으나 정선제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허했다.

“좋다. 경이 가거라!”

풍 노장군은 얼른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고 조정의 관리들은 잇달아 그가 노익장의 힘을 발휘한다며 감탄했다.

정선제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더니 한쪽에 있던 강왕과 허 장군을 쳐다보며 명했다.

“두 사람은 최대한 빨리 서북으로 돌아가 그곳을 지켜라. 서노가 응성을 함락하지 못하면 서북을 공격할 수도 있다.”

강왕과 허 장군은 명을 받들었다.

정선제는 훅하고 숨을 내쉬었다. 풍 대장군이 목숨을 잃고 말았지만 노장군은 경험이 풍부하니 그가 응성에 가서 그곳을 지키면 모든 일이 안정을 되찾을 것이었다. 서북쪽도 허대실이라는 새로운 장군이 생겼으니 문제없을 것이다.

정선제는 이렇게 불안을 다소 누그러뜨리고서야 한쪽에 있는 장찬과 호부시랑 요리에게 시선을 향했다.

“황제 폐하!”

요리가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왜소한 몸집의 그는 마흔이 조금 넘은 중년이었다.

“심문 결과는 어떠하냐?”

정선제는 장찬을 쳐다보며 하문했다.

“엽학문은 자세한 내막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자는 허서를 믿었기 때문에 호적을 허서에게 건넸다고 합니다. 당시 엽학문은 허서가 수완이 좋다고 생각했을 뿐,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합니다. 허서는 뇌물을 주었고, 요 시랑은 그 뇌물을 받았다고 모두 자백했사옵니다!”

장찬은 상세히 고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에 정선제가 싸늘한 눈빛으로 요리를 훑어보자 요리는 낯빛이 창백해졌다.

“소신… 황제 폐하의 은혜를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일은 태자가 자신에게 맡긴 일이었지만 태자를 물고 늘어져서는 안 되니 홀로 뒤집어쓰는 수밖에 없었다. 요리는 돈을 받았다고 거짓을 고했다.

“소신이… 순간 돈에 눈이 멀어 허서에게서 은화 일천 냥을 받았사옵니다.”

그 말에 조정의 관리들은 모두 미간을 찌푸렸고 어리둥절해서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고작 은화 일천 냥 때문에 그리했다?’

요씨 가문은 명문 귀족이었다. 게다가 명망 있는 학자 가문이었다. 학식이 깊은 그가 이렇게 생각이 짧은 행동을 했단 말인가?

“황제 폐하, 소신은 요 시랑이 돈을 받았다는 증거와 단서를 찾지 못했사옵니다. 부정한 돈 또한 찾지 못했사옵니다.”

장찬은 사실만 간단히 보고했으나 이는 요리를 더더욱 궁지로 몰기에 충분했다.

“도… 돈은 이미 써 버렸습니다!”

요리는 이를 악물고 변명했다.

장찬은 가타부타 따지지 않고 그저 깊고 어두운 눈빛으로 요리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이미 허서가 여러 차례 태자부에 드나들었음을 알아냈으니, 황제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정선제는 인상을 쓰며 잠시 망설였다. 그러고는 콧방귀를 뀌며 장찬에게 물었다.

“이 죄는 어찌 판결할 것이냐?”

장찬은 공수하며 답했다.

“태형 삼십 대에 관직을 삭탈하고자 하옵니다!”

“가서 형을 집행하거라!”

정선제가 싸늘한 목소리로 명하자 바로 시위 두 명이 들어와 요리를 끌고 나갔다.

한쪽에 서 있던 양왕은 서릿발처럼 차가운 표정이었고,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그의 매력적인 눈엔 순간 조롱기가 섞인 싸늘한 빛이 어리었다.

‘이래도 태자를 건드릴 마음은 여전히 들지 않으시는 모양이구나!’

정선제는 양왕의 차디찬 표정을 보며 미간을 씰그러뜨리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후, 조정 관리들은 봄비가 많이 내려 농경지가 침수되는 일에 대해 상의를 한 뒤 퇴청했다.

정선제는 채결의 손을 잡고 어서방으로 돌아가 커다란 탁자 앞에 앉더니 희끗희끗한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그런 채로 잠시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양왕은?”

“양왕 전하께서는 방금 전에 조회가 끝나자마자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궁 밖으로 나가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정선제는 옅은 한숨을 쉬었고 곰곰이 생각을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교외에 온천이 딸린 별장이 있지 않느냐?”

“예, 폐하.”

채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별장은 황제가 겨울이 되면 추위를 피하기 위해 찾는 곳이었다. 수려하고 그윽한 풍경에 온천도 있는데 그런 지형에 온천이 생기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그 별장을 양왕에게 주거라.”

“그럼 소인이 지금 바로 가 보겠사옵니다.”

채결은 명을 받아 어서방을 나온 후 곧장 양왕을 쫓아갔고 동화문東華門 마구간에서 그를 발견했다. 양왕은 그의 붉은 말을 끌고 나오고 있었다.

“전하.”

채결은 몸을 굽히며 앞으로 다가섰다.

“황제 폐하께 교외에 위치한 온천이 딸린 별장이 있는데…….”

“필요 없다!”

양왕은 망설임 없이 단칼에 거절하더니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온천이 딸린 그런 별장은 나도 이미 하나 가지고 있다. 황제 폐하께서 태자 전하를 그리 아끼시니 태자 전하께 드리거라!”

이어 양왕은 말에 올랐고 말채찍을 내리치자 말은 쏜살같이 달려갔다.

“저…….”

채결은 멀어져 가는 양왕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순간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특히 마지막에 뱉은 ‘태자를 그리 아낀다.’라는 말에 채결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는 잠시 생각을 했으나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어서방에서 혼자 바둑을 두고 있던 정선제는 기척이 들리자 바로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됐느냐? 만났느냐?”

채결이 몸을 굽히고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황제 폐하… 전하께서는… 이미 그런 별장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정선제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자신이 태자를 편애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양왕에게 마음의 빚을 느꼈지만, 양왕이 선물을 받지 않으니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그래도 차마 화를 낼 순 없었다. 자신은 이 아들에게 늘 빚진 기분이었다. 세상을 뜬 황후와 소씨 가문에게도…….

소 황후가 떠오르자 정선제는 희끗희끗한 눈썹을 찡그렸다.

그의 생일은 오월 초닷샛날, 즉 독월毒月 독일毒日(독월인 오월 중에서도 5~7일, 15~17일, 25~27일은 구독일九毒日로, 뜻밖의 재난을 당하거나 요절할 수도 있다고 하여 특히 불길하게 여기는 날임)이었다. 그는 이 불길한 날 태어났고, 생모도 난산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에 선황先皇은 국사國師를 찾아 정선제의 운명을 점치게 했는데 국사는 아무 지장 없다고 했으나 선황은 여전히 그를 꺼림칙하게 여겼다. 그뿐만 아니라 형제도 많았고 생모의 출신도 좋지 않은 그는 선황의 마음속에서 차차 잊혀 갔다.

잊힌 황자는 황가의 피가 흐르고 있다 하더라도 그 운명이 비참할 수밖에 없었다.

궁 안에는 각종 알력과 피눈물, 인내, 공포, 두려움이 가득했고, 감정을 풀 곳이 없는 궁녀와 환관들은 총애받지 못하는 황자에게 그 감정을 쏟아냈다.

그 덕에 열여덟 살이 되기 전까지 그의 인생은 잿빛과도 같았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씩씩하고 빼어난 자태를 뽐내던 그 장군의 여식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다홍색 군장을 입고 머리를 위로 높이 올려 묶은 유복해 보이는 소녀는 손에 은색 창을 들고 활짝 웃으며 하늘로 날아오를 것처럼 질주하는 쾌마快馬를 타고 달려왔었다. 그 타오르는 불꽃처럼 화려한 모습이 그의 인생을 환하게 비추어 주는 것만 같았다.

소씨 가문의 고귀한 적장녀와 실의에 빠져 있는 황자. 뜻밖에도 이 두 사람은 그렇게 만나 서로에 대해 알게 되고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 온 도성은 이 일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그는 이를 자랑스러워하며 그녀를 아내로 맞이한 것을 인생 최고의 행복으로 여겼다.

그녀는 그보다 두 살이 많았기에, 그는 늘 그녀를 누님이라고 불렀다.

혼례식을 올린 후, 그는 탄탄대로를 걸으며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가 끝내 존귀한 제왕의 자리에 올랐다.

소 황후는 스물여섯이 되어서야 그에게 적장녀를 안겨 주었는데, 그 후에는 연달아 세 번이나 유산을 하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 양 미인이 서장자를 낳자 부부의 갈등은 갈수록 심화되었다. 소 황후는 아직 적자도 태어나지 않았는데 서자를 먼저 태어나게 했다고 그를 원망했다.

그 후 소씨 가문이 적과 내통해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소씨 가문이 자신의 처갓집이라 하더라도 적과 내통해 나라를 팔아먹은 죄를 어찌 용인해 줄 수 있었겠는가? 그는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을 전부 처형하고 모든 재산을 몰수했다.

그래도 부부의 정을 생각해 소 황후는 미인으로만 강등했고, 동주桐州로 유배를 보내 황릉皇陵을 지키게 했다. 그때 그녀는 배 속에 양왕을 가진 채 떠났는데, 딸인 대장공주大長公主가 모비와 함께 가겠다고 울면서 애원하자 그는 그리하라고 허락해 주었다.

장녀인 운하는 그가 어릴 때부터 애지중지 키운 딸이었다. 하지만 소씨 가문이 멸문되고 소 황후가 황릉으로 유배를 당하자, 열 살이던 딸아이는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차가운 눈빛을 보내며 모비를 따라 황릉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그 순간 부녀 사이의 감정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보물처럼 여겼던 눈앞의 딸이 밉살스럽게 보였다.

그는 소 황후가 운하를 데리고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높직한 등천루登天樓에 서서 떠나가는 그들의 외롭고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훅 내쉬었다.

바로 그때, 그의 머리 위를 덮고 있던, 그 자신을 억압하던 짙은 안개가 싹 걷히며 온 하늘에 밝고 환한 빛이 퍼지고 저 멀리 독수리 한 마리가 창공을 향해 날아오르며 광활한 우주를 향해 힘찬 날갯짓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온 세상이 찬란하게 빛나는 것만 같았다.

비로소 스스로가 진정한 황제라고 느껴졌다. 제왕이 걸어갈 찬란한 길이 그제야 제대로 열리는 성싶었다.

후에 양왕은 동주에서 태어났고 소 황후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5년 후, 소씨 가문의 억울한 누명이 벗겨졌다.

소씨 가문의 억울한 누명이 벗겨지던 그 순간, 그는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하지만 죄이조罪已詔를 반포하며 안에 적힌 소씨 가문의 일대기와 소 황후의 생애를 읽게 되자 그만 목 놓아 울고 말았다.

검은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창을 들고 달려오던, 유복해 보였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자 과거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기억은 홍수처럼 자신을 휩쓸고 지나가며 남은 사람의 마음을 갈가리 찢어 놨다. 그는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꼈고 마음이 괴로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통곡했다.

그래서 곧장 장녀인 운하 공주와 어린 황자를 데려오라고 명을 내렸으나 불행하게도 두 사람은 돌아오던 길에 비적들을 만났고, 그 탓에 어린 황자는 중상을 입고 공주는 실종되고 말았다. 사흘 후 공주의 시체를 찾았지만 이미 칼로 난도질을 당해 예전의 모습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 그는 소 황후를 떠올리긴 했지만 장녀의 죽음에는 그렇게 애통해하지 않았다. 그저 사람을 시켜 딸을 황릉에 안장할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살아남은 양왕에게는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 괴로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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