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5화
주운환은 돌고 돌아 마구간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마차에 올랐다. 여한이 말을 몰고 궁문을 나와 대략 이각쯤 달리자 마차는 북경 양조장 앞에 멈춰 섰다.
주운환은 마차에서 내린 후 익숙한 듯 난초 별실로 걸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난초 주위로 나비가 날아다니는 그림이 그려진 커다란 화병이 보였고, 이 화병을 돌아가니 창가에 놓인 태사의에 앉아 있는 양왕의 모습이 보였다.
“양왕 전하.”
주운환은 커다란 원탁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요리의 일을 잘 처리했더구나.”
양왕의 손엔 백옥 술잔이 들려 있었다.
“네 내자의 작품이라고 들었다! 다음번에 이런 일이 있으면 네 내자를 찾아야겠구나.”
그 말에 주운환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안 됩니다.”
양왕은 ‘픽’ 조소하며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전하께서는 천자복환령 일을 마치면 다시는 제 내자에게 일을 맡기지 않겠다고 제게 약조하셨습니다. 이번 사건은 공교롭게도 제 내자와 연관된 일이라 가담하게 놔뒀던 겁니다.”
주운환이 조목조목 사리를 밝히자 양왕은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 이야기는 그만하거라. 그 이야기를 하자고 오늘 널 부른 게 아니다.”
엽연채가 확실히 일 처리 능력이 뛰어나긴 해도 양왕은 그녀를 자신의 장기짝으로 쓰려는 생각이 그다지 없었다. 그저 그녀에게 누구의 편인지 증명해 보이라고 했을 뿐이었다.
엽연채는 천자복환령을 태자부에 넣어 태자를 곤경에 빠뜨렸고, 그리하여 자신은 그녀의 약점을 쥐게 된 셈이었다. 이 약점이 있는 한 그녀는 자신과 주운환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었다.
“응성 쪽에 일이 생겼다.”
양왕은 붉은 입술을 쓱 올리며 냉소를 지었다.
“무슨 일입니까?”
“서노西魯가 작년 연말에 서북西北을 공격해 점령했으니 한동안 휴식기를 가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지난달에 남쪽 오랑캐와 손을 잡고 응성을 기습했다.”
양왕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옆에 놓인 녹나무 찻상을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풍 대장군은 서노가 서북을 공격하고 점령하느라 기운이 크게 쇠했으리라 보고 잠시 긴장을 늦추고 있다가 칼을 맞고 말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예?”
주운환은 깜짝 놀랐다. 풍 대장군은 태자 측비, 즉 풍 측비의 아버지이며 풍씨 가문에서 가장 용맹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응성은 그가 지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가 참살을 당할 거라고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응성을 그런 변변치 않은 것들이 맡고 있으니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양왕은 냉소하더니 고개를 들어 주운환을 쳐다보았다.
“운환아. 본래 네가 장원 급제를 했으니 문관이 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젠 이름을 숨기고 강왕 휘하로 들어가는 건 통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또 서북쪽엔 허 장군이란 인물이 나왔으니 네가 무관의 길을 걷고 싶다 하더라도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게다. 그런데 지금 응성 쪽이… 함락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응성이 함락될지 여부는 양왕도 단언하기 어려웠다. 서노든 남쪽 오랑캐든, 그들이 어떻게 공격해 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또 풍씨 가문이 비록 태자 쪽 세력이라 할지라도 그는 풍씨 가문을 제거하기 위해 외적을 끌어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적과 내통하여 나라를 팔아먹는 일이었다. 아무리 태자 자리를 얻고 싶다 하더라도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됐다. 그의 몸엔 소씨 가문의 피가 절반 흐르고 있었다.
“풍씨 가문은 응성을 지키는 데 엄청난 노력을 들였다. 그러나 지금 두 외족이 손을 잡고 공격해 주장主將인 풍 대장군이 참살을 당했으니 기회가… 대단히 크다.”
“제가 가겠습니다!”
양왕의 말에 주운환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정말로 기회가 생긴다면 제가 가겠습니다.”
“잘 생각한 것이냐?”
양왕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넌 이제 관직이 없는 평범한 자가 아니다. 장원 급제자다. 전도가 유망한 장원 급제자란 말이다!”
양왕은 자기 사람이 병권을 손에 넣기를 간절히 바랐다. 조정의 문관들 중에 유능한 자기 사람이 생기면 물론 큰 도움이 되겠지만, 그보다는 병권을 차지하는 게 더 의미 있었다. 병권은 거의 태자와 정선제가 손에 쥐고 있었다. 그러니 병권이야말로 핵심적인 권력이었다.
하지만 주운환은 장원 급제자이니 문관으로서 나아가는 게 더욱 안정적이었다. 시시각각 급변하는 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법이니 말이다.
주운환이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다년간 훈련을 받았다 하더라도 어쨌든 진짜 전쟁은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않았다. 게다가 그곳에서 목숨을 잃게 되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예, 가겠습니다.”
그럼에도 주운환은 입장을 고수했다. 양왕은 그 단호한 결의가 조금도 기쁘지 않아 낯익은 얼굴을 들여다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돌아가서 다시 잘 생각해 보거라.”
양왕은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또 픽 웃으며 말했다.
“어쩌면 풍씨 가문이 지켜 낼지도 모른다. 그럼 너에겐 조금의 기회도 없는 게다.”
* * *
그 시각, 태자부 정화원.
기다란 녹나무 탑상에 앉아 있는 태자비는 낯빛이 새파랬다.
“내 둘째 오라버니가 어째서 대리시에 갇혀 있는 것이냐?”
“허서와 은정랑인가 뭔가 하는 사람들을 대신해 호적을 고치셨다고 들었습니다.”
금슬이 창백한 얼굴로 고했다.
“그 둘이 뭔데? 겨우 첩실 하나와 의붓자식인데 오라버니가 어째서 그런 어리석은 짓을 했단 말이냐?”
태자비는 화가 나 가슴이 쿵쿵 뛰었다. 은정랑 사건은 하도 떠들썩하게 퍼져 태자비처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도 그 일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있었다.
“게다가 그 장찬이… 감히 그렇게 하다니! 태자 전하께서는?”
“그… 풍 측비 마마의 처소로 가셨습니다.”
“내게는 아무 말씀도 안 하신다는 말이냐?”
금슬이 작은 목소리로 답하자 태자비는 더더욱 노여워했다. 자신의 둘째 오라비 요리가 대리시에 갇혀 있었다. 심지어 태자 쪽 사람에 의해서 말이다. 그러니 태자는 반드시 자신의 처소를 찾아와 얼굴을 내밀어야 했다. 타박하든 뭘 하든 간에 어찌 됐든 얼굴을 내밀어야지, 이렇게 나 몰라라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거 참, 이상하구나. 태자 전하는 요즘 백여언 그 망할 계집만 찾지 않았더냐?”
태자비가 냉소를 지으며 비아냥거렸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로 풍 측비 생각이 나셨나 보구나!”
솔직히 태자비는 백여언 같은 첩실은 안중에도 없었다. 미색밖에 믿는 게 없는 계집이 어찌 자신의 상대가 되겠는가.
반면, 풍 측비는 실로 큰 골칫거리였다. 태자와 백여언의 관계가 한창 뜨거운 이때, 뜻밖에도 태자가 풍 측비의 처소도 찾자 태자비의 마음속에선 경고음이 크게 울렸다.
“집안에서 전해 온 소식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풍씨 가문에 관한 것이옵니다!”
금슬은 냉소 어린 눈빛을 하고는 재차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가 말한 집안은 당연히 요씨 가문이었다.
“응성 쪽에서 또 급보가 날아왔는데 풍 측비의 아버지, 그러니까 풍 대장군님이 참살을 당했다고 합니다!”
“뭐라?”
태자비는 흥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지금 풍 대장군이 참살을 당했다고 했느냐?”
그녀는 희열에 가득 찬 눈빛을 보였다.
“그럼 응성을 지켜 내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응성을 지켜 내지 못하면 서노군이 도성으로 진격해 공격을 퍼부을 테고 그럼 대제는 함락될 것이다. 그러나 태자비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오로지 풍 측비의 가장 큰 버팀목이 무너지려 한다는 것만 떠올렸다.
‘그럼 태자부를 뒤에서 받쳐 주는 가문 중 가장 큰 세력을 가진 가문은 내 친정이 된다! 어디 그때도 태자가 감히 나를 이리 업신여길지 어디 한번 지켜볼 것이다!’
“하하!”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태자비는 천천히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태자 전하께서 왜 풍 측비 처소에 가셨나 했더니 풍 측비가 더 불쌍해서인가 보구나! 여봐라, 오늘은 설합雪蛤(과일에 끓인 산개구리)을 가져오너라!”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단 음식이 당겼다.
* * *
그 시각, 풍 측비의 처소.
네모난 얼굴에 평범하게 생긴 한 여인이 침상에 엎드려 흐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비통함을 숨기지 못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실 리가 없는데……. 아버지서… 흑… 응성은 지킬 거예요! 반드시 지킬 거예요!”
“걱정 마시오. 반드시 지켜 낼 것이니.”
풍 대장군이 참살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태자도 경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곧장 풍 측비를 위로하러 온 태자는 마치 그녀를 위로하면서 자기 자신도 위로하는 것 같았다.
“제 오라버니와 남동생 모두 용맹한 장군입니다. 오라버니와 남동생이 반드시 아버지의 뒤를 이을 겁니다.”
풍 측비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태자의 몸에 기대 눈물을 흘리며 이러한 말들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 * *
주운환이 집으로 돌아오니 시간은 이미 자시子時(밤 11시~새벽 1시)가 다 되어 갔다. 등롱을 든 여한과 함께 난죽거로 향하니 여양이 대문에 놓인 커다란 청석 위에 앉아 있었다. 주운환이 궁명헌으로 가려 하는데 여양이 입을 열었다.
“엽영교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지금 마님 처소의 서쪽 곁채에 계십니다.”
주운환은 날카로운 눈썹을 살짝 찡그렸고 마음이 울적해졌다. 여양은 주운환의 기분이 별로인 성싶자 이렇게 말했다.
“도련님, 마님께서 도련님께 수박 한 조각을 남겨 주셨어요. 침실에 놔두었습니다.”
주운환이 침실로 들어가 보니 작은 원탁 위, 새빨간 수박 한 조각이 담긴 접시 하나가 놓여 있었다. 주운환은 수박을 들고 먹으려던 참에 문 입구에 서서 눈이 빠지게 저를 쳐다보고 있는 여양을 발견했다.
주운환이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안 줄 거니까 저리 가거라.”
기대가 부서진 여양은 맥없이 물러났다.
* * *
이튿날 이른 아침, 관리들은 아직 조정에 나오기 전이었으나 모두 다 풍 대장군이 참살을 당한 일을 알고 있었다.
조회가 시작되자 옥좌에 앉은 정선제가 응성에서 벌어진 일을 거론했고, 이어 조정의 관리들은 잇달아 칭송의 말을 쏟아냈다.
“풍 대장군이 순국하였으니 이 얼마나 비통한 일입니까. 하지만 밑으로 젊은 풍 장군들이 있습니다. 다들 용맹한 장수들이니 분명 대제를 위해 응성을 지킬 것입니다.”
“지난번에 소신이 감독을 하러 갔다가 젊은 풍 장군들의 늠름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다들 훌륭한 장수였습니다. 이제 그들이 실력을 발휘할 때가 온 것이옵니다.”
모든 관원들이 한입으로 장담했으나 상석에 앉아 있는 정선제의 우울한 표정은 전혀 밝아지지 않았다.
“황제 폐하!”
이때, 나이 든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보니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몇 걸음 앞으로 나왔다. 이 사람은 바로 참살을 당한 풍 대장군의 아버지인 풍 노장군이었다. 그는 이미 칠십의 고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