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304화 (304/858)

제304화

“아니에요. 밖에 있는 난죽거가 부군의 서재예요. 부군은 서책을 보거나 할 일이 있으면 그곳에서 자요.”

엽연채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가요. 우선 저희 어머님께 인사를 드려야요.”

그러더니 이리 화제를 틀며 밖으로 향했다.

엽영교는 남의 집에 손님으로 와 있으니 당연히 안주인에게 인사를 드려야 했다. 그녀는 엽연채의 부자연스러운 표정을 눈치채더니 얼른 그 뒤를 쫓으며 물었다.

“너 남편이랑 말다툼한 거 아니야?”

“아니에요.”

엽연채는 입을 삐죽 내밀더니 엽영교의 팔짱을 끼며 재촉했다.

“어서 가요. 늦으면 또 그쪽에서 한 소리 할 거예요.”

엽영교는 방금 전 엽연채가 주운환에게 수박을 남겨 주었던 일이 생각났고, 보아하니 다툰 것 같지는 않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이튿날. 아침이 밝자마자 엽연채는 혜연을 추씨 가문으로 보내 추씨 가문 사람이 엽학문을 찾아가게 했다. 채 마마가 추경과 함께 바로 엽씨 가문으로 향했다.

엽학문은 요 이틀 동안 꾀병을 부렸다. 서재에 앉아 있던 그는 채 마마와 추경이 함께 들어오는 소리를 듣더니 안색이 변했고 유이에게 고함을 질렀다.

“썩 물러가라고 해라!”

그런데 추경은 이미 서재 문밖에 와 있었다.

“엽씨 가문에서 우리 막내이모님을 보내려니 미련이 남는가 보지요? 우리 막내이모님에게 돌아오라고 언제 말을 전할지 고민 중이신 건가요?”

이 말에 엽학문은 화가 나 허리를 꼿꼿이 피더니 당장이라도 탑상에서 내려올 기세였다.

“누가 돌아오라고 한단 말이냐? 알겠다! 내일 아침이 밝자마자 곧장 호부로 가면 되겠느냐? 손님을 배웅하거라!”

유이가 얼른 밖으로 나가 달라는 손짓을 했고, 원하던 답을 들은 추경과 채 마마는 그제야 그곳을 떠났다.

엽학문은 정말로 밖에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온씨 쪽 사람들이 와서 압박하니 다른 수가 없었다. 그는 다음 날 아침이 밝자마자 호적을 품에 안고 호부로 갔다.

그런데 자신과 호부시랑 요리가 자리에 앉자마자 장찬이 사람들을 데리고 안으로 쳐들어와 호적을 압수할 줄, 거기다 자신들을 대리시로 끌고 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엽학문은 화가 나서 속으로 온갖 욕설을 다 뱉었다. 그리고 자신의 사돈인 장찬에게는 더더욱 심한 욕설을 뱉었다.

* * *

한편, 엽연채는 경인에게 은화 백 냥을 쥐여 준 다음, 밖에 나가 건달들을 매수해 그들이 다른 이야기를 떠들게 하라고 분부했다.

허서는 조그만 찻집에 앉아 있었는데, 소문 퍼트리기를 좋아하는 무리가 더 이상 엽영교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떠드는 걸 듣더니 얼굴에 원망과 증오가 섞인 냉소를 지었다.

그도 엽연채 쪽에서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며 분명 돈을 써서 소문을 막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뭐 하겠는가? 엽영교의 평판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후였다.

‘이 허서의 날이 오기만 하면 절대로 너희들이 잘 살도록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는 속으로 그리 다짐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수중엔 돈이 얼마 남아 있지 않으니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우선 도성을 떠나 한동안 회복기를 가진 후에 다시 돌아올 것이었다. 그때쯤이면 태자도 금족령에서 풀려날 터였다.

비록 지난번에 묘기화의 일이 그르쳐졌지만 그건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좀 기다리면 태자의 화도 가라앉으리라. 전에 태자는 저를 훌륭한 신하라고 높이 평가했으니, 기회를 기다렸다가 다시 태자를 위해 깔끔하게 몇 번 일을 처리해 주면 자신의 미래는 전처럼 탄탄대로일 게 분명했다.

‘신분을 바꿔 다시 과거 시험을 칠 수도 있고.’

여기까지 생각한 허서는 동전 꾸러미를 꺼내 동화 백여 개를 집었다. 돈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막 떠나려고 하는 찰나, 포졸 넷이 그에게 걸어왔다.

허서는 관복을 보고 대리시에서 보낸 포졸임을 알아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네가 허서렷다! 끌고 가거라!”

우두머리 포졸이 홱 손짓을 하자 포졸들은 허서를 끌고 갔다.

“왜 이러는 겁니까? 아악!”

허서는 기겁해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한 포졸이 그의 뺨을 때렸는데 어찌나 힘이 센지 치아 하나가 부러지고 말았다.

* * *

장찬이 갑자기 엽학문과 호부상서 요리를 잡아가자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그 시각, 황궁의 어서방. 정선제는 상주서를 보고 있었는데 어린 환관 하나가 다급히 뛰어와 그에게 아뢰었다.

“황제 폐하, 대리시경이 요 시랑을 붙잡아 갔다고 하옵니다.”

정선제는 희끗희끗한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

“장찬이 요리를 붙잡아 갔다고?”

정선제는 그리 말하고는 흐리멍덩한 두 눈을 번뜩였다. 그에 불진을 손에 쥐고 한쪽에 서 있던 채결이 말문을 열었다.

“황제 폐하, 분명 호적을 고친 일 때문일 겁니다.”

정선제는 은정랑과 엽승덕이 벌인 추악한 일 따위에 많은 인력을 동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그들이 혼인 증서를 고쳤으니 호적도 고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또 이 일은 신하와 관련된 문제이니 자연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 장찬의 손녀가 태자 측비가 될 뻔했는데 결국 일이 성사되지 않았지. 그래서 짐은 장찬이 태자와 사이가 틀어질 줄 알았다. 그런데 반년 이상 태자와 여전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여기까지 말하자 정선제의 말투가 싸늘하게 변했다.

태자는 그가 마음에 두고 있는 후계자였다. 그러나 자신이 죽기 전까지는 자신이 황제였다. 자신이 직접 등용한 노신老臣이 태자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게 마뜩잖을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장찬의 손녀는 태자 측비가 되지 못했고 그 때문에 간접적으로 평판에도 크게 흠집이 났는데도 장찬은 태자와 멀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사근사근하게 굴었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일은… 요리와 관계가 있다. 며칠 전 장찬이 호부 쪽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매관만 매수한 거라고 고하는 걸 보고 짐은 장찬이 줏대가 없어 이렇게 태자를 두둔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할 줄이야…….”

“상황을 주시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던 것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채결의 맞장구에 정선제는 그제야 기분이 좀 나아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늙은이가 그래도 충신이긴 하구나.”

“황제 폐하, 대리시경이 뵙기를 청하옵니다.”

이때, 밖에서 어린 환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들라 하라.”

정선제는 온화한 투로 접견을 허했다.

잠시 후, 장찬이 안으로 들어왔고 예를 올린 다음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 소신 죽을죄를 졌사옵니다. 지난번 폐하께서 혼인 증서를 고친 사건을 소신에게 맡기셨는데 소신이 허서가 매관만 매수했다고 아뢰었사옵니다.

당시 허서는 거짓을 고해 호부시랑 요리와의 일은 자백하지 않았사옵니다. 그래서 소신은 만약 소신이 갑자기 호부에 가서 요 대인이 가지고 있는 호적을 압수하면, 그 소식을 들은 엽학문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호적을 인멸해 증거가 불충분해질까 염려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상황을 주시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사옵니다.

오늘에서야 엽학문이 호적을 들고 후부에 찾아왔고, 양쪽이 모두 호적을 가지고 있을 때 소신이 그들을 일망타진했사옵니다. 소신 황제 폐하께 다 아뢰지 않고 숨긴 부분이 있으니 벌을 내려 주시옵소서.”

정선제는 자신의 앞에 납작 엎드려 있는 장찬을 보며 이 노신이 여전히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며 누가 그의 주인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태자에게 칼을 꽂은 셈 아닌가.

정선제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리시경은 자책할 것 없다. 그대도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그런 것 아닌가?”

장찬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나이 든 황제의 주름살 가득한 얼굴엔 따뜻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훅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등에서 흐른 식은땀에 옷이 흠뻑 젖을 지경이었다.

최근 황제는 자신에게 미소를 보인 적이 거의 없었다. 지난번에 자신이 허서가 매관만 매수했다는 보고를 올렸을 때만 해도 그저 냉담한 목소리로 ‘알겠다.’라고 답했을 뿐이었다. 당시 황제가 병세가 심해서라고만 여겼는데 사실은 달랐던 것이다.

만약 자신이 요리를 조사하지 않고 태자의 문제를 덮어 주려고 했다면, 정말로 엽연채가 말했던 것처럼 태자가 제위에 오르기도 전에 장씨 가문은 도성에서 설 자리를 완전히 잃었을지도 몰랐다.

“돌아가서 사건을 계속 심리하거라!”

“예, 폐하!”

장찬은 공손히 대답하고 나서 몸을 굽힌 채 물러갔다.

장찬이 떠난 후에도 정선제는 기분 좋은 상태였다. 그때, 밖에 있던 어린 환관이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황제 폐하, 응성 쪽에서 급보가 날아왔습니다!”

정선제는 ‘응성’이라는 두 글자를 듣기 무섭게 미간을 찌푸렸다. 응성은 대제의 국경이자 요충지로, 서쪽 노족魯族과 남쪽 이민족의 영토가 인접하는 곳이라 늘 두 외족의 공격을 받았다. 게다가 지형마저도 적의 공격을 받기는 쉽지만 지키기는 어려운 지형이었다.

그래도 주씨 가문이 응성을 지키는 수십 년 동안 대제는 평온하게 잠들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주씨 가문이 패하면서 풍씨 가문이 그곳을 지키게 되었다. 풍씨 가문은 가까스로 응성을 지키는 수준이라 응성이 공격을 받았다는 소식이 자주 들렸다.

오늘 그쪽에서 갑자기 급보가 온 걸 보니 분명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것이다.

“가져오너라!”

정선제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어린 환관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황급히 뛰어 들어와 상주서를 바쳤다. 정선제는 상주서를 건네받아 내용을 살펴보더니 표정을 확 굳히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황제 폐하…….”

채결은 정선제의 표정을 보자 가슴이 방망이질했다.

“에잇! 쓸모없는 놈!”

정선제는 손에 들고 있던 상주서를 사정없이 책상에 내리쳤다. 축 처진 그의 얼굴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채결은 놀라서 몸을 움츠렸고 커다란 박달나무 책상 위에 놓인 상주서를 슬며시 곁눈질로 쳐다봤다. 그는 내용을 확인하고는 안색이 싹 변했다.

* * *

한편, 호부시랑 요리가 붙잡혀 갔다는 소식은 조정과 민간에 파다하게 퍼졌다. 한림원의 진지항과 조범수는 작은 목소리로 이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주운환은 느긋하게 붓을 씻고 있었다. 그는 붓을 하나하나 건 다음 퇴청했다.

한림원을 나오자 여한이 그에게 달려와 조용히 고했다.

“도련님, 양왕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그래. 이번엔 어디로 가면 되느냐?”

주운환도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북경北慶 양조장입니다.”

양왕과 주운환이 만나는 곳은 한 곳으로 한정되어 있지 않았다. 한 장소만 자주 드나들면 사람들의 의심을 받기 마련이었다.

주운환이 막 떠나려는 찰나, 진지항이 뒤에서 그를 쫓아와 물었다.

“운환아, 함께 술 마시러 가지 않을래?”

주운환은 입꼬리를 당기며 미소와 함께 거절했다.

“안 됩니다.”

“어?”

진지항은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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