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3화
“됐습니다. 부인이 우리 영교를 위해 생각해 줄 필요 없어요.”
묘씨는 화가 치밀어 올라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장국후부 부인은 자신의 호의가 악의로 받아들여지자 매우 난처하고 곤란해하며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전 마마는 장국후부 부인의 뒷모습을 쳐다보더니 새파래진 얼굴로 말했다.
“저분이 지금 저희에게 화를 내는 거예요? 그날 저 부인이 느닷없이 사람들 앞에서 혼담을 꺼내지 않았다면 저희도 이렇게 피해를 보지는 않았을 겁니다.”
“자네는 어서 가서 영교에게 짐을 꾸리라고 하시게. 연채의 집으로 보내 당분간 그곳에서 머물게 해야겠어!”
묘씨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이런 추잡한 일을 영교가 알게 할 수는 없지. 분명 속상해할 거네.”
전 마마는 그리하겠다고 대답한 뒤 밖으로 나갔다.
한편, 엽영교는 자기 처소에서 옥패와 함께 수본을 그리는 중이었다. 안으로 들어온 전 마마가 바로 말을 전달했다.
“아가씨, 며칠 큰아가씨댁에 가서 지내다 오세요.”
“어, 왜요?”
엽영교는 엽연채 집에 가라는 이야기는 반가웠으나 다소 뜬금없는 감이 있었다.
“아가씨도 아시다시피 아가씨 큰오라버니 일 때문이 집안이 엉망이 되어 버렸잖아요. 아무래도… 밖에서 지내시는 게 아가씨에게 더 좋을 거예요.”
“알겠어요.”
엽영교는 대답을 하고선 얼른 짐을 꾸렸다. 전 마마도 그녀를 도와 갈아입을 옷가지를 정리한 후 마차에 올랐다.
* * *
잠시 후, 엽영교 일행은 주씨 가문 저택에 도착했다. 경인은 그들을 보더니 나서서 일행을 데리고 궁명헌으로 갔다.
“아가씨, 영교 아가씨께서 오셨어요.”
정원에서 꽃에 물을 주고 있던 추길은 엽영교가 오는 모습을 보더니 얼른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 고모가 오셨다고?”
엽연채는 기뻐하며 손에 든 화본을 내던지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고모, 어쩐 일이에요?”
“어머니가 나보고 당분간 너랑 지내라고 하셨어.”
엽영교가 입을 쌜쭉 내밀자 엽연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랬군요……. 음, 서쪽 곁채에서 지내면 되겠네요. 추길아, 혜연아. 가서 청소 좀 하거라.”
엽연채는 엽영교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고, 추길과 혜연은 곁채 청소를 하러 나갔다. 자신이 직접 차를 우리게 된 엽연채가 전 마마를 불렀다.
“마마, 와서 나 좀 도와줘요.”
두 사람은 본채를 나와 이방耳房(본채의 양쪽 옆에 딸린 작은 방)에 있는 차수간茶水間(차를 끓이는 곳)으로 갔다.
그제야 엽연채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할머니께서 갑자기 고모를 여기로 보내다니요?”
“아이 참, 이게 뭐 별일이라고요. 아가씨가 집에만 계시니 답답하실까 봐, 이렇게 큰아가씨댁에 와서 기분전환하게 해 주시려는 거죠.”
“나한테까지 거짓말할 게 뭐가 있어요?”
전 마마가 대충 둘러대자 엽연채는 ‘흥’ 콧방귀를 뀌었다. 전 마마는 그녀가 영리하고 입도 무겁다는 걸 알기에 결국 솔직히 털어놓았다.
“사실은, 밖에서 떠돌던 영교 아가씨 소문이 요 며칠 갑자기 사나워졌어요. 그리고 맹 부인은 저희 가문에 찾아와서는 영교 아가씨를 맹씨 가문 이낭으로 들이겠다는 소리를 하더라고요.
그런데 하필 오늘 그 부인이 왔을 때 방 안에 여종들이 몇 명 있었어요. 영교 아가씨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상심하실까 봐 걱정되어 당분간 이곳에서 지내시게 하려는 겁니다.”
엽연채는 사정을 듣더니 낯빛이 확 어두워졌다.
“그럼 그렇게 해요. 그리고 마마는 돌아가서 할머니께 걱정 마시라고 전해 줘요. 내가 고모를 잘 보살펴 드릴 테니.”
그리 말하며 차가 담긴 주전자를 전 마마에게 건넨 후 이방을 나갔다. 전 마마는 어리둥절해하다가 차 주전자를 들고 본채로 돌아갔다.
엽연채는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난죽거로 뛰어갔다. 주운환은 일찌감치 조정에 나갔지만 여양은 집에 남아 있을 터였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여양이 정원의 돌 탁자 앞에서 수박을 자르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보더니 낯빛이 확 변했다.
“셋째 마님, 제가 수박을 자르고 있다는 걸 아시고 이리 오신 거예요?”
그러자 엽연채는 입꼬리를 삐죽거리며 말했다.
“네 수박 뺏으려고 온 게 아니니 걱정 말아라. 밖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좀 알아봐 주렴. 우리 고모의 소문이 왜 갑자기 이렇게 사나워졌는지 말이다.”
그러잖아도 엽연채는 엽영교가 걱정되어 엽이채 아들의 만월연이 끝난 후 경인에게 밖에서 떠도는 소문에 신경을 쓰라고 특별히 분부를 내렸다. 또 건달을 고용해 그들에게 공연장이나 찻집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다른 신선한 이야기를 퍼뜨리라고도 지시했다.
예를 들면 유 소저가 곧 혼인을 하는데 세도가 집안의 자제에게 시집가지 않고 이번 과거 시험에 합격한 진사들 중에서 남편감을 골라 시집을 간다는 이야기, 또 허 장군이 저택을 골라 곧 그곳으로 이사를 간다는 등의 이야기 말이다.
하나같이 사람들의 주의를 끄는 이야기인지라 효과는 뚜렷하게 나타났고, 자연히 엽영교와 맹흠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확 줄어들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또 그 이야기가 화젯거리가 된 것일까? 그건 분명 누군가가 뒤에서 음모를 꾸몄다고 봐야 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가서 조사하겠습니다.”
여양은 아쉬워하며 수박을 엽연채의 손에 건네주었다.
“셋째 마님, 드세요! 하지만 절반만 드시고 반은 저에게 꼭 남겨 주셔야 돼요. 차가워지게 우물 안에 넣어 주세요.”
말을 마친 여양은 돌아서서 밖으로 뛰어나갔다. 엽연채는 입꼬리를 비죽이더니 수박을 품에 안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엽영교는 처소 밖에 있는 계단에 서서 문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수박을 품에 안고 돌아오는 엽연채의 모습을 보더니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어디 갔던 거야?”
“어… 고모가 먹을 수박을 가지러 갔었죠.”
엽연채는 그리 말하고는 하하 웃어 보였다.
“이 시기에 수박을 어떻게 구했대? 어쨌든 맛있겠다! 얼른 잘라서 먹자.”
엽연채는 정원의 파초 나무 아래, 청석 탁자에 수박을 내려놓았다.
“수박이 꽤 크네!”
엽영교와 전 마마, 옥패가 탁자로 몰려들었다.
“수박이 이렇게 일찍 나왔다고? 작년엔 한창 더울 때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그러게요. 보통 오월은 되어야 나오는데 말이죠. 이제 겨우 사월 초밖에 안 됐으니 구하기 힘드셨겠어요.”
전 마마가 말했다.
“추길아, 가서 칼 좀 가져오너라.”
그리 말하며 엽연채는 평평한 돌 위에 앉았다.
곁채에서 청소를 하고 있던 추길과 혜연은 소리를 듣더니 잇달아 방에서 나왔다. 추길은 칼과 쟁반을 가지러 가고 혜연은 수박을 품에 안고 씻으러 갔다.
잠시 후, 두 사람이 돌아오니 수박은 이미 반으로 쪼개져 있었다.
새빨간 수박은 달콤하고 과즙이 풍부했다. 또 올해 처음 먹은 수박이라 더더욱 그 맛이 특별했다. 그런데 수박이 크지 않아 한참 먹다 보니 어느새 한 조각만 남아 있었다.
엽연채는 얼른 그 수박을 들어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이건 부군 거예요.”
마침 문 입구에 도착한 여양은 그 광경을 보고 울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여양아, 돌아왔구나!”
혜연은 여양을 보더니 얼른 그를 불렀다.
엽연채가 고개를 돌려 보니 정말 여양이 있었다. 그러자 절반은 꼭 남겨 달라고 신신당부했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접시 위에 놓인 그 수박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거 먹으렴.”
“아닙니다. 도련님께 남겨 드려야죠.”
여양은 우거지상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감히 어떻게 도련님이 드실 걸 뺏어 먹을 수가 있겠는가.
“음… 대신 사과랑 간식거리를 주마.”
엽연채는 추길에게 그것들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여양에게 물었다.
“알아보았느냐?”
“예.”
여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터 소식을 알아보기 위해 건달들이나 설화자說話者(전문 이야기꾼)와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이런 일은 한번 나갔다만 오면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허서가 벌인 짓입니다. 그자가 돈을 좀 써서 건달들을 매수한 다음 공연장이나 찻집 등지에서 입을 놀리게 했습니다. 그래서 소문이 점점 더 사납게 번진 겁니다.”
“무슨 소문이 사납게 번졌다는 거야?”
엽영교는 허서의 이름을 듣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고모와 맹흠의 일이요.”
엽연채가 말했다. 그러자 엽영교와 전 마마의 낯빛이 확 변했고 전 마마는 몹시 화가 난 목소리로 욕설을 뱉었다.
“이 빌어먹을 놈! 그 지경에 이르러서도 아직도 수작을 부리는구나.”
그녀는 그리 말하며 독기 어린 눈빛을 번뜩였다.
“이렇게 놔둬서는 안 됩니다.”
“그럼요. 내일 사람을 보내 할아버지가 빨리 호부에 가서 어머니의 호적을 고치도록 재촉할 거예요.”
동조하는 엽연채의 눈빛에 조롱기가 스쳤다.
“이 일이 잘되면 허서 쪽은 우리가 손쓰지 않아도 스스로 무너질 거예요.”
전 마마는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그게… 그놈이랑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마마는 그냥 돌아가서 기다리면 돼요.”
그리 말하며 엽연채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엽영교도 얼른 동조했다.
전 마마는 살짝 무서운 기분이 들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엽연채가 참 대단하다 싶었다. 은정랑 사건에서 엽연채가 정확히 무엇을 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은정랑과 허서는 박살이 나 버리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동안 엽연채는 시종일관 차분하고 느긋해 보였다. 그렇다고 그녀가 정말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았을 리는 만무했다!
“그럼 전 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 영교 아가씨는 이곳에서 잘 지내고 계세요. 터무니없는 생각은 절대 하지 마시고요.”
전 마마는 그리 당부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이내 그곳을 떠났다.
“영교 아가씨, 방 청소를 마쳤습니다.”
혜연의 말에 엽영교는 서쪽 곁채를 보다 문득 뭔가가 떠올라 엽연채를 쳐다보며 물었다.
“연채야, 내가 여기서 지내면 안 불편하겠어?”
“불편할 게 뭐가 있어요.”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갯짓했다.
추길은 잘 자른 사과와 계화꽃떡이 담긴 접시를 들고 나오다가 그 말을 듣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주운환은 이미 궁명헌 밖에서 지내고 있는데 엽영교가 이곳에서 지내게 되면 더욱더 이곳에 오지 않을 것 아닌가.
“하지만 내가 여기서 지내면 네 부군이 이곳으로 못 오는 거 아니야?”
엽영교가 말했다. 그녀가 아무리 세심한 성격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엽연채의 처소에서 지내면 부부가 편하게 지낼 수 없다는 점 정도는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