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298화 (298/858)

제298화

엽연채가 묘안을 내놓자 장찬은 두 눈을 번쩍였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여전히 어찌해야 할지 갈등했다. 자신이 태자를 돕는 걸 황제가 그냥 보고 넘길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방금 전 장만만이 태자부 사람에게 모욕을 당한 일을 떠올리자 그의 마음속에 분노와 원망이 다시금 밀려왔다.

장찬은 머뭇거리다가 갑자기 놀라며 엽연채에게 이리 물었다.

“요 녀석아, 넌 대체 뭘 하고 싶은 게냐?”

장찬은 그녀가 자신과 태자의 사이를 갈라놓으려 한다는 의심이 들었다.

“뭘 하려는 게 아닙니다! 어르신께서 위험한 행동을 하시면서도 그걸 인지하지 못하는 모습을 차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 이러는 것뿐입니다. 게다가 어르신께서도 아시다시피 전 은정랑 모자를 죽도록 미워합니다. 그러니 또 그것들을 붙잡아 대리시로 가고 싶은 것뿐이지요.”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태연히 대꾸했다.

“그런데 너는 말끝마다 태자 전하를 언급하고 있고… 조정의 일에 대해서도 훤히 알고 있구나.”

장찬은 두 눈을 살짝 깜빡였다.

“훤히 알지 못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엽연채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이상하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저희가 호적을 조사하는 일은 호부와 관계되어 있으니 요리 대인과 관계가 있는 것이고, 요리 대인은 태자 전하의 손위 처남입니다. 그러니 저희가 장씨 가문과 태자 전하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요?”

이야기를 듣던 장찬은 멍해지고 말았다. 방금 전 장만만이 백여언에게 모욕을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자신은 부끄럽다는 생각만 했지, 더 크게는 생각하지 못했다. 장씨 가문과 태자의 관계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상심하고 분노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장만만은 말할 것도 없고, 성현의 글을 읽어 장차 관리가 되고 재상이 될 준비를 하고 있는 장박원도 온종일 사사로운 생각만 하고 자신의 체면만 신경 썼다.

‘그런데 이 아이는…….’

장찬은 그런 생각을 하며 엽연채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박원이는 복이 없는 녀석이구나.”

“제가 시집가지 않은 겁니다.”

입을 삐죽거리며 한마디 한 엽연채는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장찬은 재차 멍해지더니 이내 한숨 섞인 웃음을 지었다. 그렇다. 엽연채는 장박원에게는 과분한 사람이었다.

엽연채가 그곳을 떠나 자갈이 깔린 오솔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니 저 멀리 엽영교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연채야, 어디 갔었어?”

“방금 전까지 남편과 함께 있었는데 벗과 시간을 보낸다며 가 버렸어요. 혼자 이곳저곳 거닐다가 심심해져 고모를 찾으러 가려던 참인데, 마침 고모랑 딱 마주쳤네요.”

엽연채가 살갑게 그녀의 팔짱을 꼈다.

“요 며칠 큰새언니는… 네 어머니는 괜찮으시니?”

엽영교는 옅은 한숨을 쉬며 온씨의 안부를 물었다.

“이따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가서 네 어머니를 한번 뵈어야겠어.”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도 추씨 가문 저택에서 지내셨으니 이젠 아주 편하게 계실 거예요.”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녹취쾌원 쪽으로 걸어갔다. 멀리서 보니 크고 널찍한 건물 한 채가 자리하고 있었고 묘씨, 나씨, 맹씨 그리고 귀부인들이 그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엽미채도 그 틈에 끼어 있었는데 나이 많은 부인들 사이에 혼자 앉아 있어 적적해 보였다.

“우리 미채도 데려와 함께 놀아요. 미채는 왜 고모랑 같이 나오지 않은 거예요?”

“너희 어머니가 이혼하신 후로 미채는 계속 우울해하고 있어. 이곳에 와서 친척들을 만났는데도 마찬가지고. 지금은 그저 우리 어머니만 따라다니고 있어.”

엽영교가 퍽 안쓰러운 투로 엽연채에게 사정을 이야기해 줬다.

두 사람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크고 널찍한 건물로 향했다. 엽연채가 엽영교를 끌고 건물 앞의 석가산 입구로 들어갔는데 마침 장국후부 부인의 농담이 들려왔다.

“엽 노부인의 셋째 따님은 나이가 찰 만큼 찼던데, 국수는 언제 먹게 해 주시려나?”

자기 이름이 논해지니 엽영교는 그만 몸이 굳어 버렸다. 그녀가 석가산 출구에 멈춰 서 있는데 묘씨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미 찾고 있답니다.”

“찾을 필요가 있나요? 제 생각엔 바로 눈앞에 적당한 짝이 있는 것 같은데요.”

장국후부 부인은 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맹 부인께서도 아들의 혼처를 찾고 있다고 들었어요.”

맹 부인 등씨는 바로 맹씨의 친정 새언니였다. 엽영교와 맹흠을 짝지어 주려는 장국후부 부인의 말에 묘씨는 두 눈을 반짝였다.

맹씨 가문은 도성에서 학자 가문으로 통하는 편이었는데, 요 몇 년 동안은 딱히 이렇다 할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다. 맹씨의 큰오라버니는 5품 소관에 불과했고, 그의 두 아들도 뚜렷한 성취를 이루지 못했다.

적장자인 맹흠은 글공부를 한다지만, 올해 벌써 스물한 살인데도 수재의 공명도 얻지 못했으니 전도유망한 청년과는 거리가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맹흠은 묘씨의 눈에 차지도 않았을 텐데, 지금 집안 상황이 그러하고 엽영교는 곧 열여덟 살이 되니 찬물 더운물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자칫 딸이 정말로 노처녀가 될지도 모를 판국이었다.

그래서 지금 묘씨의 요구 사항은 그리 높지 않았다. 집안 환경이 그럭저럭 괜찮고 인품이 좋으며 일편단심으로 엽영교에게만 잘해 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이 맹씨 가문 정도면 괜찮은 수준이었다.

“흠이는 솔직하고 상냥하고 영교는 마음씨가 착하고 고상하잖아요. 또 친척 관계인데 왜 혼담을 꺼내지 않으시죠?”

장국후부 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인은 농담도 참 잘하시네요.”

묘씨는 기뻤지만 겉으로는 좀 난처한 티를 냈다.

보통 정말 혼담을 꺼낼 마음이 있으면 중매인이 남녀의 집으로 각각 방문해 우선 말을 꺼내게 한다. 그 후, 양가에서 다 원할 경우 정식으로 만나서 혼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런데 장국후부 부인이 양쪽 집안사람들 앞에서뿐만 아니라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혼사 이야기를 꺼낼 줄 어디 생각이나 했겠는가? 설령 이 혼사를 원하더라도 입이 가벼운 장국후부 부인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유해 보이는 둥근 얼굴의 등씨 역시 표정이 굳어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애는 학식이…….”

등씨는 맹흠의 학식이 모자란다고 말하려 했으나 자기 아들을 깎아내리는 말을 어떻게 스스로 꺼낼 수 있겠는가? 게다가 지금 아들의 혼담을 꺼내고 있는데 입을 잘못 놀려 아들의 평판이 나빠지기라도 하면 장차 어떻게 좋은 배필을 구할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이 들자 등씨는 조금 화가 났다. 자신이 왜 엽씨 가문 때문에 이런 압박을 받아야 하고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가?

등씨는 냉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엽 소저는 정실이 되려는 건가요? 아님 첩실이 되려는 건가요?”

그 말에 살짝 기대하고 있던 묘씨의 표정이 확 굳었고 나씨와 장국후부 부인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묘씨는 분노해 되물었다.

“맹 부인, 그게 무슨 뜻이시죠?”

“말한 그대로인데요?”

등씨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엽씨 가문에서 정실이 첩실이 되고 첩실이 정실이 된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집안에서 일어난 추잡한 일이 언급되자 묘씨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러나 등씨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혼례식을 앞두고 묘 공자는 세상을 떠났잖아요. 무슨 이유로 그리된 건지 모르겠네요.”

즉, 엽영교가 남편 될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소리 아닌가.

“이봐요!”

묘씨는 분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등씨는 묘씨가 무섭지 않았다. 예전이었다면 묘씨에게 어느 정도 예의를 차렸을 텐데 지금은 예전과는 상황이 달라졌지 않은가.

엽씨 가문은 관직이 삭탈되고 작위를 빼앗겼으며 추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특히 은정랑의 사내 꼬시는 기술은 기루의 기녀들에게 전용專用되었다. 정말 추잡하고 역겨웠다.

그런 은정랑이 엽씨 가문으로 시집을 갔으니 이 엽씨 가문 딸은 뭐가 됐겠는가? 자신이 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묘씨의 체면을 세워 준 건데, 감히 화를 낸다니!

“그건 묘 공자가 떳떳하지 못한 일을 저질러 스스로 자결한 거예요.”

나씨가 황급히 끼어들었다.

“떳떳하지 못한 일이요? 그래요!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 묘 공자는 엽씨 가문 마님의 친조카였죠.”

등씨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묘씨 가문은 떳떳하지 못하고 엽씨 가문은 누가 정실이고 첩실인지 불명확하니 참… 정말이지 이게 다 무슨 일인지.”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래도 내 손녀사위는 장원 급제자예요! 학식이 아주 뛰어난 학자이죠.”

“그렇게 대단하니 그럼 그 손녀사위에게 진사를 소개해 달라고 하면 되겠네요. 우리 흠이는 부인의 여식에겐 어울리지 않습니다.”

묘씨는 격노해 가슴이 다 벌렁거렸다. 정자 안에 있던 귀부인들은 귓속말로 자기네끼리 소곤거렸지만, 이런 상황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사람은 늘 있기 마련이었다. 녹색 옷을 입은 한 귀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원만하게 상황을 수습했다.

“우리 저 앞으로 가서 연극을 보면 어떨까요.”

묘씨는 매우 분노했지만 집안에서 일어난 추잡한 일은 도저히 공개적인 자리에서 꺼낼 수 없는 이야기였고, 그녀의 친정에서 일어난 추잡한 일은 더더욱 그랬다. 새파랗게 질린 묘씨는 한 부인이 화제를 돌린 틈을 타 나씨와 함께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떴다.

장국후부 부인은 묘씨와 나씨가 떠나는 모습을 보자 속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어 돌아서서 등씨에게 말했다.

“에휴, 언니도 참…….”

장국후부 부인은 등씨와 사이가 좋았고 묘씨와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내가 뭘?”

등씨는 노여운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봤다.

맹씨 가문은 장국후부만큼 집안이 크지도 재산이 많지도 않아 평소 등씨는 장국후부 부인에게 잘 보이려고 했다. 하나 이번만큼은 참고 넘길 수 없었다.

“저 엽씨 가문은 성품이 막되고 염치를 모르는 가문인데 넌 저런 집안을 우리 흠이의 혼처로 이야기하고 싶니? 저 엽씨 가문 사람들에게서 인품과 덕성은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잖아. 관직은 삭탈되고 작위도 빼앗겼으며 도성의 웃음거리가 되었는데 저런 집안을……!

네 눈에는 우리 맹씨 가문이 그렇게 형편없나 보지? 어떻게 저런 집안 여식을 혼인 상대로 이야기할 수가 있어!”

“그건…….”

장국후부 부인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추잡한 일 한둘쯤 없는 집이 어디 있겠어요. 엽승덕은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지만 영교는 어릴 때부터 내가 지켜봐 온 아이예요! 언니도 그런 셈이잖아요. 용모뿐만 아니라 인품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아이예요.”

“하하, 그렇게 훌륭한 엽 소저에게 우리 가문이 어디 어울리겠어?”

등씨는 콧방귀를 뀌고는 소매를 뿌리치며 밖으로 나갔다.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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