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297화 (297/858)

제297화

“여언 소저……. 아니 측비 마마,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습니까?”

감정을 억제하듯 퉁명스러운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장찬은 그 목소리를 듣곤 순간 멍해졌다. 바로 자신의 손녀인 장만만의 목소리였다. 게다가 상대는 작년에 태자부로 들어간 태자 측비 백여언이 아닌가?

‘두 사람이 어째서 한곳에 있단 말인가?’

이내 비웃음과 의기양양함이 담긴 백여언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중요한 일로 부른 건 아니에요. 그저 산책을 좀 하고 싶어서요. 소저도 알죠? 전에 우리 백씨 가문이 가난했을 때, 돌아가신 우리 조부님과 장 대인께서 친분이 좀 있어서 소저 댁에 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 집으로 초대장을 보내 주어 우리가 견문을 넓힐 수 있게 해 줬잖아요.

하지만 이곳에 오면 사람들은 모두 우리를 업신여겼고 오직 만만 소저만 저에게 상냥하게 대해 줬죠. 지금 난 이곳에 아는 사람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친분이 있는 만만 소저가 나와 함께 바람을 쐬어 줘야겠어요.”

장만만은 가슴이 꽉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고개만 돌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여언은 그녀의 표정을 보니 상당히 즐거워져 조롱기 가득한 눈빛을 띠었다.

“전에… 내가 사람들한테 따돌림을 당할 때 만만 소저도 웃으면서 내게 함께 바람을 쐬어 달라고 했죠. 그래서 난 그 난처한 상황을 피했고 또…….”

또 과분하게도 장만만과 교분을 쌓을 수 있었다. 그때 자신은 너무나 기뻤고 장만만에게 공손하게 행동했다. 그랬던 자신이 장만만의 머리 위에 서게 되는 날이 올 줄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측비 마마. 단지 함께 바람을 쐴 사람을 찾고 계신 거라면 제가 다른 소저를 불러다 드릴게요. 제가… 오늘은 조카의 만월연이라 손님들이 많아 오래 머무를 수가 없습니다. 돌아가 봐야 해요.”

장만만은 잠시도 이곳에 더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 눈이 시큰거렸다.

그러나 백여언은 그녀를 이대로 보내 주고 싶지 않았다. 아직 실컷 데리고 놀지도 못했고, 장만만의 표정도 너무 침착해 보이니 기대만큼 통쾌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결국 직접적으로 비웃는 말을 꺼내 들었다.

“소저는 정말로 소저의 오라버니와 새언니의 일 때문에 간택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정말로 태후 마마께서 소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럴 리가요. 그분께서 소저를 전혀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아서 그런 거예요!”

장만만은 깜짝 놀랐다.

“뭐라고 하셨어요?”

“별말 아니에요. 돌아가서 소저 스스로 생각해 봐요!”

장만만의 머릿속에서 쾅 하고 굉음이 울렸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완전히 넋이 나가 버렸다.

백여언은 장만만의 창백한 얼굴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유쾌해졌다. 그녀는 제일 자신 있어 하는 조롱기 섞인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입꼬리를 쓱 올리고는 돌아서서 천천히 그곳을 떠났다.

장만만은 그제야 발아래 놓인 커다란 청석靑石 위에 털썩 주저앉았고, 괴로운 마음에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 누군가의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만만 언니?”

장만만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새 장찬이 곁에 와 있었고 엽연채도 근처에 서 있었다. 장만만은 허둥대며 눈물을 닦았다.

“할… 아버지.”

“여기서 뭐 하는 것이냐? 내가 멀리서 보니 너와 백 측비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더구나. 그런데 갑자기 어째서 우는 것이냐?”

장찬이 미간을 찌푸리며 연유를 물었다.

“그게…….”

장만만의 조그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언짢은 일이 생각나서요……. 별일 아니에요.”

“별일 아니라니? 백 측비가 너에게 뭐라고 한 것 아니냐?”

장찬이 캐묻자 장만만은 낯빛이 확 변했다. 방금 전 백여언이 했던 말을 어떻게 자기 입으로 전할 수 있겠는가?

‘그분께서 소저를 전혀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아서 그런 거예요.’라는 백여언의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황후가 저를 내켜 하지 않았단 걸까? 아님 태자가 그랬단 걸까?

장만만은 부끄럽고 분해 견딜 수가 없었다. 상대방이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는 말을 어떻게 꺼낼 수가 있겠는가?

태자 측비로 간택되지 않아 그러잖아도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 자신이 너무 못나서 그들이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은 거라고 말하게 되면, 자기 체면이 뭐가 되겠는가? 차라리 엽이채와 장박원 때문에 탈락하게 된 편이 나았다.

장만만은 눈물을 흘리며 대충 둘러댔다.

“아니에요. 백 측비는 좋은 마음으로 저와 이야기를 나누셨어요……. 그냥 제가 안 좋은 일이 생각나서 그런 거예요.”

그리 말하고선 돌아서서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장찬은 그 모습에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르신, ‘전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엽연채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문을 뗐으나 장찬은 뒷짐을 진 채 말을 아꼈다. 자신도 백여언의 그 말을 들었을 때 속으로 장만만만큼이나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을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장만만이 간택에서 떨어진 이유가 장박원과 엽이채가 벌인 추접한 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백여언은 지금 ‘그분’이 장만만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도대체 그분이 누구란 말인가? 태자? 아니면 황후?

“제가 이 일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엽연채가 홀로 말을 이어갔다.

“작년 유월 말에 제가 공주부에 갔다가 태자비 마마를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그 후 태자비 마마께서는 자주 저를 불러 말린 꽃을 만들게 하셨어요.

한번은 제가 태자부의 장미 정원에 가서 꽃을 따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태자 전하와 이계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꽃에 가려졌기에 태자 전하께서는 저를 못 보시고 속내를 밝히셨습니다.

전하께서 이계에게 원래는 만만 언니가 그런대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우연히 백여언을 만나게 된 후 생각이 바뀌셨다고 하셨죠. 백여언을 측비로 삼고 싶으니 만만 언니와의 혼약은 무르고 싶다고 하시면서요.

그런데 어르신께 만만 언니를 측비로 맞이하겠다고 이미 약속했는데 갑자기 혼약을 무르겠다고 하면 어르신께서 앙심을 품으실 테니 다른 수를 써야겠다고 하셨죠.

태자 전하는 묘책을 떠올리셨어요. 바로 태후 마마께 장박원과 엽이채 그리고… 음, 저와의 일을 꺼낸 거죠. 아니나 다를까, 그 말을 들은 태후 마마께서는 격노하여 만만 언니를 후보에서 제명하셨고요.

그리고 태자 전하는 한 가지 계획을 더 세우셨어요. 바로 양왕 전하의 생신 축하연에서 백여언에게 부딪혀 실수로 살을 맞대게 되는 계획이었죠. 그리함으로써 만만 언니와의 혼사를 물리고 원하던 미인을 품에 안으신 겁니다. 그분의 명예엔 털끝만큼도 손상이 안 갔고요.”

전후 사정을 들은 장찬의 엄한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버렸다. 눈치 빠르고 총명해 보이는 매의 눈엔 분노가 서렸고, 그는 계속해서 눈을 깜빡였다.

장만만이 태자부로 시집가는 건 평범한 남녀 간의 혼인이 아니라 정치적 계산이 들어간 정략혼인이었다. 전에 자신은 몇 번이나 까다로운 일을 해결해 줌으로써 태자가 큰 공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왔다. 그래서 장만만을 측비로 맞이하겠다고 약속한 것 아닌가.

그런데 태자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비열한 방법으로 장만만을 내쳐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장만만은 측비가 되지 못했고 장씨 가문의 명성도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명성은 아직까지도 회복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주운환이 장원 급제를 한 뒤로 사람들은 장씨 가문을 더욱 심하게 비웃어 댔다. 주운환과 장박원이 신부를 바꿨으니 둘은 사람들의 비교를 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럼에도 자신은 주운환을 미워하지 않았다. 장원 급제를 한 건 주운환의 실력일 뿐, 장박원의 자리를 빼앗은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태자는 달랐다. 장찬은 태자의 뻔뻔스러운 짓거리를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분노도 잠시, 그는 빠르게 냉정을 되찾았다.

태자가 그리했다 한들 자신이 뭘 어쩔 수 있겠는가? 태자가 대통을 잇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고, 그는 손에 많은 것을 쥐고 있으며 황제 또한 태자를 인정하고 있었다.

자신은 태자의 털끝 하나 건들 수 없는데 이번에 태자의 노여움을 사게 되면 어찌 되겠는가. 향후 그가 황위를 물려받으면 장씨 가문이 도성 안에서 발붙이고 살 수나 있겠는가?

“어르신, 태자 전하 때문에 염려하고 계신 거죠?”

엽연채는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어르신께서 이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하시면 태자 전하께서 영광스럽게 제위에 오를 때까지 버티시기도 힘들 겁니다. 장씨 가문 역시 도성에서 발붙이고 살 수 없겠죠.”

그 말에 장찬은 깜짝 놀랐다.

“그런……!”

“어르신, 잊으시면 안 될 게 있습니다. 어르신께서 호부시랑이 태자 전하의 사람인 걸 아는데 황제 폐하께서 과연 모르시겠습니까? 어르신은 손녀를 태자부로 보내 측비로 만들려고 했고 태자 전하께 기대려고 하셨습니다.

이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황제 폐하께서는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셨죠. 이제 만만 언니의 혼사는 엎어졌고 장씨 가문은 이로 인해 명성이 바닥에 떨어졌는데, 그럼에도 어르신께서 태자 전하에 관한 일을 감싸고돌면 황제 폐하께서 어찌 보실까요?”

어심御心이 언급되자 장찬은 소스라치게 놀라 식은땀마저 흘렸다.

본인이 태자를 인정했으니 황제는 신하들이 태자의 비위를 맞추려 하는 부분을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 주었다. 그러나 거기에도 정도가 있었다. 지나치게 아첨한다면 황제가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황제는 아직 옥좌에 앉아 있었다. 권력을 내려놓으려고 했다면 아픈 몸을 이끌고 계속해서 조정에 나오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요리 하나 건들지 않는다면 황제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의 눈 밖에 나면 정말로 엽연채가 방금 전에 말했던 것처럼 태자가 영광스럽게 제위에 오를 때까지 버티기 힘들 것이었다. 그럼 장씨 가문 역시 도성에서 발붙이고 살 수 없으리라.

“하지만 어제 이미 황제 폐하께 보고를 드렸다. 그자들이 매관을 매수했단 사실만 밝혀냈다고 말이다.”

장찬이 하얗게 변한 얼굴로 말했다.

“그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이혼을 하셨으니 며칠 뒤에 저희 할아버지께서 요리 대인을 찾아가 호적을 바꾸려고 하실 겁니다. 어머니의 이름을 호적에서 지우시겠죠. 그때 두 분을 붙잡으면 죄인과 물증을 모두 얻게 되니 어르신께도 변명할 구실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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