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296화 (296/858)

제296화

“주 부인, 어서 가서 아이 좀 봐요.”

엽연채와 주운환은 사람들에게 빼곡히 둘러싸인 채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엽이채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고개를 숙여 요람에 든 아이를 쳐다봤다. 살결이 보들보들한 아기는 입에 거품을 물고 있었다.

아주 귀여운 모습이었으나 엽연채는 아무리 봐도 요 녀석에게 호감이 들지 않았다. 이 아이는 전생의 그 아기이니 말이다. 이생에서 그저 1년 먼저 태어난 것뿐이었다. 이 아기 때문에 자신은 너무도 많은 것을 잃었었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를 탓해서는 안 되겠지만, 엽연채는 지금 사람이 싫으면 그 집 지붕의 까마귀마저 꼴 보기 싫은 기분이라 도저히 이 아기를 예쁘게 볼 수가 없었다.

“큰아가씨, 어서 와서 아이 좀 안아 봐요. 그래야 큰아가씨도 얼른 우리 귀한 아이에게 남동생을 만들어 주죠.”

손씨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엽이채는 그 말을 듣더니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고 엽연채의 홀쭉한 허리로 시선을 향했다.

“언니는 저보다 한 달이나 일찍 혼인했는데 아직도 소식이 없네요. 제가 아주 괜찮은 의원을 알고 있는데 나중에 언니에게 소개해 줄게요.”

엽연채는 오늘 엽이채와 시답잖은 이야기나 하려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기에 그저 무덤덤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꾸했다.

“난 시끄러운 게 싫어서 아기를 낳고 싶지 않은 것뿐이다.”

엽이채와 손씨는 엽연채가 그저 핑계를 대고 있다고 생각해 ‘픽’ 하고 냉소를 지었고, 몰라보게 여윈 장박원의 얼굴에도 비웃는 기색이 어렸다.

“아내로 맞지 않아서 참 다행이군.”

이 말은 대단히 악의적이었다. 그가 엽연채를 찼던 일을 또다시 언급하자 분위기는 저절로 얼어붙었고 사람들은 엽연채가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이리 말할 뿐이었다.

“절 아내로 맞지 않아 줘서 정말 고마워요. 안 그랬으면 이렇게 훌륭한 남편에게 시집가지 못했을 테니까요.”

그 말에 장박원은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다. 엽이채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어 낯빛이 변하여 저도 모르게 주운환을 쳐다봤다.

연청색 평상복을 입고 있는 그는 청수하고 화려한 얼굴에 맵시 있고 우아한 풍채를 드러내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재능이 넘치는 장원 급제자였다.

그러자 엽이채는 문득 한 가지 일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녀는 전부터 엽연채가 횡재를 했다고 생각했다. 얼떨결에 시집간 서자 남편이 뜻밖에도 과거 시험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자신은 장박원에게 시집을 왔는데 그는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으니 재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자신은 단순히 재수 없는 게 아니라 지독히도 재수가 없다는 걸 문득 깨닫게 되었다. 자신은 남의 남편만 빼앗은 게 아니라 그러면서 한 사내도 차 버렸는데 그 사내가 하필 바로 주운환이었으니까.

주운환은 전에는 존재감이 없다가 갑자기 확 튀어나온 사람이었다. 본래 그는 엽연채를 장박원이 아닌 다른 사내에게 붙여 주기 위해 되는대로 데리고 온 별 볼 일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불현듯 주운환은 사실 늘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과 무려 5년 동안 정혼 관계를 유지해 왔던 정혼자였다.

자신은 주운환과 그렇게 가까운 관계였다. 엽이채는 그에게 시집가야 했던 사람은 원래 자신이었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 멋진 남편은 원래 자신의 사람이었다. 그러니 장원 급제자의 부인도 자신이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엽연채 이 망할 년이 내 사내를 차지해 버렸어!’

엽이채는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눈앞이 흐릿해졌다. 강과 바다가 뒤집히는 양 씁쓸한 기분이 휘몰아치며 그녀를 확 덮쳐 버렸다.

“갑시다. 아이도 봤으니 밖에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는 게 좋겠군요.”

이때, 주운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엽연채에게 이리 권했다.

“네.”

엽연채는 꼭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을 상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엽영교를 비롯한 친정 식구들에게 인사했다.

“고모, 할머니. 전 밖에 나가 볼게요.”

“그래. 가 보렴.”

엽영교가 인사를 받아 주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데려다줄게!”

장만만이 그들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 이쪽으로 와요.”

엽연채는 주운환과 함께 장만만을 따라가 밖에 마련된 손님들을 접대하는 정원에 도착했다. 이 정원은 녹취쾌원綠翠快園이라고 불리는 곳인데 주연을 베풀고 손님들을 접대하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었다.

녹취쾌원은 회랑이 구불구불 이어져 있고 정자와 누각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남손님들은 곳곳에서 술 마시기 시합을 벌이고 있고 우측의 여손님들은 꽃구경을 하고 있었다.

엽연채 부부와 장만만은 오솔길을 걸어 정원 안으로 들어갔다.

“태자 측비 마마께서 오셨습니다.”

이때,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백 측비가 왔구나.”

순간 멍해진 엽연채는 발걸음을 멈추었고 장만만도 얼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또 다른 입구로 늘씬한 체형을 가진 한 여인이 사람들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화려하고 부유한 차림의 여인은 앞뒤로 호위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바로 작년에 태자부로 시집간 백여언이었다.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할 만큼 아리따운 용모를 가진 그녀는 국화 문양이 수놓아진 노란빛을 띠는 대금식 유군을 입고, 머리에는 보석과 진주로 장식한, 봉황이 날개를 펼친 모양의 순금 장신구를 꽂고 있었다.

장만만은 씁쓸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가까이 오는 백여언을 쳐다봤다. 원래 태자부로 시집을 가야 했던 사람은 자신이었는데, 지금은 처지가 달라졌다.

백씨 가문과 장씨 가문은 친분이 좀 있었다. 전에도 경조사가 있으면 두 가문은 서로 왕래를 하곤 했는데, 그때만 해도 백씨 가문이 태자 측비의 친정으로 부상할 줄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리고 장만만과 백여언도 친한 벗은 아니어도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엽연채는 실의에 빠진 장만만의 눈빛을 보았으나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여기저기 돌아다녀 볼게요.”

“그래, 가 보렴!”

장만만은 겨우 미소를 지었다.

엽연채와 주운환이 오솔길을 따라 걸어가 보니 앞쪽으로 투구 모양의 사각지붕이 달린 정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엽연채가 아무도 없는 정자 안으로 들어가자 주운환이 말했다.

“가서 그분을 이쪽으로 보내겠습니다.”

“네.”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운환은 근처 물가에 지은 정자로 향했다. 그곳에선 관원들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장찬도 그 자리에 있었다. 증손자를 얻어 기분이 아주 좋은 그는 동료들과 함께 시원하게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장 대인.”

주운환이 그에게 다가갔다.

“아, 운환이구먼.”

장찬은 주운환을 보더니 하하 웃으며 술을 권했다.

“이리 와 한잔하게.”

“저쪽에서 대인을 찾고 있습니다.”

주운환은 입꼬리를 쓱 올리며 멀리 있는 사각지붕 정자를 가리켰다.

“누가? 무슨 일로?”

장찬은 어리둥절했다.

“음… 제 내자인데 무슨 일로 대인을 찾는지는 모릅니다.”

엽연채가 저를 찾는다는 말에 장찬은 희끗희끗한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정자를 나섰다. 오솔길을 따라 걸으니 엽연채가 자리에 서서 풍경을 감상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인기척을 느낀 엽연채는 고개를 돌려 장찬에게 예를 올렸다.

“어르신.”

“오, 연채구나.”

장찬은 엽연채를 쳐다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은 본래 엽연채를 아주 마음에 들어 했는데, 망할 놈의 손자가 엽이채 같은 걸 아내로 맞이했으니 아직도 속이 쓰렸다.

“날 찾았다는데…….”

“전에 제 아버지와 은정랑, 허서가 대리시에 갔는데 거기서 매관만 매수했다고 이야기했다지요? 그런데 제가 친정집에 가 호적을 들춰 보니 호적이 고쳐진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거기다 호부의 인장도 찍혀 있더군요.”

엽연채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찬은 그녀가 집안일로 자신을 찾은 줄 알았는데 이런 이야기를 꺼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장찬은 몹시 놀라 순간 얼이 빠졌다. 그러나 이내 눈을 가늘게 뜨더니 하하 웃으며 무마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네 아버지와 그들이 그럴 만한 수완이 있겠느냐? 그냥 매관만 매수한 것이 아니더냐?”

‘집안 호적을 봤다고? 이 어린 계집애가 나를 속이고 있구나! 정말로 고쳤다면 이 애가 보도록 놔뒀을 리가 없거늘.’

엽연채는 짙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대꾸했다.

“제가 봤든 아니든 간에 호적은 고쳐졌습니다. 어쨌든 혼인 증서를 고친 사건과 연관이 있는데 어르신께서는 조사하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그 말에 장찬의 낯빛이 확 변했다. 자신도 그들을 심문할 당시 호적에 대해 생각했었다. 그러나 허서 등을 심문할 때 혼인 증서만 고쳤냐고 물어봤었고 허서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일부러 더 이상 추궁하지 않은 것이다. 더 추궁하고 들면 너무 많은 것들이 연루될 것이니 말이다.

호부시랑 요리는 태자의 손위 처남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표면적으로만 왕당파王黨派이지, 사실 태자에게 들러붙을 생각뿐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장만만을 태자 측비로 만들려고 그리 기를 썼겠는가. 측비 일은 물 건너갔더라도 자신은 여전히 태자의 일에 훼방을 놓고 싶지 않았고, 태자의 사람을 건드리고 싶지도 않았다.

“넌 쓸데없이 의심이 많구나.”

장찬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엽연채를 쳐다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여인이 어찌 이런 일에 참견하는 것이냐? 설령 그것들이 정말로 호부 쪽을 매수해 호적을 고쳤다 하더라도 매 몇 대 더 맞는 게 고작이다.”

“더 맞아야 한다면 그리해야죠.”

엽연채는 물러서지 않고 작게 콧방귀를 뀌었다.

“됐다. 그것들을 혼내 주고 싶으면 차라리 사람을 시켜 매질을 하면 그만이다.”

장찬이 이리 나오자 엽연채는 어이가 없었다. 이게 산전수전 다 겪은 어른 입에서 나올 말인가? 하지만 그 덕에 장찬이 이미 마음을 정했고, 태자의 사람을 건드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되었다.

엽연채는 하늘을 쳐다보더니 정자 밖으로 걸어 나갔다.

“어르신, 이쪽으로 오세요.”

장찬은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그녀를 따라나섰다. 방금 전 호적 이야기에 관해 따지고 들던 모습을 보니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손님들을 대접하는 정원을 벗어나, 엽연채는 일부러 여기저기를 돌며 인적이 드문 곳을 골라 그쪽으로 걸어갔다.

뒤를 쫓아가던 장찬은 불현듯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자신의 집인데, 어찌 엽연채가 이리 길을 속속들이 꿰고 있단 말인가? 본인의 후원을 걷는 양 그녀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전연 없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한적한 장소에 도착했다. 앞쪽으론 반죽斑竹(검은색 반점이 박힌 대나무 종류)이 드문드문 보였고, 근처엔 붉은 칠을 한 낭가廊架가 자리했으며 그 주위엔 진달래가 가득 심어져 있었다.

“여긴 왜 온 것이냐?”

장찬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묻자 엽연채가 가느다란 손가락을 입술 위로 갖다 대며 ‘쉿’ 소리를 냈다.

곧이어 근처에서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장찬은 대나무를 사이에 두고 어렴풋이 노란 옷과 파란 옷을 입은 두 사람의 형체를 보았다. 치장한 모습과 옷차림을 보니 젊은 여인들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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