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295화 (295/858)

제295화

고씨는 당혹스러웠다. 뜻밖에도 진씨는 상대방의 용모와 나이조차 묻지 않았다. 고씨가 눈꺼풀을 떨며 다른 후보를 입에 담았다.

“공부상서工部尙書 적차손嫡次孫인 종…….”

진씨는 울컥 화가 치밀어 올라 눈썹을 치켜세웠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 묘서는 백부의 적장녀일세. 게다가 전에는 자주 태자비 마마의 초대를 받아 태자부에 가서 시간도 보내곤 했네. 얼마 전 황제 폐하께서 과거 시험 합격자에게 베푸는 연회에선 폐하께서 우리 백야를 직접 부르기도 하셨지.

집안에서 가장 능력이 부족한 그… 아이마저도 장원 급제를 했네. 묘서의 큰오라비도 물론 뒤처지지 않는데 그 아이는 그저 재능을 과시하길 좋아하지 않는 것뿐이네.”

고씨는 입꼬리를 씰룩이더니 허허허 웃으며 말했다.

“마님, 원하는 가문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지난번 우리 묘서는 공주 마마의 하소군왕과 혼사를 논했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주팔자가 맞지 않아 혼인이 성사되지 않았네.”

하소군왕이라는 말을 들은 고씨는 얼굴에 불신을 내비쳤다.

‘뭐라는 거야. 군왕이 주묘서를 원했다고?’

방금 전 진씨는 말은 참 번지르르하게 했다. 황제가 주 백야를 불렀다고 강조했는데, 조정에 나가는 5품 위의 관원들은 거의 매일같이 황제를 보았다.

또 비록 집안에 소년 장원 급제자가 나와 영광을 누리게 되었으나 그쪽은 서자였고 주묘서는 적녀였다. 한 어머니 배 속에서 나온 남매도 아니며 주묘서에겐 친오라비도 있었다. 이후 적자와 서자가 다투게 되면 장원 급제자의 누이동생이라는 후광도 자연히 확 줄어들게 되는 법이었다.

“우리는 지금 혼사를 논하고 있는데 아무렴 지난번보다 수준 낮은 집안을 찾아서야 되겠는가?”

진씨가 홀로 말을 이어 갔다. 생각해 보니 상대는 반드시 작위를 가지고 있어야 하고 적장자여야 했다. 그래야 자신의 외손자가 작위를 물려받을 것 아닌가. 그뿐만 아니라 영국후부, 강왕부, 공주부처럼 번성한 가문의 자제이며 실무를 맡은 사람이어야 했다.

“어찌 됐든 간에 우리 묘서는 그런 수준의 사람들과 어울렸던 아이이고 태자부나 공주부 등은 우리 가문과 대대로 교분이 있는 집안이네. 그러니 어쨌든 강가降嫁할 수는 없네. 그렇지 않은가?”

“예, 예. 그럼요.”

고씨는 속으로 ‘얼씨구’ 했다. 그렇게 친하면 왜 태자부나 공주부로 시집보내지 않고 자신을 찾았단 말인가? 그러나 입으로는 예의를 차렸다.

“하지만 부인, 소인에겐 그런 혼처가 없습니다.”

진씨가 미간을 찌푸리자 고씨는 미소를 지으며 새로이 제안했다.

“아니면, 이러시면 어떻습니까? 주 대소저께서 출중한 분이니 부인께서 마음에 드는 집안이 있으시면 제가 부인을 대신해 그 집에 가서 혼담을 꺼내 보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진씨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리하면 여인 쪽에서 적극적으로 혼삿말을 꺼내는 모양새가 되니 좋지 않았다. 그리되면 딸이 어찌 귀하게 여겨지겠는가? 나중에 정말로 혼인이 성사된다 해도 딸은 업신여김을 당할 것이다.

“시간이 늦었군요. 소인은 다른 집에 가 봐야 합니다.”

고씨는 말을 마친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분이 언짢아진 진씨는 일어나지 않고 그저 녹엽에게 고씨를 수화문까지 배웅해 주라고 했다.

고씨가 마차에 오르자 그녀의 어린 여종이 입을 열었다.

“군왕 같은 귀족이나 권신의 자제들은 결코 저희 같은 사람을 찾아 혼사를 논하지 않습니다. 그분들은 혼사 걱정을 하지 않으니까요. 적령기의 자녀가 있으면 벌써 중매쟁이들이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겠죠.”

“자기 여식에게 혼담이 오가는 사람조차 없는 건 생각도 안 하고 황실과 귀족을 넘보다니! 철면피도 저런 철면피가 없구나!”

고씨도 콧방귀를 뀌며 동조했다.

마차는 잠시 후 엽씨 가문에 도착했다. 고씨가 마차에서 내리자 여종이 그녀를 데리고 안녕당으로 향했다.

소식을 전해들은 묘씨는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걸어 나와 미소를 지었다.

“앉으시게.”

“그게… 다른 집에도 가 봐야 하니 자리에는 앉지 않겠습니다.”

고씨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뗐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가문들은 혼사를 원치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묘씨의 표정이 굳어졌다.

“처음엔 그 국자감 학장 쪽에서 마음이 좀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원래는 그러셨는데 부인께서도 아시다시피 최근 부인 가문에서 소란이 일어나… 에휴…….”

고씨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인은 이 일에서 손을 떼겠습니다. 다른 매파를 찾아보시지요! 호하 골목에 있는 매파는 어쩌면 적당한 혼처를 구해 드릴지도 모릅니다.”

묘씨는 창백한 얼굴로 탑상에 앉았고, 이어 항탁 위에 올려놓은 손을 뼈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꽉 움켜쥐었다.

고씨는 귀족들 간의 혼사만 맡는 사람이고 그 밑 다른 매파들은 중류층 부호들의 혼사를 맡았다. 그러나 호하 골목의 매파들은 그보다도 아래, 상인들 간의 혼사를 맡는 자들이었다.

고씨는 눈물이 고인 묘씨를 보니 조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전에 엽영교도 본 적이 있는데 그녀는 귀엽고 아리따우며 단정하게 생긴 소저였다. 원래는 묘 공자와 잘되어 가고 있었는데 결국 일이 이리 되었다.

게다가 지금 엽씨 가문은 관직도 삭탈되고 작위도 빼앗겼다. 하지만 사실 가장 주요한 문제는 가세가 기운 게 아니라 평판이 너무 안 좋다는 것이었다.

“아니면 친척이나 지인에게 소개를 받는 건 어떠신지요? 그리하면 거리감이 덜 느껴질 겁니다.”

고씨는 말을 마친 후 그곳을 떠났고 묘씨는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훔쳤다. 그런데 이때, 주렴이 걷히는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엽영교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묘씨가 우는 모습을 보더니 얼른 앞으로 걸어갔다.

“어머니, 왜 그러시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다.”

묘씨는 눈물을 닦더니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내일이 네 질손이 태어난 지 한 달이 되는 날이니 꼭 가 봐야 한다.”

“질손이요?”

엽영교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되물었다.

“제, 제가 할머니가 된다는 말씀이세요?”

“이채의 아들이 네 질손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냐? 이제 할머니도 되었는데 어서 시집가지 않고 뭐 하는 게냐.”

“지금 제 처지가 이런데 시집이라뇨? 전…….”

엽영교가 웃으며 말을 이으려는 찰나, 묘씨가 다시 눈물을 흘렸다. 엽영교는 깜짝 놀라더니 입을 실쭉거리며 말했다.

“가면 될 거 아니에요! 어머니도 참.”

* * *

이튿날. 아침이 밝자 엽영교는 묘씨, 엽승신네, 엽승강네와 함께 장씨 가문으로 향했다. 엽학문은 사람들을 볼 낯이 없어 아픈 척하며 집에 남아 있었다.

밖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기는 엽승강과 나씨도 마찬가지였다. 집안에서 터진 추문이 하도 많아 남 보기가 너무도 창피했지만, 엽이채는 친조카이니 안 갈 도리가 없었다.

한편, 장씨 가문은 대를 이을 아들이 부족했는데 엽이채가 단번에 득남했으니 기뻐하며 오늘 성대한 연회를 벌였다. 손님들이 끊이지 않고 대문을 넘어섰다.

엽이채는 전지纏枝 문양이 들어간 짙은 남색 배자를 입고 머리에는 바람을 막아 주는 말액을 두르고 있었다.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안뜰의 소청에 앉아 있었는데, 친척들이 우르르 소청으로 몰려와 요람에 누운 아이를 어르고 있었다.

그리고 장박원은 초점 없는 멍한 눈을 하고서 한쪽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는 밖에 나가 손님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다.

오늘은 이 부부에게 경사스러운 날이었다. 단번에 득남하여 장씨 가문 적장손을 낳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장씨 가문 공신이라 할 수 있는 엽이채는 조금도 기쁘지가 않았다.

주운환은 장원 급제를 했는데 장박원은 낙방을 했으니, 분통이 터져 아들을 낳고도 기쁘지가 않았다. 그나마 엽씨 가문에서 사실은 온씨는 평처였고 은정랑과 허서가 정실부인과 적장자였다는 뜻밖의 일이 벌어지자 말도 못 하게 흥분되고 설렜었다.

‘망할 년, 오만방자하게 굴고 잘난 척해 봤자 평처의 딸에 불과했네. 서녀와 다를 것도 없지.’

그러나 즐거움도 잠시, 반전이 일어나고 말았다. 엽연채가 과거의 영광을 되찾자 엽이채는 분노와 증오심이 활활 불타올랐다. 그렇게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데 밖에서 여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안… 아, 엽씨 가문 주인마님과 아들 내외분들, 소저께서 오셨습니다.”

이야기를 나누거나 아이를 어르고 있던 친척과 손님들은 순간 멈칫하더니 의미심장한 혹은 조롱하는 듯한 웃음을 띠며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아이고, 작위를 뺏긴 엽씨 가문 사람들이 아닌가! 쯧쯧, 그 집안 가풍이… 그러하니 작위를 빼앗겼겠지.”

엽이채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자신이 엽씨 가문 소생이란 사실이 창피해 죽을 것만 같고, 당장에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런 시기에 뭣 하러 왔단 말인가?

묘씨와 손씨 등이 들어오자 방 안에 있던 친척들은 그들이 불운이라도 몰고 온 양 일제히 비켜섰다.

손씨가 엽이채 곁에 놓인 요람 쪽으로 다가가 말했다.

“오구, 우리 손자.”

“이채야, 낯빛이 이리 창백한 걸 보니 푹 쉬어야겠구나.”

나씨는 앞으로 다가서며 엽이채에게 염려의 말을 건넸다. 말할 거리를 찾고 있는 그녀는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엽이채는 헛웃음을 지었다. 낯빛이 창백한 건 다 자기들 때문이 아닌가? 다들 자신이 엽씨 가문 사람인 걸 잊고 있었는데 일가가 오자 그 사실을 떠올리고 만 것이다.

“살이 좀 오른 것 같구나.”

묘씨는 고개를 숙여 아이를 쳐다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주씨 가문 셋째 공자와 셋째 부인이 오셨습니다.”

이때, 밖에서 여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에 엽이채의 낯빛이 싹 변했다.

엽연채는 전지纏枝 문양이 들어간, 노란빛이 살짝 도는 연녹색 상의와 이와 어울리는 촘촘히 짜인 짙은 분홍색 유선군流仙裙을 입고 주운환과 함께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주위에 있던 친척들은 그 모습을 보더니 두 눈을 번쩍 떳고, 그중 하나는 ‘어이구’ 하고 탄성을 내뱉더니 앞으로 달려가 알은체를 했다.

“장원 급제자와 그 부인이 아니신가? 장원 급제자는 정말 젊구먼. 지난번에 거리 행진을 할 땐 너무 멀어서 제대로 보질 못했는데,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니 소문대로 정말 훤칠하고.”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큰 소리로 웃었고 분위기도 떠들썩해졌다.

엽이채는 친척들이 엽연채 주위로 몰려드는 모습을 보더니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손가락뼈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손을 꽉 움켜쥐었다. 오늘의 주인공은 엄연히 자신인데, 왜 저쪽에 몰려든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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