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3화
엽씨 가문.
엽학문은 화병이 나 안녕당이 아닌 서재 한편에 딸린 방에서 몸조리를 하고 있었다.
활간을 탄 엽균은 자신의 처소로 향했고, 채 마마는 여종을 데리고 가서 온씨의 짐을 정리했다. 은정랑은 영귀원을 차지하면서 온씨가 전에 사용했던 물건을 전부 옆에 있는 낙설원落雪園에 처박아 두었다. 다행히도 그때 처소를 정리했던 여종이 온씨의 사람이라 물건들을 가지런히 정리해 두었다.
그 시각, 안녕당에서 손씨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고 엽승신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형님도 이혼했는데 균이는 왜 안 떠났냐고요! 게다가 아버님은 균이가 집안의 대를 잇는 데 동의하셨다니요?”
손씨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고, 그때 급히 측간에 가느라 관아에 쫓아가지 못한 게 후회가 될 뿐이었다. 갔더라면 어디 이런 일이 생기도록 가만 놔두었겠는가.
“불만이 있거든 부윤 대인을 찾아가 말하거라.”
묘씨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봤다.
“큰아가씨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이때, 밖에서 여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시 후, 문발이 걷히더니 엽연채가 안으로 들어와 묘씨에게 예를 올렸다.
“할머니.”
“그래.”
묘씨는 다소 떨떠름한 목소리로 인사를 받고는 이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연채야, 네 어머니의 짐을 정리하러 돌아온 것이냐?”
엽연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집안의 족보와 호적도 좀 보려고 해요. 그것들도 고쳐야 하니까요.”
“그래야지. 마마, 가서 유이에게 호적을 가져오라고 하게나.”
묘씨의 분부에 전 마마는 그리하겠다고 얼른 대답한 후 유이를 부르러 갔다. 엽연채가 권의에 앉자 어린 여종이 차를 내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이가 들어왔다.
“큰아가씨.”
유이가 그녀에게 예를 올렸다.
“우리 어머니가 이혼을 하셨으니 호적을 수정해야 하지 않겠느냐?”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유이는 안색이 확 변하더니 더듬거리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다만 나리께서 현재 와병 중이시니 좀 지난 후에 고치시죠! 이미 부윤께서 이혼 판결을 내리셨잖습니까. 설마 저희가 고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겁니까?”
엽연채는 그를 쳐다보더니 언짢은 기색 없이 웃었다.
“네 말이 맞구나.”
유이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호적엔 여전히 은정랑이 정실부인으로, 온씨가 평처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감히 호적을 가져다 보여 줄 수 있겠는가? 그랬다간 분명 또 한바탕 소동이 벌어질 것이다.
엽연채가 얼마간 더 앉아 있는 사이, 채 마마가 데려간 여종들이 온씨의 짐을 다 꾸렸다.
엽연채가 정국백부로 돌아와 보니 시간은 이미 오후 신시申時(오후 3시~5시) 삼각이었다. 그녀는 신발을 집어 던진 후 나한상 위에 엎드렸고 올림머리를 풀고 머리 장신구도 빼 버렸다.
엽연채는 피곤했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있다가 이내 스르르 잠이 들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잠결에 밖에서 추길이 셋째 공자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주운환은 방금 막 아문衙門에서 돌아왔기에 아직 관복을 벗지 않은 상태였다. 그가 서차간으로 들어가 보니 나한상에 엎드려 잠을 자고 있는 엽연채의 모습이 보였다.
탐스러운 새까만 머리칼이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덮고 있었으며, 백옥처럼 맑게 빛나는 조그만 얼굴이 반쯤 드러나 있었다. 위로 말린 기다란 속눈썹이 아래 눈꺼풀을 살포시 덮었다. 깃털 같은 속눈썹이 살짝 들썩거리는데 그 모습이 대단히 귀엽고 매력적이었다.
주운환은 더는 참지 못하고 나한상에 앉더니 몸을 숙여 그녀의 백옥 같은 조그만 얼굴에 코를 살짝 문질렀다.
“으음…….”
엽연채가 작게 신음소리를 냈다. 몸을 돌리자 옷매무새가 조금 흐트러졌다. 요 며칠 날씨가 점점 더 따뜻해져 그녀는 입고 있던 분홍색 웃옷의 맨 위 단추를 풀고 있었기에, 선이 고운 아름다운 쇄골이 드러났다. 잠이 덜 깬 듯한 그녀의 얼굴은 복숭아처럼 옅은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반쯤 감긴 매력적인 눈을 통해 잠기운이 그에게 전해졌다.
“공자, 돌아왔군요.”
“네.”
주운환은 교태가 철철 흘러넘치는 그녀의 나른한 몸짓을 보더니 마음이 들떠 목소리마저 살짝 잠겨 버렸다.
“벌써 자려 합니까?”
“피곤해서요.”
엽연채는 너무 지쳐 있어 피곤하다는 한마디로만 대답했다.
“방금 전에 다리가 이렇게 눌려 있었는데 저리지 않습니까?”
주운환은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짓더니 몸을 숙여 엽연채와 눈을 맞췄고, 그녀의 눈에 살짝 어린 요염한 눈빛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침실에 가서 주무십시오.”
“그래야겠어요. 다리는 괜찮으니 걱정 말아요.”
엽연채는 ‘흐음’ 하며 몸을 돌렸다. 그는 조그만 체구가 방 안으로 들어가며 자신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보더니 손을 뻗어 그녀를 확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뭐 하는 거예요?”
엽연채는 깜짝 놀라 잠이 확 달아났지만 그의 품에 안겨 있으니 또 정신이 흐릿해지는 느낌이 들며 혼이 쏙 빠지는 것 같았다.
“다리가 저릴 테니 제가 안아서 데려다주겠습니다.”
주운환은 그리 말하며 그녀를 확 안아 올렸다.
“안 저려요!”
“저릴 겁니다.”
주운환이 고집을 부리자 엽연채는 부끄러운 나머지 화가 나 그를 밀쳤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내 침실 안으로 들어섰고 주운환은 조심스레 침상에 엽연채를 내려놓았다. 엽연채는 침상 위에 내려지자마자 바로 안쪽으로 굴러가 이불 속으로 파고든 다음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봤다.
“피곤하니 그만 가세요. 자야겠어요.”
그런데도 주운환은 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작은 머리만 내밀고 있는 그녀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할 이야기가 있어서 온 겁니다. 장찬이 엽승덕과 허서를 심문했는데 그 둘이 돈으로 매관을 매수했다는 사실만 알아냈습니다.”
그 말에 엽연채는 졸음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그녀는 코웃음을 치더니 커다란 두 눈으로 주운환을 빤히 쳐다보며 대꾸했다.
“그것들이 어떻게 매관만 매수했겠어요. 그랬다면 허서가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떠들지는 못했을 건데요. 절대 그렇게 방자하게 행동하지는 못했겠죠.
그때 그것들은 제가 신양 공주 마마께 의지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거고, 또 공자님이 장원 급제자란 사실도 의식하고 있었을 겁니다. 당연히 혼인 증서만 고치면 저희가 쉽게 밝혀낼 거라고 생각했겠죠. 그래서 그것들은 호적마저 고쳤을 겁니다. 안 그랬으면 태자 쪽에 부탁하지 않았을 거예요.”
“맞습니다.”
주운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호적을 관리하는 사람은 호부시랑 요리입니다. 특히 저희 같은 후부侯府나 공부公府 사람들의 호적은 모두 그자가 관리하고 있지요. 그런데 그 사람은 태자비의 친오라버니이자 태자의 손위 처남입니다. 그러니 장찬은 분명 더 이상 관여하고 싶지 않아 하겠지요.”
“어떡하죠. 양왕 전하께서는 요리를 밀어내고 싶으신 거잖아요?”
엽연채는 이리 물으며 검은 눈썹을 추켜세웠다.
“맞습니다.”
주운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장씨 가문 일을 언급했다.
“모레 엽이채 아들의 만월연滿月宴이 있는데, 그날 제가 가서 장찬을 설득할 예정입니다. 그러니 모레엔 게으름 피우느라 안 가면 안 됩니다.”
“안 그럴 거거든요! 한데 장찬이 그 일에 관여하도록 공자께서 설득하겠다고요? 음…….”
엽연채는 잠시 눈동자를 굴리더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하는 편이 낫겠어요! 공자께서 나서면 뭔가 의도를 갖고 접근한 것처럼 보일 거예요. 장찬이 공자와 양왕 전하 사이를 의심하게 될 수도 있고요. 그 사람은 오로지 태자에게 붙을 생각뿐이니까요.”
주운환은 반짝반짝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또… 제 공을 가로채려는 건가요?”
“네!”
엽연채의 두 눈엔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녀는 가느다란 검지를 쭉 뻗어 그의 얼굴 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제가 열심히 해 나중에 큰일을 이루면 어쩌면 안국安國 군주에 봉해질지도 모르죠!”
그녀는 그리 말하며 깔깔거리며 웃었다.
‘안국 군주?’
주운환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안국 군주는 태조 황제 시절의 인물로, 그녀는 태조 황제의 친한 벗의 아내였다. 당시 그녀는 태조 황제가 정권을 잡는 데 커다란 공을 세워 태조 황제가 천자의 자리에 오른 후 그녀를 안국 군주에 봉했다. 권세를 갖게 된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내친 뒤 시중을 드는 사내 하인들을 잔뜩 후원으로 들였고, 그때부터 인생의 절정을 맛보게 되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주운환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그러나 이 속을 알 리가 없는 엽연채는 유유자적 하품을 했다. 이에 주운환이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는데 맞은편에서 혜연이 국수 한 그릇을 들고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주운환이 떠나자 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엽연채에게 물었다.
“아가씨, 방금 전에 왜 그런 허튼소리를 하신 거예요?”
“난 허튼소리 한 적 없다.”
엽연채는 입을 삐죽거리더니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배고프니 먹을 거나 줘! 먹을 거!”
혜연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한쪽에 놓인 조그만 배나무 원탁 위에 국수 그릇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일어나세요.”
엽연채는 침상에서 내려오더니 탁자 위에 몸을 숙인 채 후루룩 소리를 내며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아기 돼지처럼 먹성 좋은 그녀의 모습을 보니 또다시 어이가 없었지만, 그러면서도 혜연은 언제나처럼 그녀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었다.
* * *
이튿날 아침, 도성에선 큰 사건이 벌어졌다. 허서가 다니는 명산서원이 앞장서서 각 서원의 학생들이 함께 공원貢院(과거 시험장)으로 가서 허서가 얻은 거인의 공명을 거둬야 한다고 항의를 한 것이다. 공원 쪽은 국자감과 상의한 뒤 허서의 공명을 거뒀고 평생 그가 과거 시험을 치지 못하게 처리했다.
자신의 공명이 거둬졌다는 걸 알게 된 허서는 창백한 얼굴로 멍하니 자신의 방에 앉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일찌감치 예상했던 바이기는 했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은정랑도 허옇게 질린 얼굴이었다.
“이제 어떡하면 좋으냐? 온씨가 정말로 엽승덕과 이혼을 했다.”
이혼하지 않았다면 엽승덕은 집에서 쫓겨나지 않았을 것이고 그가 일편단심으로 자신들을 보호하기만 하면 금방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갔을 터였다. 평판에 흠이 갔다 하더라도 적어도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었으리라. 그런데 엽승덕이 집에서 쫓겨나게 된 것이다.
“정랑… 정랑…….”
이때,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본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그러자 은정랑의 조그만 얼굴이 어두워졌다. 엽승덕은 어제 돌아온 후로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