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292화 (292/858)

제292화

엽연채는 의외의 반응에 입꼬리를 삐죽거리며 ‘이 오라버니가 이번에 또 왜 이런대?’ 하고 생각했다.

“이, 이놈……!”

엽학문은 화가 나 죽을 지경이었다.

“넌 효도도 돈을 보고 하는구나! 아주 돈에 환장했어!”

“할아버지는 돈을 밝히지 않으시나 보죠? 그럼 제게 다 주셔도 문제없잖습니까!”

엽균의 반박에 엽학문은 가슴속에 피가 맺히는 것 같은 기분이 다 들었다.

“다들 저보고 효성스럽다고 하여 저는 효심을 다했는데, 그 결과 제가 무슨 꼴이 됐습니까?”

그리 말하는 엽균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혼수품을 훔쳐 판결을 받았을 때 전 아버지를 대신해 곤장을 수십 대나 맞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리가 부러지도록 맞을 때 아버지는 한쪽에 서서 입도 뻥끗하지 않으셨죠. 제가 효심을 다했는데도 어른들은 제게 자애를 베풀지 않으셨으니, 이젠 효심을 구실로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 마세요.”

엽승덕은 그 말에 낯빛이 어두워졌다.

상좌에 앉아 있던 정 부윤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럼 이제 엽씨 가문을 떠나겠다고 결정한 것이냐?”

“가산을 주지 않으면, 떠날 것입니다.”

엽균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이에 엽학문은 목구멍에서 비릿한 단맛이 느껴지더니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다. 그가 얼굴 근육을 달달 떨며 버럭 호통을 쳤다.

“주면, 주면 될 것 아니냐!”

말을 마친 엽학문은 결국 화를 참지 못해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온씨는 엽균을 보고는 우울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리! 아버님!”

묘씨와 나씨, 유이 등은 놀라서 잇달아 비명을 질렀고, 포졸이 막는 것도 개의치 않고 얼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유이는 엽학문을 부축하며 쉬지 않고 그의 인중을 눌러 주었다.

잠시 후, 엽학문이 ‘으’ 신음소리를 내더니 정신을 차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정 부윤이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상의는 잘 한 것이냐? 이제 어찌할 셈이냐?”

묘씨는 온씨를 설득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에 이렇게 말했다.

“상의를 마쳤습니다. 큰아들과 큰며느리는 이혼하고 균이는 엽씨 가문에 남을 겁니다.”

엽학문은 분통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연히 한 푼도 주지 않고 엽균을 집에서 내쫓고 싶었지만, 그 누이동생인 엽연채가 장원 급제자의 부인 아닌가. 그러니 엽균을 밖으로 쫓아낼 수는 없었다. 엽학문은 기운이 쭉 빠졌다.

“아버지…….”

엽승덕이 엽학문에게 다가와 그를 부축하려고 했다.

“썩 꺼지거라!”

엽학문은 그의 손을 확 뿌리치며 소리쳤다.

“아직도 그 음탕한 계집과 사생아와 함께 살고 싶은 게지? 그럼 썩 꺼져서 그 계집과 함께 살거라. 이제부터 너는 우리 엽씨 가문 자손이 아니다!”

엽승덕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진작부터 통증을 참기 힘들었는데, 저를 내친다는 소리까지 들었으니 더는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버렸다.

“어르신, 후당後堂으로 가시죠.”

부윤을 보좌하는 비장裨將이 엽학문에게 걸어와 이리 말했다. 엽학문은 어두운 얼굴로 그를 따라나섰다.

무표정한 얼굴의 온씨는 엽연채와 온사월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섰고 빠른 걸음으로 관아를 나선 뒤 바로 마차에 올랐다. 엽연채가 고개를 돌려 보니 엽균은 활간을 타고 추경, 추랑과 그곳을 떠나고 있었다.

엽연채까지 마차에 오르자 마부는 채찍질을 해 그곳을 떠났다.

잠시 후 추씨 가문으로 돌아온 엽연채, 온씨, 온사월은 집 안으로 들어가 소청小廳에 앉았다.

“마님, 둘째 도련님과 사촌 공자께서 함께 돌아오셨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추씨 가문 여종이 이리 고했다.

엽연채가 고개를 드니 활간을 타고 들어오는 엽균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편, 온씨는 잔뜩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엽씨 가문을 떠나지 않겠다고 하던 엽균의 말이 떠올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

하인이 활간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어머니…….”

엽균은 창백한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

“전… 어머니께 효도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를 따라갈 수는 없어요. 그러면 어머니와 연채에게 짐이 될 겁니다.”

그 말에 온씨는 어리둥절해하더니 표정이 살짝 차갑게 변했다.

“짐이 될 게 뭐가 있느냐…….”

“큰도련님 말씀이 맞습니다.”

채 마마가 엽균의 편에 섰다.

“마님, 이혼하셨는데 이제 어디서 어떻게 지내실 겁니까?”

“내겐 아직 혼수가 좀 남아 있다.”

“그 정도 혼수면 물론 아끼고 살면 충분하겠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는 넉넉해 보이지 않을 겁니다.”

채 마마는 그리 말하며 온사월을 쳐다봤다.

“이모님과 사촌 공자님들 모두 저희 사람이니 소인도 체면 따지지 않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 마님은 이혼하셨으니 아가씨가 마련하신 집에서 지내시게 될 텐데, 아가씨의 부군께서 장래가 유망하시기는 하지만 어쨌든 서자이십니다.

설령 서자가 아니셨더라도 장모님을 모시면 분명 집안에서 말이 나올 겁니다. 그래도 마님 혼자라면 그분들도 감히 대놓고 뭐라고 이야기하지는 못할 겁니다. 다들 사정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큰도련님까지 따라가게 되면 주씨 가문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온씨는 그 말에 깜짝 놀랐고, 진씨의 성격을 떠올리자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마마 말이 맞다.”

온사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너에게 혼수가 좀 남아 있어 먹고 입을 걱정이 없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연채가 도움을 준다고 생각할 것이다. 뭐 너한테 도움을 주는 거야 상관없다만 균이까지 붙으면……. 게다가 앞으로 균이는 아내도 얻고 자식도 낳아 길러야 하는데 여기에 필요한 돈은 또 어디에서 난단 말이냐?”

그 말에 온씨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온사월의 말대로였다. 자신은 이제 이혼을 했으니 다른 사람들 눈에 엽연채가 책임져야 할 짐으로 보일 것이다.

자신 하나만으로도 이미 부담스러운 짐이니 다리도 부러지고 미래도 밝지 않은 엽균까지 데려갈 순 없었다. 그리하면 딸과 사위가 곤란해질 게 틀림없었다.

엽균은 이미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참으로 난감할 따름이었다. 모자가 오랫동안 서먹서먹하게 지냈기에 그는 어떻게 어머니를 대해야 할지 막막했다. 더욱이 온씨만 보면 전에 자신이 저질렀던 어리석은 짓들이 떠올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채 마마의 말에 동조했다. 여동생과 어머니가 저를 부양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 저를 부양해야 한다면 엽씨 가문이 해야 명분도 서고 이치에도 맞았다.

더욱이 집안에는 아직 재산도 있다. 원래부터 자신의 것이었는데 왜 그걸 남한테 내준다는 말인가? 아버지는 여전히 허서에게 넘겨줄 궁리를 하고 있을 테지만, 결국 자신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엽균은 지금 허서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보고 싶었다.

“다리는… 어떻게 되었니?”

온씨는 꽁꽁 싸매고 있는 엽균의 다리를 보더니 눈시울을 더욱 붉혔다.

“괜찮아요…….”

엽균은 고개를 숙였고 코끝이 찡해져 눈물을 떨구었다.

“앞으로 어머니께 효심을 다할 겁니다.”

“네가 잘 살면 그걸로 되었다.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하지 말고 다치지도 말거라. 네가 잘 사는 것이 이 어미에게는 가장 큰 효도다.”

온씨의 말에 엽균은 콧날이 시큰거렸다.

“사우야, 여기서 맘 편히 지내거라.”

온사월이 말했다.

“우리는 가족이지 않으냐. 좀 있으면 우리는 정성으로 돌아가야 하니 네가 여기서 지내거라. 그리하면 밖에서 지낼 곳을 찾지 않아도 되고, 또 네가 우리 집을 봐줄 수도 있잖니. 그편이 연채의 시집에서 보기에도 더 좋을 게다.”

온씨는 감동하여 온사월의 손을 잡고 그 어깨에 기대어 고마움을 표했다.

“절 이리 아껴 주는 사람은 언니뿐이에요.”

“얘는 참. 곧 손주를 안을 나이면서 내게 응석을 부리는 게냐.”

온사월이 농담조로 핀잔했다.

엽균은 눈앞에서 온정을 나누는 그들의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눈시울이 또다시 살짝 붉어졌다.

한편, 엽연채는 입을 오므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엽균이 가든 남아 있든 간에 어머니가 끝까지 입장을 고수한다면 자신은 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해 어머니를 잘 모실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 엽균이 엽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고 온씨도 동의를 했으니 그리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엽연채는 추경을 한번 쳐다보고는 밖으로 나갔다.

화원에 나가니 주변엔 파초 나무가 가득했다. 엽연채는 그곳에 서서 커다란 나뭇잎을 살짝 당기며 손장난을 했고, 밖으로 나온 추경은 그녀를 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이 다 해결됐으니 이제 한숨 돌리겠구나?”

“네!”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어 물었다.

“제 어리석은 오라버니한테 엽씨 가문에서 나오지 말라고 한 사람이 오라버니죠?”

오늘 엽균을 데려온 사람이 바로 추경과 추랑이었다.

“난 그저 균이에게 제안을 한 것뿐이다.”

추경은 재차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균이에게 네가 이모님을 따라 엽씨 가문을 떠나면 이모님과 연채에게 짐이 될 터이니 스스로 선택하라고 말했다. 공당에서 너희 할아버지께 재산을 요구한 건… 나도 균이가 그렇게 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엽연채는 입꼬리를 삐죽거리며 말을 받았다.

“어쨌든 오라버니, 정말 고마워요. 오라버니는 저희 어머니한테 정말 잘해 주세요.”

추경은 그 말에 마음이 좀 찌릿찌릿했다. 어째서 본인에게 잘해 준다는 생각은 안 하는 걸까?

“날이 어두우니 이제 돌아가 봐야겠어요.”

엽연채는 돌아서서 집 안으로 향했다. 엽균은 여전히 활간에 누워 작은 목소리로 온씨의 질문에 답하고 있었다.

“어머니, 저희는 이제 가 봐야 해요.”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엽균을 쳐다봤다.

“가요! 엽씨 가문으로 돌아가야죠. 그리고 이제 어머니는 이혼을 하셨으니 집안의 족보와 호적도 고쳐야 해요. 어머니가 남기고 오신 혼수와 옷가지 등도 있으니 오라버니와 함께 돌아가 정리할게요.”

“저도 가겠습니다!”

채 마마가 그렇게 말하며 따라나섰다. 엽연채는 작별 인사를 한 뒤 엽균, 채 마마 등과 함께 엽씨 가문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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