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0화
“대인…….”
엽승덕이 장찬을 불렀다. 그러자 장찬의 엄한 얼굴이 한층 싸늘하게 변했고, 옆에 서 있던 주부가 목청을 높였다.
“무릎을 꿇지 않고 뭣 하느냐! 한담이라도 나누려는 것이냐?”
엽승덕과 은정랑, 허서 세 사람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혼인 증서를 조작한 것이냐?”
장찬이 써늘한 목소리로 추궁했다.
엽승덕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당연했다. 그는 혼인 증서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허서가 처리했고, 그런 후에 다 됐으니 엽학문이 허락만 하면 된다고 그에게 전했을 뿐이다.
“돈으로… 매수했습니다.”
창백하게 질린 허서는 돈으로 매수했다고 실토하고 더는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은정랑은 그 말을 듣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제가 한 겁니다! 제가 했어요! 대인, 저를 벌해 주십시오! 은화 일천 냥을 써서 두 쪽에 다 뇌물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그리 말하며 앞으로 기어 나와 엽승덕과 허서의 앞을 가로막았다.
“전부 제가 한 일입니다. 흑흑…….”
“대인! 제가 한 일입니다! 면직되기 전에 제가 속한 관아와 매관이 속한 관아가 가까이 있어 그쪽과 잘 알고 지냈습니다. 돈은 제가 주었습니다!”
엽승덕은 돈을 받은 관원은 곤형棍刑을 받고 면직을 당한 뒤 조사를 받고, 돈을 준 사람은 열 대의 태형笞刑을 받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 은정랑이 자신을 대신해 나섰는데 여기서 자신이 피하려고 한다면 어디 사내라고 할 수나 있겠는가?
장찬은 입꼬리를 삐죽거렸다. 은정랑은 일부러 엽승덕 앞에서 비참한 모습을 보여 엽승덕이 나서서 그들 모자를 대신해 모든 죄를 떠안게 하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가서 매관을 불러오너라.”
장찬이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매관주사媒官主事(주사는 주부와 비슷하게 문건·장부 등의 기록을 담당하는 하급 문관임)의 이름은 유준화로, 십여 년 전에 동진사로 과거 시험에 합격한 사람이나 집안 형편이 어렵고 배경도 없어 6품 한직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유준화는 하좌에서 무릎을 꿇고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대인… 이 일은 저의 탐욕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지난달에 갑자기 누가 목돈을 주며 제게 혼인 증서를 고쳐 달라고 해서… 소관이 그만 그리해 버렸습니다.”
그의 얼굴은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는 십 년 동안 열악한 환경에서 힘들게 공부하여 가까스로 한직인 6품 소관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 그 자리마저 잃게 생겼으니 어찌 울지 않을 수 있으랴!
장찬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별로 어려울 것 없는 사소한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뭔가를 생각하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지금 이 일 자체에 대해선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조금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한마디 더 던져 봤다.
“혼인 증서만 고쳤느냐?”
허서는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얼른 대답했다.
“예. 대인 어른! 저흰 혼인 증서만 고쳤습니다. 온씨 가문은 몰락했으니 그 여인들은… 저희가 혼인 증서를 고치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들을 겁줄 수 있었습니다.”
“맞습니다!”
엽승덕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이에 장찬은 미간을 구기며 명을 내렸다.
“우선 유준화를 투옥하고 내일 조정에 나가 황제 폐하께 보고를 드릴 것이다. 이 세 사람도 투옥하거라.”
허서는 이렇게 마무리가 되자 안도의 한숨을 훅 내쉬었다. 어쨌든 이 일에 태자가 연루되지 않았으니 그것만으로도 가장 큰 고비는 넘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당시 이 일은 혼인 증서만 고친다고 성사될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온씨가 엽씨 가문으로 시집올 때 호적에 올려졌으니 호적에 적혀 있는 정실부인을 평처나 후처로 바꾸려면 호부에서 바꿔야만 했고, 이를 담당하는 사람은 바로 호부시랑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태자에게 부탁한 바가 바로 호부시랑 손에 있는 호적의 내용을 바꿔 달라는 것이었다! 호부시랑이 태자의 손위 처남인 요리였으니 이는 그리 어려운 청이 아니었다. 그런 후, 바로 돈을 써서 매관에게 혼인 증서를 고치게 함으로써 일을 성사시킨 것이었다.
* * *
이튿날, 장찬은 조회에 나아가 어제 일을 단순 뇌물 수수 사건이라고 보고했다. 이에 매관주사인 유준화는 면직되었고 곤장 서른 대를 맞은 데 반해 엽승덕은 열 대의 태형만 받았다. 대제에서는 늘 뇌물 공여자가 뇌물 수수자보다 가벼운 형벌을 받았고, 형벌 집행 후 바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사실 태형 열 대는 가볍다기도 무겁다기도 어려운 애매한 형벌이었지만, 엽승덕에겐 충분히 가혹한 형벌이었다. 엽승덕은 고통에 이를 악물고 마차에 올랐다.
엽승덕과 은정랑, 허서가 정안후부 동쪽 측문 밖에 도착하니 그곳에 서 있던 하인이 말했다.
“주인나리께서 저희 가문은 사생아를 키우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허서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평소 같았으면 이런 굴욕을 참지 않고 당장이라도 송화 골목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정안후부로 거처를 옮긴 후, 영존거에 두었던 모든 귀중품을 정안후부로 옮겨 놨으니 발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 일단 송화 골목으로 갑시다!”
그러나 엽승덕은 통증 때문에 더는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마차에 오르려는 순간, 멀리서 포졸 넷이 걸어오더니 엽승덕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쪽이 엽승덕인가? 그쪽은 공당公堂에 가야 하오!”
“지금 뭐라 했소?”
엽승덕의 낯빛이 확 어두워졌다. 이제 막 대리시에서 나왔는데 어째서 또 공당에 가야 한다는 말인가?
그런데 이들의 복장을 보니 이번에는 정 부윤 쪽에서 보낸 듯했다. 세 사람은 무슨 일인지 영문을 알지 못한 채 그저 포졸들을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
포졸 둘이 그들을 데리고 떠나자 남은 포졸 둘은 엽씨 가문 저택으로 들어갔다.
묘씨는 안녕당 서차간에서 구럭을 뜨며 나씨, 손씨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유이가 갑자기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마님, 큰일 났습니다!”
묘씨는 입꼬리를 삐죽거렸다. 이 유이라는 놈은 재수 없는 일만 고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큰일이 났다고 아뢸 때마다 정말로 늘 큰일이 일어났다.
“말해 보거라!”
묘씨가 싸늘한 목소리로 답했다.
“부윤 대인께서 보낸 포졸들이 왔습니다. 큰마님과 큰아가씨께서 저희 세자… 아니 큰나리를 고발하여 부윤께서 큰나리를 공당으로 부르셨습니다.”
“방금 뭐라고 했느냐?”
유이의 말에 엽학문은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이어 쿵쿵거리며 침실에서 걸어나왔다.
“무슨 고발을 했다는 말이냐?”
“소인도 잘 모르옵니다……. 나리께서 그쪽으로 가 보시면 알게 되시겠지요.”
유이가 머뭇거리며 답했다.
엽학문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어제 겨우 궁에서 돌아왔는데 지금 또 공당에 가야 하다니.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체면이 깎여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젠 작위도 잃고 관직도 삭탈당했으니 감히 부윤에게 밉보여서는 안 되었다. 엽학문은 하는 수 없이 옷을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했다.
그동안 묘씨와 나씨는 서로 눈을 맞추었다. 두 여인은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렴풋이 눈치챈 후였다.
묘씨가 여종을 불렀다.
“가서 영교를 불러오너라. 함께 관아에 갈 것이다.”
“예.”
여종은 돌아서서 밖으로 뛰어나갔다.
대략 이각 뒤, 엽씨 가문 사람들은 관아에 도착했다. 사건을 심리하는 정청正廳 밖은 벌써 백성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엽학문과 묘씨 등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가 보니, 정 부윤은 상좌에 앉아 있고 아래엔 네 명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바로 엽연채, 온씨, 온사월 그리고 그들과 멀찍이 떨어져 무릎을 꿇고 있는 엽승덕이었다.
은정랑과 허서는 사람들 사이에 서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걸어오던 엽학문은 은정랑 모자를 보더니 화가 나 씩씩거렸다. 분통이 터져 제대로 서 있기조차 버거웠다.
‘남의 집안이나 말아먹은 것들이! 천박한 년, 사생아 놈!’
엽씨 가문 사람들을 데리고 온 포졸은 안으로 들어서더니 공수하며 보고했다.
“부윤 대인, 엽학문을 데려왔습니다.”
“들여보내라!”
정 부윤은 이미 그를 봤으나 규정에 따라 큰 소리로 외쳤다. 엽학문은 창백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서더니 정 부윤을 향해 공수했다.
“부윤 대인.”
그는 무릎을 꿇지는 않았다. 이미 파면당하고 작위까지 거둬졌다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진사 출신이니 공당에서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되었다.
“커흠, 이름을 고하라!”
정 부윤은 규정에 따라 그에게 물었다.
“정… 엽씨 가문 엽학문입니다. 하, 참!”
엽학문은 부끄럽고 분하기 짝이 없어 콧방귀를 뀌더니 뒷짐을 지고 가 버렸다. 언제 이렇게 심문을 받아 본 적이 있었겠는가. 그런데 지금 심문을 받을 뿐만 아니라 뭇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했으니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었다.
정 부윤은 경당목을 탁탁 두드리더니 엽승덕을 쳐다보며 엄숙히 말했다.
“엽승덕은 듣거라. 네가 정실부인을 몰아내고 정실을 첩실로 끌어내렸으며, 자식들은 안중에도 없고 심지어 적자를 때려죽이려고 했다고 온씨가 너를 고발했다. 이 행위는 인륜에 어긋나며, 한 여인의 남편으로도 자식들의 아버지로도 자격이 없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엽승덕은 그저 ‘하’ 하고 냉소를 지었고 방금 전에 태형을 당했음에도 허리를 꼿꼿이 폈다. 조금도 두렵지 않고 당당하단 듯 보였다.
정 부윤은 다시 엽학문을 쳐다보며 말했다.
“엽학문은 나이가 들었음에도 언행에 신중을 기하지 않고 악한 자를 도와 잘못된 일을 저질렀으니 덕행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온씨는 고발을 했고 지금 이혼을 요구하고 있다.”
“그럼 이혼하면 되죠!”
엽승덕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밖에 있던 은정랑과 허서는 안색이 확 변했다.
‘이혼이라고? 안 된다! 절대 이혼해서는 안 된다!’
“안 돼! 안 된다!”
엽학문 역시 창백하게 질려 다급히 외쳤다.
“일이 있거든 집으로 돌아가서 잘 상의하면 되지 않느냐?”
묘씨도 이혼이라는 말을 듣고는 낯빛이 확 변하더니 얼른 온씨를 타일렀다.
“맞습니다. 형님. 집으로 돌아가서 상의해요.”
나씨도 온씨를 설득했다. 묘씨는 또 엽영교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영교야, 네가 큰새언니와 사이가 가장 좋으니 어서 네 큰새언니를 설득하거라.”
그러나 엽영교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실쭉거릴 뿐이었다.
“큰새언니가 이혼하겠다고 하는데 별수 없죠!”
“별수 없다니?”
죽을상을 한 묘씨는 엽연채의 뒤통수에 대고 이렇게 소리쳤다.
“연채야, 우리 집으로 돌아가서 이 일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자꾸나.”
그러나 엽연채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이 일은 상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이렇게 처리하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