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289화 (289/858)

제289화

잔뜩 겁을 집어먹은 엽학문의 모습을 보던 정선제는 그에게 이런 일을 벌일 배짱과 능력이 없다는 걸 확신했다. 그래서 콧방귀도 뀌지 않고 호부상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이 든 황제가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호부상서 전지신을 쳐다보자 그는 흠칫하더니 앞으로 나와 말했다.

“황제 폐하, 혼인 증서는 매관媒官의 소관인데 소신의 관리가 소홀했사옵니다.”

정선제도 상서가 매관이 맡는 사소한 일까지 일일이 다 관리하는 건 불가능함을 알고 있었다. 또 상서의 밑으로 시랑, 시중 등 직위가 낮은 벼슬아치들이 있는데 모든 일을 상서가 직접 처리해야 한다면 그렇게 많은 관원들을 두어서 무엇 하겠는가?

정선제는 미간을 문지르더니 다시 장찬에게 시선을 향했다.

“이 일은 대리시경이 조사하여 처리하거라.”

“명 받잡겠사옵니다. 폐하.”

장찬이 얼른 몸을 굽히며 대답하자 정선제의 매서운 눈빛은 다시 엽학문에게 향했다. 엽학문은 아까 그 자세 그대로 온 몸을 발발대고 있었다.

“황제 폐하, 정안후의 세자는 첩실을 총애하여 정실부인을 버리고 새장가를 들었습니다. 이런 부덕하고 파렴치한 일이 벌어졌는데도 비서소감은 막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도움을 주기까지 했습니다.

악한 자를 도와 잘못된 일을 저질렀으니 이런 부덕한 사람은 관리로서의 자격이 없사옵니다. 게다가 엽씨 가문 조상의 유풍遺風을 욕보이고 정안후의 이름도 더럽혔습니다.”

왕성촌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맹비난을 퍼부었다.

“소신은 정안후가 관리로서 자격이 없으며 정안후로서는 더더욱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옵나이다.”

“이!”

엽학문은 사색이 돼 분노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소신도 그렇게 생각하옵나이다.”

“소신의 미견迷見(어리석은 생각, 일종의 낮춤말)도 왕성촌과 같사옵나이다.”

그러나 엽학문이 반박하기도 전에 나머지 어사와 관원들도 잇따라 왕성촌의 뜻에 동의함을 표했다. 입 밖으로 꺼내기도 낯부끄러운 일이지만 관직을 박탈하고 작위를 반납해야 마땅한 일이므로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엽학문의 얼굴 근육이 쉼 없이 파르르 떨렸다.

정선제는 처진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리더니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안후가 저지른 짓은 사람들이 언급하기조차 꺼릴 만한 일이다. 하여 비서소감직에서 파면하며, 정안후 작위를 거두겠다.”

정선제가 무심히 던진 이 말은 엽학문에겐 청천벽력과 같았다. 그는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다 끝났다! 완전히 망해 버렸어……!’

선조께서 물려주신 작위를 이렇게 자신의 손으로 날려 버린 것이다. 게다가 자신은 환갑이 넘었으며 수십 년 동안 관리로 지내 온 몸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나이가 되면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덕망 높은 선비가 되는데, 자신은 그 반대로 관직을 박탈당했을 뿐만 아니라 작위마저 거둬졌다. 그것도 오래된 동료들 앞에서.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었다.

엽학문은 수치스러워 울고만 싶은 심정이었고 계속해서 몸을 달달 떨고 있었다. 이대로 혼절해 버리길 간절히 바랐지만, 하필 이럴 땐 쓰러지지도 않았다.

“조회는 이것으로 마무리하겠다!”

상좌의 정선제가 지친 목소리로 알렸다.

대전을 빠져나온 엽학문은 걸음걸이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자신이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는 멍한 모습으로 안녕당으로 걸어 들어갔다. 묘씨와 엽영교, 손씨와 나씨가 그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엽학문이 안으로 들어오자 모두 약속이나 한 듯 그를 쳐다봤다.

“아버님, 돌아오셨군요.”

손씨는 엽학문을 보더니 흥분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엽학문은 오늘 아침 일찍 불려갔고 가족들 모두 그가 장찬에게 불려갔음을 알고 있었다. 집안일 때문에 이야기를 나누러 간 게 뻔했으니 묘씨는 미간을 찌푸리며 염려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찌 되었습니까?”

“그러게요. 어찌 되었습니까?”

손씨는 앞으로 다가섰다. 손씨는 조정 일에 아는 바가 거의 없었지만, 그녀도 탄핵이라는 게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격양된 감정을 억누르며 짐짓 속상하고 괴롭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이게 다 큰아주버님 때문입니다! 아버님께선 분명 황제 폐하께 한 소리 들으셨을 거예요! 다 큰아주버님 때문이죠! 큰아주버님 같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첩실을 총애해 정실부인을 버리고 새장가를 들며 사생아를 위해 균이의 다리마저 부러뜨렸잖습니까.”

그 말에 엽학문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분통이 터져 이에서 ‘까드득’ 소리를 냈다. 자신에겐 손자가 둘뿐이었다. 엽균이 아무리 변변치 않아도 어쨌든 사지 멀쩡한, 키 크고 훤칠한 젊은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그런 손자의 다리를 무참히 부러뜨린 것이다.

허서가 먼저 단국공부 사람을 건드렸고 엽균은 허서를 구하기 위해 그 뚱보를 때렸던 건데, 그때 자신은 허서를 보호하기 위해 엽균을 내세워 모든 책임을 그가 떠안게 했다.

엽학문은 사생아를 위해 적손의 다리를 부러뜨린 일만 떠올리면 부아가 치밀어 목구멍 안에 피가 차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 피를 토해 낼 수도 삼킬 수도 없었다. 그는 답답한 마음에 낯빛이 검푸르게 변했다.

“큰아주버님 같은 분은 세자 자격이 없습니다! 세자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손씨가 안달 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리?”

묘씨와 엽영교, 나씨는 엽학문의 어두운 낯빛을 보더니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짓을 벌인 엽승덕을 옥에 처넣지 않은 것만 해도 이미 그의 체면을 세워 준 셈이었다. 그러니 세자에서 폐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손씨는 몹시도 흥분한 표정을 지었다. 엽승덕이 폐위되면 그 자리는 엽승신이 차지할 수밖에 없고, 그가 세자가 되면 가산은 자신들 내외의 손에 떨어지게 될 것이었다.

손씨는 조급한 나머지 또다시 물었다.

“아버님, 큰아주버님을 폐위해야…….”

“폐위. 폐위. 폐위! 이 어리석은 것아! 그래, 폐위됐다! 이제 만족하느냐!!”

엽학문은 얼굴 근육을 파르르 떨며 시뻘겋게 충혈된 두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쳤다. 손씨는 얼굴에 그가 튀긴 침이 잔뜩 묻었지만 원하던 소리를 들었으니 조금도 더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쓱쓱 닦더니 안타깝고 상심한 눈빛을 보이려고 애를 썼지만, 희열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아…….”

“‘아’는 무슨!”

엽학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전부 다 없어졌다! 작위도 거둬졌고 관직도 삭탈削奪(죄를 지은 자의 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벼슬아치의 명부에서 그 이름을 지움)되었다. 이제 만족하느냐!”

엽학문은 콧방귀를 뀌고는 소매를 뿌리치며 밖으로 나갔다.

“예? 작, 작위가……?”

손씨는 작위마저 거둬졌다는 소리를 듣더니 안색이 확 변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작위마저…….”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엽영교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지난번 큰오라버니가 새언니의 혼수품을 훔친 일로도 단번에 3품계나 내려갔는데, 이번 일은 중대한 일이니 관직을 삭탈하고 작위를 거두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뭘 그렇게 놀라요.”

그녀는 이리 쏘아붙이고는 들고 있던 손수건을 던지며 그 자리를 떴다.

손씨는 화가 나 죽을 지경이었다. 이 상황이 무척 불만족스러웠지만, 생각해 보니 작위는 거둬졌지만 어쨌든 가산과 토지 같은 것들은 아직 남아 있었다.

현재 엽승덕 일가는 끝났다고 봐도 무방하고 엽균은 다리가 부러졌으니 후계자가 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엽승강 일가는 여러 해가 지나도록 아들 하나 낳지 못했다. 그러니 가산과 토지는 자연히 자신들 내외의 것이 될 것이었다.

묘씨는 관직을 삭탈당했다는 소리에 그만 탑상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묘기화 사건이 벌어진 후 이제 겨우 한 달이 지났는데 집안에서 또 엽승덕이 추접한 일을 벌였고, 그 결과 이젠 작위마저 거둬졌다.

그럼 딸의 혼담은 어떻게 꺼낸단 말인가? 어떻게 딸에게 훌륭한 사내를 소개해 줄 수 있겠는가? 묘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주인마님.”

이때, 여종 한 명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대리시에서 사람을 보냈습니다. 세자야와 은씨, 허서를 체포하겠다고 합니다.”

묘씨는 고개를 들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체포한다고? 전 마마, 자네가 사람을 데려가 그것들을 붙잡게.”

“예, 마님.”

전 마마는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 * *

그 시각, 영귀원. 엽승덕과 은정랑, 허서는 영귀원 안에 갇혀 있었다. 그날 엽학문이 와서 그들을 두들겨 패 세 사람의 몸엔 상처가 남아 있었다.

은정랑도 호되게 뺨을 얻어맞은 데다가 약도 구하지 못해 아직도 얼굴에서 후끈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물론 그녀보다는 세게 걷어차인 엽승덕의 상처가 훨씬 심했다.

“나리, 물 드실래요?”

은정랑이 물을 들고 들어와 염려하는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정랑…….”

엽승덕은 세자 자리를 분명 빼앗길 거라는 생각에 낙담하고 있었는데, 은정랑이 아직도 이렇게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여 주자 감동해 마지않았다.

허서는 멍한 얼굴로 한쪽에 앉아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이때, 누군가가 ‘쾅’ 소리를 내며 대문을 난폭하게 걷어찼다. 이어 문이 확 열리며 대리시 관복을 입은 열 명이 넘는 포졸들이 안으로 달려들었다.

“뭐 하는 것이오?”

엽승덕은 칼을 찬 사람들이 서슬 푸른 모습으로 달려들자 깜짝 놀라 얼른 은정랑을 뒤로 보내 그녀를 보호했다.

“우린 대리시에서 나왔소. 데려가거라!”

“뭐라!”

우두머리 포졸이 외치자 엽승덕은 낯빛이 새파랗게 변했다.

“아버지, 어머니. 가시죠.”

허서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그는 속으로 상황파악을 못 하는 엽승덕을 깔보고 있었다. 자신들이 혼인 증서를 고친 일은 상부로 보고되어 황제의 귀로 들어갔고, 이는 관원의 직권 남용과도 관계되어 있으니 이미 평범한 집안일이 아니었다.

그 어떤 황제도 자신의 관원이 뒤에서 부정한 짓을 저지르는 걸 곱게 볼 리 없었다. 못 봤으면 몰라도 봤으면 그냥 놔둘 리가 없잖은가.

엽승덕과 은정랑, 허서는 포졸을 따라 그곳을 떠났고 허서는 가는 내내 대책을 궁리했다. 저를 도와 이 일을 처리해 준 사람은 바로 태자였다.

하지만 절대로 태자를 물고 늘어질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목숨마저 부지할 수 없을 것이었다. 설령 별 탈 없이 풀려나더라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건 태자의 끝없는 복수일 것이다.

잠시 후, 그들은 대리시 안으로 들어갔다. 대리시는 보통의 관아보다 상급 기관이었지만 환경은 훨씬 열악했다. 들어가 보니 내부는 어두컴컴하고 관복을 입은 장찬이 옻칠을 한 커다란 배나무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양쪽으론 주부主薄(장부·문건 등을 기록하는 하급 문관)가 서 있었고 포졸들도 여럿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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