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288화 (288/858)

제288화

“그런 일이 벌어졌다니!”

온사월은 창백한 얼굴로 다가서더니 온씨의 손을 잡고 눈시울을 붉혔다.

“어쩜 이리 공교로울 수가 있니. 하필 우리가 일 때문에 나간 사이에 너한테 그런 일이 벌어졌구나.”

“다 지나간 일이에요.”

이리 답하는 온씨의 눈에도 눈물이 어리었다.

“언니, 이제 엽승덕과 그 첩실 무리가 벌인 일이 사람들에게 다 폭로되었어요.”

“어머니, 이건 좋은 일이에요. 이제 더 이상 막내이모님이 그자들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으셔도 되잖아요.”

추경은 온사월을 다독이고는 온씨에게 온화한 눈빛을 보냈다.

“이모님, 축하드려요.”

온씨는 순간 멍해졌고 온사월은 말문이 막혔다. 한량없이 슬픈 마음이었는데 축하한다는 그의 한마디에 그 일이 마치 기쁜 일처럼 느껴졌다.

“맞아요. 축하해요, 어머니.”

엽연채가 작게 소리 내어 웃으며 추경을 쳐다봤다.

“오라버니가 말을 참 잘하신다니까요.”

추경은 시선을 사로잡는 그녀의 곱고 아리따운 얼굴을 보더니 온화한 눈빛을 살짝 반짝였다.

“축하할 걸로 치면 연채가 가장 축하받아야지. 네 부군이 장원 급제를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온사월이 화제를 돌리면서 얼굴에 희색을 비쳤다.

“내가 말했지. 우리 연채가 복이 있는 아이라고 말이야. 사우야, 앞으로 걱정 안 해도 되겠구나.”

추경은 주운환이 전시에 급제했다는 이야기를 듣자 의기소침하면서도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였다.

온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기분이에요. 전에는 늘 연채가 남들보다 밀렸다는 생각에 걱정했고 균이도 걱정했는데……. 이제 연채는 고난을 헤쳐 나왔고 균이는… 다리가 부러지긴 했지만 회복됐으니까요.”

“그래, 그 재미난 구경거리를 놓친 게 안타까울 뿐이다! 듣자하니 허대실이 피우는 난동이 아주 볼 만했다고 하던데!”

온사월이 들뜬 목소리를 내자 엽연채가 냉큼 말을 받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지금도 여전히 매일같이 정안후부 대문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어요. 오늘 저희 할아버지가 도성으로 돌아오셨으니 내일 이 사건이 심판대에 설 거예요. 그러니 내일 아침에 보러 가셔도 될 겁니다.”

추경의 두 눈에 웃음기가 돌더니 그가 이렇게 물었다.

“이 모든 일을 연채 네가 계획한 거니?”

“그럼요! 물론 허 장군님과 허대실이 협조해 줬어야 하지만요.”

엽연채는 호호 웃으며 온씨의 팔짱을 꼈다.

“이건 제가 어머니께 드리는 선물이에요.”

“너도 참.”

온씨는 그녀의 이마를 톡 친 다음, 온사월에게 시선을 돌렸다.

“언니, 먼 길 오가느라 고생했으니 어서 방으로 돌아가서 씻고 옷도 갈아입어요.”

그녀는 그리 말하며 온사월과 엽연채를 끌고 방으로 갔다.

* * *

엽학문은 각혈한 뒤 하룻밤을 내리 잤다. 이튿날 사시巳時(오전 9시~11시)쯤이 되어서야, 그것도 누군가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나리, 나리. 대리시경 장 대인께서 오셨습니다.”

묘씨였다. 엽학문은 눈을 뜨더니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장찬? 그 늙은이가 아침부터 찾아온 걸 보니 내 꼴을 비웃으러 온 거겠지? 돌려보내시오! 내가 병이 나서 손님을 맞을 수가 없다고 하시오!”

그리 말하고 있는데 주렴이 ‘촤락’ 소리를 내며 걷히더니 붉은색 사람 형체가 안으로 들어왔다. 장찬이었다. 그런데 그는 관복을 입고 관모도 단정히 쓰고 있었다.

“자네…….”

엽학문은 표정이 어두워졌으나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버둥거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억지웃음을 지었다.

“장 형, 이렇게 일찍 무슨 일이오? 조회에 참석해 있을 시간 아니오?”

그러자 장찬이 미간을 찌푸리며 운을 뗐다.

“엽 형, 내가 찾아온 건… 그대를 체포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함이오.”

“뭐라고 했소? 나를 체포한다고 했소?”

엽학문은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지 잔뜩 굳은 얼굴로 반문했다.

“사돈…….”

묘씨도 깜짝 놀라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장찬을 쳐다봤다. 이에 장찬이 희끗희끗한 눈썹을 추켜세우며 경위를 말했다.

“지금 엽씨 가문에 일어난 그 일 때문이오. 그 허대실이라는 자가 또 밖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소!”

“그 일은 우리가 알아서 잘 처리할 거요.”

엽학문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이 일은 집안일이니 일반적으로 백성이 고발하지 않으면 관아에서도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니 온씨와 이야기만 잘하면 더 큰 문제가 생길 일도 없었다.

“이 일은 이미 상부에 보고되어 황제 폐하께서도 아셨네!”

이리 알려 준 장찬은 좀 어이가 없었다.

“얼마 전에, 그러니까 자네의 그 며느리가 집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내가 말하지 않았소? 어사들이 한림원의 주운환을 탄핵하기 위해 상소문을 한가득 준비해 놨다고 말이오.”

엽학문은 그 말을 듣다가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다.

주운환이 온씨와 엽연채를 데려갔을 때, 자신은 상황파악 못하는 주운환을 원망하며 그에게 노여워했다. 그 후 장찬에게 어사들이 주운환을 탄핵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이에 속이 시원해지며 기대를 품게 되었다.

때가 되어 주운환이 불효로 탄핵을 당하면 분명 당시 행동을 후회할 것이고, 그러면 온씨를 돌려보내 은정랑에게 차를 올리게 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 후엔 알아서 허서와 잘 지낼 것이고 얼마 뒤 허서가 관직에 오르면 서로 잘 돕고 보살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래서 속으로 ‘탄핵해라. 제대로 탄핵해라!’ 하고 바라고 있었다. 그 결과, 탄핵은 제대로 됐는데 그 탄핵의 대상이 자신일 줄이야!

“어서 갑시다! 황제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시오.”

장찬의 재촉에 엽학문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고, 묘씨와 여종의 도움을 받아 조복朝服으로 갈아입은 후 장찬과 함께 문을 나섰다.

두 사람이 함께 밖으로 나가는데 장찬이 엄숙한 표정으로 엽학문에게 말했다.

“엽 형, 잠시 후에 대전에 도착하면 무슨 일이든 간에 전부 사실대로 고해야 하네.”

그 말에 엽학문은 미간을 찌푸리며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이 늙은이의 지시에 따르기라도 해야 한다는 말인가.

두 사람은 문밖을 나선 후 관교官轎에 올랐고 잠시 후 가마는 궁 안으로 들어갔다. 엽학문과 장찬이 용 문양이 새겨진 기다란 백옥 계단을 걸어 대전 안으로 들어가 보니 문무백관이 두 줄로 나눠 서 있었다. 고개를 드니 나이 든 황제가 바른 자세로 책상에 앉아 있었다.

엽학문은 이미 반년 이상 대전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그런데 승진 때문이 아니라 이런 일로 다시 대전에 오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엽학문은 속이 쓰렸으나 어쨌든 안으로 걸어 들어가 정선제에게 큰절을 올렸다.

“소신 엽학문,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정선제는 축 처진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엽학문을 쳐다봤다.

“정안후부라……. 그래, 현재 무슨 관직에 있는고?”

그 말에 엽학문의 입꼬리가 떨렸다. 자신의 관직이 너무 보잘것없어 황제조차도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황제 폐하, 소신은 현재 종5품 비서소감직을 맡고 있사옵니다.”

엽학문이 낭랑한 목소리로 답하자 정선제는 희끗희끗한 눈썹을 추켜세웠다. 이제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비서소감은 원래 정4품의 관직인데 엽학문이 작년에 아들이 정실부인의 혼수를 훔치는 걸 내버려 두었다는 이유로 어사들에게 탄핵을 당했고, 이에 자신이 그의 직위를 한 번에 3품이나 강등시켰다. 그런데 직위를 바꾸는 것이 귀찮아 두었더니 정4품 비서소감이 갑자기 종5품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엽학문이 나타나자 잠잠하던 어사들이 잇따라 튀어나왔고, 개중 제일 먼저 나선 사람은 바로 왕성촌이었다.

“황제 폐하, 소신이 비서소감을 탄핵하고자 합니다. 비서소감은 아들이 아내와 자식을 버린 뒤 새장가를 드는데도 지켜만 보았습니다.”

“억울하옵니다.”

엽학문의 낯빛이 대번에 하얗게 질렸다.

“이 일은… 소신이, 소신이…….”

“변명 늘어놓지 마시오!”

이때, 누군가 엽학문의 말허리를 끊으며 비웃었다. 냉소의 주인은 바로 양왕이었다.

“그해에 은씨와 엽승덕이 혼인을 했는지 여부를 그대가 몰랐단 말이오? 온씨를 정실로 들였는지 첩실로 들였는지 그대가 몰랐단 말이오?”

그 말에 엽학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절대로 이런 죄명을 뒤집어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둔하다 하더라도 오늘 일이 그리 쉽게 해결되진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혼인 증서 조작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곤 하나 혼인 증서는 이미 수정되었으니 진짜가 된 셈이었다. 아들이 아내와 헤어지고 새장가를 든 게 아니라고 딱 잡아떼면 허서가 누구의 씨이든 상관없이 은정랑과 엽승덕의 혼인 증서는 진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허서는 허대실의 씨로 밝혀졌으니 정안후부 또한 은정랑의 거짓말에 속은 피해자라고 하면 되었다. 그리하면 이 죄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생각한 엽학문이 고개를 돌려 보니 장찬이 두 눈을 부라리며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 엽학문이 입술을 오므리며 옥좌를 살피니 황제는 나이가 들긴 했지만 여전히 총명해 보였다. 결국 배짱이 없는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고할 수밖에 없었다.

“소… 소신이 저지른 죄를 알고 있사옵나이다.”

“음, 난 그대가 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줄 알았소!”

양왕이 ‘허’ 소리를 내며 말을 이어갔다.

“그대들이 혼인 증서를 조작했고 온씨 가문과 그대 가문이 작성한 혼인 증서도 조작해 가짜가 진짜가 되어 버렸소. 그러나 그대들은 허대실이 죽었다고 생각했고 허씨 가문 사람들도 모두 죽었기에 허씨 가문이 갖고 있던 혼인 증서는 잊었던 게지. 그쪽엔 은정랑은 처녀였으며 초혼이라고 분명히 적혀 있었소.”

그 말에 엽학문은 몸을 덜덜 떨었고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만약 자신이 방금 은정랑과 엽승덕은 제대로 맺어진 부부이며 온씨는 첩실이자 평처라고 딱 잡아뗐는데 양왕이 이 증거를 내밀었다면? 그랬다면 자신은 군주를 기만한 죄를 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럼 진노한 황제가 집안의 재산을 몰수하고 일족을 멸했을지도 몰랐다. 설령 일족을 멸하지는 않더라도 집안의 재산은 전부 몰수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정선제는 눈을 살짝 깜빡이며 목을 앞으로 쭉 빼고는 바닥에 엎드려 벌벌 떨고 있는 엽학문을 쳐다봤다. 그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더니, 연로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정안후, 어떻게 이런 일을 벌인 것이냐? 혼인 증서를 조작하다니.”

“이 일은 소신도 정말 모르는 일이옵니다!”

엽학문은 깜짝 놀라 낯빛이 더욱 백지장처럼 하얘졌고 계속해서 몸을 덜덜 떨었다.

“이건 제 불효막심한 아들놈이 벌인 일이옵니다. 당시 소신은 허서가 소신의 손자인 줄 알았습니다. 또 그 아이는 공명도 얻었으니 서자가 되는 건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어 아들과 그 모자가 계획한 일에 동의한 겁니다. 이 일은 전부 아들놈과 그 모자가 계획한 것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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