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7화
엽학문은 엽승덕을 나무란 뒤 허서를 향해 돌아섰다. 그러자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큰 희망을 걸고 있는 귀한 손자가 해쓱해진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두 볼은 살짝 패어 있고 서생들이 입는 회백색 도포도 볼품없게 변해 있었다.
엽학문은 가슴이 아파 두 손으로 허서의 앙상한 어깨를 두드리며 그를 위로했다.
“적자든 서자든 상관없다. 이 할아비는 널 탓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 서야, 걱정 말거라. 이 할아비가 널 보호해 줄 것이다! 어찌 됐든 간에 넌 이 할아비가 가장 아끼고 가장 소중히 여기는 손자란다.”
그 말에 허서는 온몸이 딱딱하게 경직됐다. 순간 엽학문에게 어떤 표정을 지어 보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후야.”
이때, 유이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 허대실인가 뭔가 하는 자가 또 와서 소란을 피우고 있습니다.”
은정랑 모자와 엽승덕은 그 말을 듣고는 깜짝 놀라 낯빛이 확 변했고 몸을 덜덜 떨었다.
“아버지, 나가지 마세요…….”
“어째서 안 나가느냐? 내가 나가서 저자를 어떻게 쫓아내는지 지켜나 보거라.”
엽승덕이 말렸으나 엽학문은 어두운 표정을 지은 채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는 유이를 비롯해 무려 열 명이 넘는 하인들을 불렀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대문으로 걸어갔다. 곧이어 대문이 덜커덩 소리를 내며 열리고 커다란 몽둥이를 든 하인들이 바깥으로 나섰다.
엽학문이 내다보니 대문 앞엔 백성들이 우글우글 몰려 있었고 한 사내가 땅바닥에 앉아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문 열어라. 왜 나와서 나한테 분명히 말하지 않는 것이냐! 어!”
“누가 소란을 피우는 게냐?”
염소수염을 기른 백발의 노인이 위엄 있는 얼굴로 걸어 나오자 허대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접니다!”
“아, 너였……!”
엽학문은 호통을 쳐서 허대실을 내쫓으려고 했는데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본 순간 그대로 넋이 나가 버렸다. 엽학문의 표정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 버렸고 얼굴 근육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허대실의 얼굴은 허서와 판에 박은 듯했다! 단지 이쪽이 좀 더 나이 들어 보이는 것뿐이었다.
이러니 허대실과 허서가 관계가 없다는 말을 믿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 얼굴이 떡하니 있으니 아무리 부인하고 싶어도 불가능했다.
그러니, 사실은 자신이 귀한 손자라 여겼던 이가 손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실은 허대실의 씨였던 것이다. 은정랑과 허대실 사이에서 태어난 놈이니 자신과는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놈이 엽씨 가문에, 심지어 적자로 입적된 것이다.
입적은 그렇다 치더라도 사생아 놈이 거들먹거리며 자신의 적손嫡孫을 업신여겼고 일부러 적손의 거처까지 빼앗았으며 다리마저 부러뜨리게 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엽학문은 울걱 피를 토하더니 그대로 뒤로 넘어가 버렸다.
“으악! 후야!”
유이를 포함한 하인들은 얼굴빛이 하얗게 질리더니 얼른 쓰러지는 그를 받쳤다. 엽학문은 화가 나서 까무러칠 지경이었지만 겨우 기절은 면했다. 그는 유이를 밀치며 허리를 꼿꼿이 펴더니 비틀거리며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가는 내내 그는 다리에서 바람이라도 일듯이 부랴부랴 걸어갔고 마침내 영귀원으로 돌아왔다. 그는 찬 서리가 내린 듯한 싸늘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가더니 허서의 뺨을 냅다 후려갈겼다. 뺨을 맞은 허서는 몸이 뒤로 젖혀져 돌아갔다.
“이 천벌받을 놈! 이 사생아 놈아! 내 오늘 이 의붓자식을 때려죽일 것이다!”
그는 그리 말하며 허서에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가했다.
“감히 우리 엽씨 가문 핏줄인 척하다니!”
“서야… 서야……!”
은정랑이 얼른 앞으로 뛰어나와 허서를 자신의 품 안에 감싸 안았다. 그러나 엽학문은 미칠 듯이 화가 난 상태였다. 이런 때에 어디 여인이라고 봐주겠는가? 그는 손을 들더니 짝짝 소리가 나도록 은정랑의 뺨을 열 대가 넘게 후려쳤다.
“이 천박한 년! 감히 우리를 기만하다니……!”
“흑, 흐윽……. 승덕, 승덕 나리…….”
은정랑은 눈물을 흘리며 엽승덕을 불렀다. 그녀는 머리가 산발이 되고 조그만 얼굴도 퉁퉁 부어올랐다. 그런 모습으로 애절하게 남편을 찾으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애처롭고 가련해 보였다.
엽승덕은 허대실과 그녀가 객줏집에서 벌인 일 때문에 마음속에 응어리가 맺혀 있었다. 그러나 그 오랜 세월을 보호했고 또 사랑했던 여인이 이런 수난을 겪고 있는 모습을 어찌 보고 넘길 수가 있겠는가? 그는 얼른 앞으로 달려가 엽학문을 밀치며 차가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버지, 정랑과 서는 이 일과 관계가 없습니다. 다 제가 생각해 낸 것이에요. 정랑도 적자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러자고 한 거예요! 다 제 생각입니다. 전 정랑에게 가장 좋은 걸 주고 싶었어요. 정랑이 떳떳하게 우리 가문으로 시집와 정실…….”
‘퍽’ 하고 큰 소리가 들렸다. 엽학문이 엽승덕을 냅다 걷어차 버린 것이다. 엽승덕은 바닥에 나뒹굴며 자신의 배를 감쌌다. 그는 고통에 이를 악물고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이 후레자식! 불효막심한 놈! 적자는 안 된다고? 그럼 서자는 된다는 말이냐? 사생아 놈이! 의붓자식이! 우리 엽씨 가문으로 들어올 생각까지 했다니!”
소리를 왁왁 지르던 엽학문은 갑자기 두 눈이 뒤집히더니 그대로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후야!”
유이와 다른 하인들이 얼른 쓰러지는 그를 받았다. 엽학문은 이번에는 정말로 졸도해 버렸고, 유이 등은 얼른 그를 들어 올려 안녕당으로 향했다.
“승덕 나리! 나리!”
은정랑은 얼른 엽승덕에게 달려가 그를 부축해 일으키며 흑흑 눈물을 흘렸다.
“다 저 때문이에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전 나리 인생에 나타나면 안 되는 거였어요! 나리를 사랑하는 건 더더욱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어요.”
엽승덕은 그녀가 허대실과 객줏집에서 했던 일을 알게 된 후로 지금까지 그 일을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은정랑이 정말 그랬다고 실토하면 그동안 자신이 해 온 사랑은 뭐가 된단 말인가?
그렇게 요 며칠 동안 꾹 참아 왔던 참인데 매까지 맞으니 엽승덕은 결국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다.
“정랑,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나라고 하지 않았소? 그런데 왜 그날 허대실과 객줏집에서……!”
그 말에 은정랑은 낯빛이 확 변했다.
“아니에요! 그런 일은 없었어요! 정말로 없었단 말이에요! 다 그 사람들이 함부로 꾸며 낸 거예요. 제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나리예요. 그런데 어떻게…….”
“하지만 그날 내가 마침 옆방에 있었소! 당신 목소리를 들었단 말이오!!”
엽승덕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노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은정랑의 조그만 얼굴이 굳어지더니 그녀는 조금 전보다 더 펑펑 눈물을 쏟았다.
“나리는 어떻게 그곳에 가신 거예요? 어떻게 때마침 그런 지저분한 소리를 들으신 거예요? 딱 봐도 누군가가 짜 놓은 판에 걸려드신 거잖아요. 저희를 이간질하려는 수작에 불과하잖아요…….”
엽승덕은 그 말을 듣더니 과연 어딘가 수상쩍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녀의 처량한 모습과 산발이 된 머리칼, 조그맣고 갸름한 얼굴이 얻어맞아 퉁퉁 부어 있는 모습을 보니 씁쓸하고 괴로운 마음이 확 들었다.
“정랑, 미안하오. 내가 당신을 오해했소.”
그러자 은정랑은 더욱 처량맞고 비참하게 눈물을 흘렸다.
“승덕 나리, 저에겐 나리뿐이에요. 나리 없인 더 이상 이 세상을 살아갈 용기가 나지 않아요.”
엽승덕은 지극히 감동하고 말았다. 자신은 그녀의 유일한 버팀목이자, 그녀의 마음속에선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며 말했다.
“정랑. 앞으로 어찌 되든 간에 우리 세 식구는 영원히 함께할 것이오.”
“흑……. 그럼요!”
은정랑은 그의 말에 얼른 동조했으나 마음속으로는 딴 궁리를 하고 있었다.
* * *
한편, 엽학문이 안녕당으로 들려 가자 묘씨와 엽영교 등은 깜짝 놀랐고 엽승강은 아주 안달이 나서 아버지를 부르며 그를 쫓아갔다. 손씨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혀를 찼다.
“아이고, 이제야 제대로 보셨나 보네요? 쯧쯧, 아직도 우리 엽씨 가문 핏줄이던가요?”
“가자, 들어가서 보자꾸나.”
묘씨는 그리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엽영교와 함께 침실을 향해 걸어갔다.
침실 안, 엽학문은 침상에 누워 있고 엽승강은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아버지, 아버지!”
그러면서 엽학문의 인중을 누르자 그가 작게 신음하더니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깨자마자 허서의 일이 다시 떠오르자 그는 화가 나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 사생아 놈! 불효자 자식……!”
“아버지, 일단 진정 좀 하세요! 당분간은 우선 집 밖으로 나가지 마세요. 그 허대실이라는 사람은 허 대장군이 뒤를 봐주고 있으니까요. 또 마주쳤다간 저희 가문은 더더욱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
도성 전체가 저희를 비웃었어요. 눈뜬장님이라 창부를 집안으로 들였다고 말이죠. 다리로 사내를 툭툭 건드려 유혹하고, 혼인 직전에는 허대실과 객줏집에서 신음소리를 내며 잠자리까지 가졌다고 합니다.”
엽학문은 엽승강의 말을 들으며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오늘 집으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첨향이 다리로 저를 희롱하며 이것이 요즘 가장 유행하는 놀이법이라고 하던 게 떠올랐다. 도성에서 시작된 놀이인데 어느새 도성 밖 작은 마을까지 퍼졌다고 했다.
그때 자신은 ‘어느 집안이 이렇게 재수가 옴 붙었을꼬!’ 하며 비웃음을 날렸고 남의 불행에 즐거워하며 그 신선한 놀이법을 즐겼다. 그런데 그게 자신의 가문일 줄이야!
이 추잡한 일은 도성 전체를 휩쓸었고 도성 밖으로까지 퍼지고 말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엽학문은 화를 못 이기고 울컥 피를 토하더니 다시 한번 까무러치고 말았다.
* * *
그 시각, 추씨 가문의 저택.
“후야께서는 화를 못 이기고 두 번이나 각혈을 하셨습니다.”
그 말에 엽연채는 매서운 눈빛을 번득였다.
“그래도 싸지!”
“그런데… 영귀원 쪽 여종의 말에 따르면 세자야와 은정랑은 여전히 애정이 깊다고 합니다.”
엽연채는 ‘하’ 헛웃음을 쳤다.
“애정이 깊다고? 그건 배가 불러서 그런 거다. 입을 걱정, 먹을 걱정을 안 해서 그런 게지. 그것들이 모든 걸 다 잃은 후에도 얼마나 애정이 깊은지 한번 보자꾸나!”
게다가 은정랑과 허대실이 객줏집에서 벌였던 일은 푹 박혀 버린 바늘과도 같았다. 지금은 그저 순간적으로 끓어오른 감정 때문에 따지고 들지 않았을 뿐이다. 이후에 엽승덕이 다시 생각해 보면 그건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엄청난 일이라고 느낄 것이다.
그 여종은 엽연채에게 전갈을 마저 전한 후 그곳을 떠났다.
“아가씨, 이모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밖에 있던 추길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오, 큰이모께서 돌아오셨구나.”
엽연채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하러 나갔다. 문 입구를 나서다 역시 방에서 나오던 온씨와 마주쳤고 모녀는 함께 밖으로 향했다.
엽연채와 온씨가 대청에서 나와 보니 온사월과 추경, 추랑이 허겁지겁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