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6화
“아이고, 형님.”
이때,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이어 손씨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형님, 그거 아세요? 밖에서 형님과 아주버님, 허대실의 이야기로 화본을 만들려고 한대요. 세 사람의 일을 무대 위로 올릴 거고 다음 달에 공연이 시작될 거라고 했어요. 정말 대단하시네요, 형님! 남정네들을 제대로 홀려 하나같이 형님에게 죽기 살기로 매달리잖아요!”
손씨는 그녀를 비꼬는 말을 한바탕 퍼부은 후에야 그곳을 떠났다.
영귀원은 원래 은정랑을 가장 우쭐하게 만들어 줬던 곳이었다. 그녀는 온씨를 정실 자리에서 밀어내고 영귀원을 차지했으며 말끝마다 자신이야말로 정실부인이라고 이야기했다.
또 묘씨와 엽영교를 비롯한 사람들 앞에서도 한없이 거들먹거렸다. 그런데 결국 모든 일이 폭로된 것이다.
이제 이 영귀원은 온 군데에 가시라도 돋은 양 은정랑의 얼굴을 쿡쿡 찌르며 체면을 깎았다. 은정랑은 차라리 감옥살이를 할지언정 이곳에는 조금도 더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매일 여종들에게 멸시 어린 눈빛을 받고 손씨에게 조롱과 모욕을 당하니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한편, 엽승덕은 밖에서 들려온 소식에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정랑이 허대실과 그런 짓을 했다니, 그것도 자신들의 혼례식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말이다.
‘아니다, 사실일 리가 없다! 절대로 사실일 리 없다! 어떻게 사실일 수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은 그 객줏집에 갔었고 심지어 옆방에서 들려오는 은정랑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그러나 그땐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았고 그저 목소리가 비슷한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이런 이야기가 들릴 줄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니 그때 그 사람이 정말로 은정랑이었던 것이다. 엽승덕은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흐려졌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정말로 허대실과 떠나려고 했다. 그때 은정랑은 허대실을 허 장군으로 오해해 기꺼이 그와 함께하려고 움직였다. 그래서 그날 밤 허대실과 떠났으나 그가 장군이 아니라 마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자신에게 다시 돌아왔던 것이다.
* * *
이른 아침, 햇살이 도성 전체를 비추자 아늑하고 평온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도성에서 십 리 이상 떨어진 교외에서는 화려하고 진귀해 보이는 마차 한 대가 덜덜 소리를 내며 대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엽학문은 부드러운 베개에 기대어 있었고 첨향이 그의 맞은편에 앉아 그의 다리를 감싸 쥐고 살살 두드려 주고 있었다. 엽학문은 첨향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더니 ‘허’ 소리를 냈다.
“어느 집안이 그렇게 재수가 옴 붙었을꼬! 그런데 그 놀이법이 정말 신선하긴 하구나!”
그는 하하호호 웃으며 첨향과 그 집안을 비웃었다.
반 시진 후, 마차는 마침내 성문으로 들어섰고 이각을 더 달려 정안후부의 수화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러자 하인 몇 명이 얼른 다가와 엽학문의 짐을 들어 주며 등받이가 없는 네모난 걸상을 놓아주었다.
엽학문이 첨향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리자 그중 한 하인이 몹시 어두운 낯빛으로 고했다.
“후야… 집안에 일이 생겼습니다.”
“무슨 일?”
엽학문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또 큰애가 친정집에 찾아와서 소란을 피운 것이냐? 엉? 별일 없으면 오지 말라고 이미 말했을 텐데.”
그는 언짢아하며 안녕당을 향해 걸어갔다. 가는 내내 첨향과 하인들이 그를 빼곡히 둘러쌌고, 처음 말문을 연 하인이 그 사이에 껴 새파란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큰아가씨께서 오셔서 소란을 피운 거면 그나마 낫습니다. 그… 그런데 큰아가씨께서는 오지 않으셨고 큰마님조차도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큰마님이라니. 이미 말했을 텐데. 이제 온씨는 평처이며 작은마님이다. 그러니 큰마님은 은씨이고 서가 적장자다. 알겠느냐?”
엽학문이 콧방귀를 뀌자 주위에 있던 하인들은 모두 말문이 막혀 입만 삐죽거렸다. 엽학문에게 소식을 전하던 그 하인만이 겨우 입을 뗐다.
“으… 알겠습니다. 큰마님께 일이 생겼습니다. 전남편이 마님을 찾아왔어요.”
“뭐라? 전남편이 찾아왔다고? 귀신이라도 나타났다는 말이냐?”
엽학문은 깜짝 놀라며 도사를 찾았다.
“도사는 불러왔느냐?”
“후야, 그런 게 아닙니다. 마님의 전남편이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매일 대문 밖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어요. 더 큰 문제는 얼마 전에 전공을 세운 허 대장군이 그자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겁니다. 저희가 감히 쫓아낼 수가 없어 온 도성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엽학문은 미간을 심하게 찌푸리며 성을 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그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니.”
하인들은 어이가 없었다. 후야는 아직도 큰아들 쪽을 도우려고 한단 말인가?
소식을 알리던 그 하인이 또다시 운을 뗐다.
“그 허대실이라는 사람이 큰도련님은 자기 아들이지 후부의 적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또 기루에 가서 자기가 고자가 아님을 온 도성 사람들에게 증명했고요. 그뿐만 아니라 큰마님께 자신을 데리고… 그렇고 그렇게 논 여인이라고 했습니다. 얼음처럼 맑고 옥처럼 깨끗한 지조는 다 사기라고 했습니다.”
그 말에 엽학문은 낯빛이 새파랗게 변하더니 다리에서 바람이 일 정도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의 뒤를 따라가는 첨향은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엽학문은 부랴부랴 안녕당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엽영교, 둘째 내외와 셋째 내외는 방금 막 묘씨에게 문안 인사를 드린 후 하좌에 앉아 상의하는 중이었는데, 전 마마가 밖에서 소리를 쳤다.
“후야께서 돌아오셨습니다!”
행복과 번영을 상징하는 조롱박 문양이 들어간 방한용 문발이 차르륵 소리를 내며 걷히자 엽학문이 찬바람을 몰고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아버지,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엽승강은 엽학문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엽영교는 묘씨 하좌에 놓인 복숭아 문양 수돈에 앉아 설탕에 절인 말린 과일을 살짝 베어 물었다. 머리를 숙여 인사하는 그녀의 눈빛엔 흥분 어린 조롱기가 스쳤다.
“아버님, 집안에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손씨는 목소리에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허서는 사생아이고 엽균은 다리가 망가진 놈이니, 가산은 우리 영이에게 떨어지지 않겠는가? 기대에 부푼 손씨는 그간에 벌어진 일을 나불댔다.
“아버님도 모르셨죠. 그 은정랑은 큰아주버님의 정실부인이 아니라 첩실이었고, 전남편인 허대실도 고자가 아니었던 겁니다. 허서는 은정랑과 허대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였어요. 아버님도 두 사람에게 속은 겁니다.”
“됐으니 그 입 다물거라!”
엽학문은 탑상에 앉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손씨는 그의 호통소리에 몸을 떨었으나 이내 안색이 확 변하더니 소리를 쳤다.
“아버님!”
“우린 한 가족이다.”
엽학문은 위엄 있는 모습으로 손씨를 꾸짖었다.
“지금 이런 때에 남의 불행을 보고 즐거워하면 되겠느냐?”
손씨는 말문이 턱 막혔다.
“방법을 강구해 이 위기를 넘겨야 한다. 안 그러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게다.”
“아버지 말씀이 맞습니다.”
엽승강은 얼른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는 언제나 삼 형제 중 가장 말을 잘 듣는 자식이었다.
엽학문은 ‘에휴’ 한탄하고는 말을 이었다.
“일은 대강 들어서 알고 있다. 은정랑이야 어찌 됐든 간에 허서는 분명 우리 엽씨 가문의 핏줄이 맞다!”
그 말에 나씨와 묘씨, 엽영교는 입꼬리를 씰룩거렸고 손씨와 엽승신은 의자에 기대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엽학문을 쳐다봤다. 손씨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반박했다.
“그럴 리가요. 그 허대실이라는 사람은 고자가 아니었는데 은정랑이 어떻게 여인의 절개를 지키고 얼음처럼 맑고 옥처럼 깨끗하겠습니까?”
“그 입 다물라고 했다!”
“그만하고 아버지가 하는 말씀을 들으시오.”
엽승신이 그녀를 당기며 이리 말하자 손씨는 갑자기 뭔가를 떠올렸는지 미간을 위로 당기면서 자리에 앉았다.
“밖에서 듣기 거북한 소문이 돌고 있는데… 나와 승덕이가 모두에게 숨긴 일이 있기 때문이다.”
엽학문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은씨는… 승덕이의 정실부인이 아니고 혼인을 한 적도 없다……. 은씨는 허대실에게 시집가기 전에 이미 승덕이와 잠자리를 했다. 승덕이가 떠난 후 은씨는 승덕이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허대실에게 시집을 갔던 게다.
그래서 허대실은 당연히 서가 자기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게지. 그런데 실은 승덕이의 아들이고 적혈법으로 친자인지 확인도 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할 말을 잃었고 어리둥절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리께서 아직 허대실을 만나 본 적이 없어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참다못한 묘씨가 입꼬리를 배죽거리며 부정했다.
“됐소. 설령 그자가 그런 말을 꺼냈다 하더라도 서는 우리 엽씨 가문의 핏줄이고 내 손자요. 이 일은… 에휴. 어쨌든 우리가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야 한다.”
엽학문은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엽학문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리에 앉아 있는 이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이상야릇하기 때문이었다.
묘씨와 나씨 등은 그렇다 쳐도 설쳐 대길 가장 좋아하는 손씨가 가만히 있는 게 의아했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러나 엽학문은 이것저것 다 신경 쓸 겨를이 없어 일단 밖으로 나갔다. 영귀원으로 걸어가는 내내 그는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좋을지 곰곰이 생각했다.
잠시 후, 영귀원에 도착해 보니 대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엽학문은 문을 두드렸다.
“문 열어라. 나다! 문 열란 말이다!”
쾅쾅 소리를 내며 한참을 두드리니 그제야 문이 열렸고, 이어 진 마마가 초췌한 얼굴을 내밀었다.
“후, 후야!”
엽학문은 옷소매를 뿌리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은정랑은 응접실의 귀비의에 앉아 있었고 허서는 그냥 바닥에 앉아 있으며 엽승덕은 서 있었다. 그새 바짝 야윈 세 사람은 두렵고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엽학문이 다가오자 세 사람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 아버님.”
은정랑은 당장이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엽학문은 소매를 휙 털더니 뜻밖에도 다짜고짜 엽승덕을 나무랐다.
“아주 잘하는 짓이다.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분수에 맞게 서를 서자로 들이면 된다고 말이다. 장래가 밝은 아이이면 됐지, 굳이 적자로 만들어야겠냐고 했다.
봐라! 네가 고집을 부린 탓에 이 꼴이 되지 않았느냐! 이제 다 들켜 버렸으니 온씨 쪽에 어떻게 말할 것이냐? 그쪽에선 분명 관아에 고발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되면 우린 뼈도 못 추릴 게야!”
엽승덕과 은정랑, 허서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엽학문은 아직도 허서를 자신의 손자라고 생각하고 있단 말인가? 세 사람의 낯빛은 더욱 하얗게 변했으나 누구도 사실을 고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