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5화
그 시각 영귀원.
은정랑은 침상 위에 앉아 창백한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허서도 얼빠진 얼굴로 한쪽에 놓인 권의 위에 앉아 있었다.
“…우리 도망갑시다!”
엽승덕이 허둥대며 이렇게 말했다.
“어서 짐을 챙기시오. 봉춘이 너는 어서 가서 마차를 준비하거라.”
봉춘은 그리하겠다고 대답한 후 서둘러 수화문 쪽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곳에 가니 하인 몇 명이 그를 밀어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주인마님께서 지금 집안이 다사다난하고 모든 일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니 후야께서 돌아오시면 옳고 그름을 논하시겠다고 하셨어. 그러니 그동안은 아무도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다네.”
장래가 밝은 ‘적손’ 허서가 돌아옴에 따라 엽학문이 한동안 엽승덕을 중요하게 생각해 정안후부 사람들은 모두 엽승덕의 말을 따랐었다.
그런데 오늘 이런 추잡한 일이 터져 버렸다. 집안 하인들은 하나같이 눈치가 빤했다. 여기에 또 허대실은 믿는 구석이 있어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소란을 피워 대니, 이 일이 어쩌면 정말로 허대실의 말대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하인들은 모두 엽승덕을 배신하고 묘씨 편에 섰던 것이다.
봉춘은 그들을 당해 낼 수가 없어 결국 되돌아갔다. 영귀원으로 돌아와 보니 은정랑 등은 이미 짐을 꽤 많이 싸 놓은 상태였다. 봉춘은 안으로 들어가며 창백한 얼굴로 고했다.
“집안에서 이미 출입을 막고 있어 나갈 수 없습니다.”
그 말에 엽승덕과 은정랑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 * *
이 일은 상부에 알려져 황제의 귀에 들어갔고 또 주운환, 허 장군과 관계된 일이라 궁 안에서도 주목하고 있었다.
어서방에 앉아 있던 정선제는 허대실이 대질對質을 원하며 적혈법으로 확인하길 요구하고 있는데, 은정랑 모자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걸 보니 분명 속으로 찔리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허대실의 주장이 사실임을 알아차렸다. 안색이 어두워진 그가 부윤에게 엽승덕과 은정랑 모자를 붙잡아 오라고 명을 내리려던 참이었다.
“황제 폐하, 한림원의 주운환과 허 장군이 폐하를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채결이 고했다.
“들라 하거라.”
정선제가 손에 든 붓을 내려놓으며 허했다.
잠시 후, 주운환과 허 장군이 안으로 들어와 정선제에게 예를 올렸다.
“소신,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일어나거라!”
정선제는 담담한 목소리로 인사를 받고는 주운환을 쳐다봤다.
“엽씨 가문 일을 이야기하려고 짐을 찾아온 것이 아니냐? 우리 대제에서 이런 추잡한 일이 일어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구나. 짐이 마침 부윤을 시켜 엽승덕과 그 모자를 붙잡아 오라고 하려던 참이었다.”
이에 주운환은 예를 올리고 대답했다.
“황제 폐하, 장모님을 욕보인 그들에게 소신도 무척 분개하고 있습니다. 다만 말만으로는 증거가 되지 못하니 엽씨 가문 후야가 돌아오면 정확히 물어본 다음에 붙잡아 오심이 좋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정선제는 희끗희끗한 눈썹을 추켜세웠다.
‘하, 이 녀석 봐라. 가능한 한 그것들이 오래 수모를 겪게 하고 싶단 이야기 아닌가. 참, 그 첩이 매일같이 늙은 여종을 보내 그 온씨 부인을 욕보였다지. 그러니 복수를 하고 싶은 게로군.’
정선제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오랜만에 한번 놀아 보고 싶어져 미소를 지으며 동의했다.
“그럼 엽학문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옳고 그름을 결정하자꾸나.”
“황송하옵나이다. 황제 폐하.”
그리 말한 후 두 사람은 물러갔다.
* * *
정안후부 일로 온 도성이 들썩거렸다. 그날 혼례식이 매우 성대하게 치러진 탓에 지금 정안후부는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혼례식에 참석했던 하객들은 거의 모두 이 일에 대해 묻고 싶어 했지만, 정안후부는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방문객을 사절했다.
사람들은 도성의 여러 공연장과 찻집에서 이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듣고 또 들어도 질리지가 않았다. 그저 직접 보지 못한 것이 안타까워 그날 정안후부 근처에 있지 않았던 스스로를 내심 원망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여러 찻집에 있는 손님들 중 한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외쳤다.
“저기 봐요. 허대실이 또 엽씨 가문 대문으로 달려가고 있어요!”
“어서 가 봅시다!”
모두 눈을 반짝이며 서둘러 그쪽으로 달려갔다. 정안후부 주위에 있는 요릿집들은 금세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허대실은 밖에서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관아에서 너희들을 아직도 안 잡아가니 수상하구나! 설마 너희들이 관아 사람을 찾아가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이냐? 어서 나와 피를 떨어뜨려 혈육인지 판별해 보자!”
이때, 여전히 은정랑과 엽승덕을 믿고 있는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지금 저 사람들을 모함하고 있소. 당신은 고자이니 저 사람들이 잘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은 게지.”
“누가 이 몸 보고 고자라고 합니까? 이 몸이 고자가 아니라는 걸 보여 주겠소.”
허대실은 그리 말하고는 은화를 들고 가장 가까운 기루妓樓로 들어가 가장 예쁜 기녀들 몇 명에게 접대를 받았다.
사람들은 어떻게 됐는지 물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이튿날 이른 아침이 되어서야 허대실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백성들은 이야기를 듣고는 한입으로 ‘했구나!’라고 외쳤다. 그럼 피를 떨어뜨려 혈육인지 확인해 볼 필요도 없었다. 허대실이 고자가 아니면 뭣 하러 남의 씨를 품고 있는 여인과 혼인을 했겠는가?
사람들은 이야기를 듣고는 떠들썩하게 웃어 댔다. 이때, 회색 단갈을 입은 점원 차림의 한 사람이 갑자기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허 형이 아니신가? 지난번에 거… 우리 객줏집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들었구려.”
“이건 또 대체 무슨 소리야? 은씨가 당신을 안 만나려 한다고 하지 않았소?”
사람들의 물음에 허대실이 황당하단 듯 되물었다.
“안 만나려 한다고? 저것들이 혼인하기 사흘 전에 내가 송화 골목으로 갔소. 다들 허 장군님은 알고들 있을 거요. 그분은 나와 같은 마을에 살던 형님인데, 공교롭게도 나와 성과 이름이 같소. 한데 그분은 대여섯 살쯤 됐을 때 마을을 떠나 현縣으로 가서 살았기 때문에 은씨는 형님을 전혀 몰랐소.
여하튼 나중에 형님과 내가 우연히 강왕 전하의 군대에 함께 들어가게 된 것이오. 형님은 전공戰功을 세웠지만 난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 그저 말이나 돌보는 처지였지. 그런데 이번에 또 어찌어찌 형님과 도성에 같이 돌아오게 됐소.
난 돌아오자마자 제일 먼저 처자식을 찾으러 갔고 두 사람과 다시 함께 살기를 바랐는데, 그것들이 날 허 장군으로 오해하고 나와 함께 떠나겠다고 한 것이오. 그때 난 저 사람의 객줏집에서 묵고 있었소.”
점원이 허대실의 말을 이어 받았다.
“한 여인이 이른 아침에 저 형님을 찾아왔죠. 그런데 그 여인 때문에 우리 객줏집에 묵으려던 손님들이 몇 번이나 그냥 가 버렸다니까요. 내가 알아요. 그 여인이 은씨예요. ‘아아!’ 하는 신음소리가 객줏집 전체에 들렸다니까요.”
점원이 침을 퉤 뱉었다. 그리고 때마침 어떤 소식이 전해졌다. 어느 찻집에서 전달된 소식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한 노부부도 목격했다고 했다. 그때 허대실의 방 옆방에 묵은 그들 역시 똑똑히 그 소리를 들었다고 말이다.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은정랑이라는 여인은 참 대단한 여인이었다. 당시 사흘만 있으면 엽승덕과 혼례식을 올리는 것 아니었는가!
그런데 뜻밖에도 이 사내와 정을 통해 놓고도 후에 이 사내가 장군이 아니라 마부라는 걸 알아차리자 엽승덕에게 다시 달려갔던 것이다.
이날 이후로도 허대실은 매일같이 정안후부 문 앞으로 찾아와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자고 떠들었고, 그의 충실한 관객인 백성들은 그가 올 때마다 주위를 빽빽이 둘러쌌다.
허대실의 이름은 조용하고 차분하다는 뜻인데 그의 입은 이름과는 아주 딴판이었다. 갖가지 우스운 이야기를 끊임없이 쏟아 냈고, 거기에 말재주가 어찌나 뛰어난지 매일 색다른 이야기처럼 들렸다. 그야말로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다.
“당시 난 동네에서 잘나가는 부농이었고 청석골에 사는 마씨 성을 가진 서생의 여식과 정혼을 한 상태였소. 정랑은 집안이 가난했지만 마씨 처자와 사이가 좋아 늘 마 서생의 집에 가서 글자를 익혔소.
하루는 내가 청석골에 갔는데 마씨 가문에서 탕수糖水(단맛이 나는 여러 가지 재료를 넣고 만든 후식) 한 사발을 먹고 가라고 권하더군요. 그래 나와 마 서생, 마씨 처자 그리고 은정랑이 함께 앉아 계화탕수桂花糖水를 마시고 있었는데, 은정랑이 갑자기 탁자 아래에서 발로 날 건드릴 줄 누가 알았겠소! 그런 식으로 희롱을 했단 말이오!
그렇게 내 허벅지를 건드리니 순간 홀려서 넘어갔던 거요. 그 후 난 마씨 처자와 파혼하고 그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소.”
사람들은 또다시 크게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은정랑은 이리도 뻔뻔한 여인이었던 것이다.
마 서생은 가난한 은정랑을 꺼리지 않고 그녀에게 글자까지 가르쳐 줬다. 그런데 그녀가 탁자 밑에서 딸의 정혼자 다리를 건드리며 희롱을 할 줄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은정랑은 정말이지 배은망덕한 여인이었다. 배은망덕할 뿐만 아니라 음탕하고 상스러우며 후안무치하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여러 기루에서는 이내 새로운 놀이법이 생겨났다. 그 놀이법은 바로 탁자 아래에서 발로 손님들을 희롱하는 것이었고 손님의 수청을 들 땐 모두 ‘아아!’ 하고 신음소리를 내야 했다. 은정랑에게서 배운 새로운 방법이라고 했다.
사내를 유혹하는 은정랑의 방법은 금세 각 기루에서 가장 유행하는 놀이법이 되었고, 은정랑과 두 사내의 이야기는 단숨에 도성 전체를 휩쓸었다. 세 사람과 관련된 소문은 ‘무대랑, 반금련, 서문경’(『수호지』, 『금병매』에 등장하는 세 인물. 반금련과 서문경이 혼외정사를 벌이고 반금련의 남편 무대랑을 독살함)의 이야기를 압도할 정도였다.
어떤 사람은 이 세 사람의 이야기로 화본을 만들겠다고 했고, 공연장에선 이미 그들 이야기로 연극을 기획 중이라고도 했다. 복잡하게 얽혀 색다르면서도 자극적인 이 세 사람의 이야기를 무대 위에 올릴 계획이었다.
은정랑과 엽승덕, 허대실의 이야기는 밖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은정랑 모자와 엽승덕은 영귀원에 숨어 있음에도 이 소식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하인들이 일부러 밖의 상황을 알리며, 목매달아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은정랑을 모욕했기 때문이다.
이날, 식사를 가져온 여종은 밥과 반찬을 탁 소리가 나게 밥상 위에 던지듯 내려놓아 국물이 은정랑의 몸 위로 튀어 버렸다.
“이!”
은정랑이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목청을 높이려는 찰나.
“왜요? 밥 먹을 때조차도 ‘아아’ 하고 신음소리를 내야 하나 보죠? 발로 상대를 희롱한 다음에 드시지 그러세요?”
그 여종은 빈정거리더니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은정랑은 분통이 터져 죽고만 싶은 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