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284화 (284/858)

제284화

“허, 헛소리 말아라! 우리 서 도련님은 엽씨 가문 세자야의 적자이며 그분의 핏줄이다!”

진 마마는 최후의 발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엽씨 가문 후야께서도 인정하셨다. 적혈법滴血法(과거 혈육 간에는 피가 서로 섞인다고 믿어 이 방법으로 친자관계를 확인함)으로 혈육인지 아닌지도 확인해 보셨단 말이다. 당신은 그저 우리 마님께서 엽씨 가문으로 들어간 게 못마땅해 이리 헛소리를 늘어놓는 거 아니오!”

백성들은 잇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대를 이을 핏줄과 관련된 중대한 일인데 실수를 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어쨌든 후부이며 친손자가 둘이나 있는 집안에서 어떻게 남의 핏줄을 자신의 핏줄이라고 얼렁뚱땅 인정했겠는가. 그러니 은정랑과 허서는 정말로 후부의 정실부인과 적자일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허대실이 은정랑과 허서가 자신을 떠나 친아버지 집으로 입적되는 꼴을 차마 볼 수가 없어 이렇게 찾아와 자신과 엮으려는 게 분명했다.

“퉷! 거기 아무나 면도칼 좀 갖다 주시오.”

허대실이 갑자기 면도칼을 찾았다. 마침 길가에 면도를 해 주는 노점상이 있었다. 그 노점상은 혼자 밥을 먹고 있던 사내에게 날카로운 작은 칼을 가져오라고 했다.

“뭘 하려는 거요?”

주위에 있던 백성들이 호기심을 보였다. 허대실은 대꾸 없이 그 작은 칼을 들고 ‘샥샥’ 소리를 내며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던 덥수룩한 수염을 단번에 깨끗이 밀어 버렸다.

“허서가 내 씨가 아니라고 했는데 어디 그 녀석한테 나와 보라고 하시오. 부자가 똑같이 생겼는지 아닌지 봐야 하지 않겠소.”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허대실의 얼굴을 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진 마마는 제일 크게 기겁하며 숨을 헉 들이켰다.

방금 전 수염이 덥수룩할 땐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지금 수염을 밀고 나니 허서의 얼굴과 판박이였다. 그저 좀 더 나이 들어 보이는 것뿐이었다. 허서와 똑 닮아 있어 제2의 허서라고 불러도 될 판이었다.

“어머, 이게 무슨 일이야. 입적한 지 얼마 안 된 큰조카와 똑같이 생겼네. 이런 우연의 일치가 있나!”

엽영교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예? 정말 닮았어요?”

주위에 있던 백성들은 엽영교의 말을 듣고는 모두 깜짝 놀랐다.

“내가 그 엽서인가 허서인가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딱 저렇게 생겼어요.”

한 아낙네가 말했다.

“내가 매일 이곳에서 노점을 운영하거든요. 몇 번이나 보았죠.”

“누가 아니래요. 매일 그 모자가 정문으로 나와 정문으로 들어가며 어찌나 거들먹거렸는데요. 그러니 못 알아보는 게 더 어렵죠.”

“허서는 이 허대실이라는 사람의 친아들이 맞아요.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이리 똑같이 생길 수가 있겠어요?”

그때, 사람들 사이로 서생들이 입는 회백색 도포를 입은 몇 명의 청년들이 비집고 들어와 이리 외쳤다.

“저희는 허서와 함께 수학하는 벗입니다. 확실히 얼굴이 똑같습니다. 전 분명 허서가 외실의 아들이라고 믿었는데, 어떻게 갑자기 후부의 적자가 되어 버리더군요? 이상하다 싶었는데, 하하, 과연……. 거짓이었던 거네요.”

“그저 우연의 일치일 뿐이에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진 마마가 목소리를 덜덜 떨며 부정했다.

“우연의 일치라고? 이런 우연의 일치가 어디 있는가?”

서생들이 이리 말하자 주위에 있던 백성들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과 닮았으면 뭐 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 허대실이라는 사람은 허서와 부자 관계였네. 어떻게 공교롭게도 양아버지와 생김새가 닮을 수가 있겠는가?”

“아직도 못 믿겠으면 그 녀석에게 나와 보라고 하시오! 우리 부자를 비교하면 되는 것 아니겠소. 그 녀석이 피를 떨어뜨려 혈육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는 걸 좋아한다지? 나와서 피도 떨어뜨려 확인해 보면 되겠네.”

허대실이 쐐기를 박았다.

“우린 혼인 증서가 있다……. 혼인 증서가 있어……!”

“혼인 증서? 하하하.”

진 마마가 겨우 혼인 증서를 떠올리자 허대실은 냉소를 지었다.

“이 몸이 그딴 혼인 증서를 신경이나 쓸 것 같아? 어쨌든 허서는 내 친아들이다.”

“그래, 나와서 피를 떨어뜨려 혈육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면 되겠네.”

백성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나이 든 허서가 여기 서 있으니 그야말로 살아 있는 증거가 아닌가. 허대실의 이 얼굴, 그리고 적혈법으로 확인해 보자고 당당히 말하는 모습을 보니 어찌 거짓일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안후부에 혼인 증서가 있으니 참 이상한 일이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백성들은 이해가 가지 않아 잇달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된 거겠는가? 엽승덕이 나쁜 짓을 꾸민 거지.”

이때 누군가가 냉소했고, 이어 유려하고 낭랑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참으로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백성들이 고개를 돌려 보니 맞은편 객줏집의 2층 창가 자리에 한 소녀가 앉아 있었다. 맑고 아름다운 외양의 소녀는 바로 엽연채였다. 엽연채는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외모의 소유자였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를 바로 알아봤다.

“저 사람은 엽씨 가문 손녀이자 이번 장원 급제자의 부인이 아닌가?”

“맞네, 맞아. 평처로 신분이 떨어진 온씨의 여식일세. 대체 어찌 된 일이지?”

엽연채는 조그만 청자 찻잔을 다소곳이 들어 올렸다. 그러면서 살짝 위로 솟은 아리따운 눈동자로 진 마마를 힐끗했다.

“어찌 된 거겠는가? 첩은 첩인 거고 의붓자식은 의붓자식인 거지. 은정랑은 본래 청석골에 살던 곱상하게 생긴 처녀였네. 그리고 그 마을 부농인 허대실에게 시집을 가서 아주 만족해했지.

그런데 뜻밖에도 허대실의 아버지가 병으로 쓰러져 가산을 모두 잃게 되었고, 그렇게 집안이 빈농이 되어 버렸네. 그 후 허대실은 종군하게 되었고,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은정랑은 당장에 무덤을 만든 뒤 아들을 데리고 재가하려 한 거지. 진작부터 가난한 생활을 견딜 수가 없었으니 아주 기뻐했을 거고.

은정랑은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도성으로 와서 엽승덕을 알게 된 후 엽승덕의 외실이 되었지. 은정랑에게 홀딱 빠진 엽승덕은 좋은 건 뭐든 그 여인에게 갖다 바치고 싶어 안달이 나 정실부인을 모함한 것이네.

후야는 허서가 자신의 손자인 줄 아셨고 또 허서가 공명까지 얻었으니 그것을 적자로 만들고 싶어 하셨지. 그래서 엽승덕과 함께 우리 어머니를 모함하는 데 동의하셨던 거고, 그 바람에 우리 어머니는 정실부인에서 평처로 신분이 낮아지신 거네.”

아래에 있던 백성들은 깜짝 놀라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어떻게 이런 황당한 일이 있을 수 있지.”

“하지만 엽씨 가문 세자와 허서는 적혈법으로 친자관계를 확인했습니다. 두 사람의 피는 섞였고요.”

한 영감이 적혈법을 근거로 의문을 제시했다.

“적혈법이 그렇게나 확실한 방법인가?”

엽연채는 냉소를 지으며 반박에 나섰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내 피와 내 부군의 피도 섞였다네. 그럼 우리가 부녀나 모자의 관계라는 말인가? 그리고 또 적혈법을 믿는다면 어째서 허서를 불러내 확인하지 않는가? 친자식인지 아닌지는 피를 섞어 보면 바로 알 수 있는데 말이지.”

이에 백성들은 모두 소리를 질렀다.

“허서를 불러내 확인해 보자! 허서를 불러내라!”

살아 있는 증거와 사실 앞에서 혼인 증서와 거짓말 따위는 숨을 곳이 없었다.

묘씨는 이 상황을 지켜보며 속이 좀 후련했지만 또 한편으론 기가 막혔다. 집안에서 낯부끄러운 일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니 엽영교가 어떻게 시집을 가겠는가?

“아이고, 생각지도 못한 일이네!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손씨가 냉소를 터트렸다.

“제가 그랬죠. 그저 첩일 뿐이라고요. 정실부인이고 적자였으면 진작에 정안후부로 들였겠죠. 이렇게 오랫동안 미뤘을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거짓을 꾸밀 시간이 필요했던 것뿐이죠, 쯧쯧.”

“우리 아버지는… 속느라 고생하셨네요.”

엽영교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됐으니 이만 돌아가자꾸나!”

묘씨가 어두운 낯빛으로 말했다.

정안후부 사람들마저도 이렇게 말하자 백성들은 엽연채의 말을 거의 믿게 되었다. 당당하다면 어째서 허서는 밖으로 나와 적혈법으로 혈육인지 아닌지를 확인하지 않는단 말인가?

“엽승덕도 참 흉악하고 잔인한 사람일세!”

“그 첩실은 또 어떻고. 뻔뻔하고 오만방자해! 정실부인을 무참히 끌어내려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고, 그것도 모자라 매일 여종을 보내 그 정실부인에게 모욕을 줬잖아.”

“어, 저기 좀 봐요!”

다들 한창 비난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삼십 대로 보이는 젊은 아낙네가 계단 위에 서 있는 진 마마를 가리켰다.

“저 야박해 보이는 어멈이 매일 온씨 부인의 거처로 가서 문을 두드리던 그 여종 아니에요?”

“맞아요! 저 여인이에요!”

오십 대로 보이는 뚱뚱한 아낙네가 동조하며 목청을 높였다.

“정말 파렴치한 인간이에요. 악랄한 수를 써서 정실부인을 쫓아내더니 그 부인이 첩실로서 예를 올리게 하려고 매일 저 여종을 보내 문을 두드리며 이렇게 소리치게 했죠. ‘작은마님, 마님께서 정안후부로 들어오십니다. 어서 돌아와서 저희 마님께 예를 올리세요.’ ‘작은마님, 큰아가씨. 오늘 마님께서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실 겁니다. 그러니 작은마님과 큰아가씨께서도 어서 돌아오셔서 마님께 차를 올리세요.’”

아낙네는 목소리를 바꾸어 진 마마의 말을 아주 흡사하게 흉내 냈다. 듣고 있던 주위의 백성들은 일제히 쯧쯧 혀를 찼다.

“뻔뻔하기는! 악독한 것들!”

그렇게 욕하며 진 마마를 향해 침을 뱉었다. 진 마마는 악취가 나는 침이 얼굴에 잔뜩 튀기자 놀란 나머지 황급히 정안후부로 뛰어 들어갔다.

허대실은 그 모습을 보며 욕을 몇 마디 더 날린 후에야 그곳을 떠났다.

묘씨와 엽영교 등이 안녕당으로 돌아가 보니 은정랑 모자와 엽승덕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묘씨와 엽영교가 탑상에 앉자 나씨가 창백한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어머님, 심문할 필요도 없습니다. 큰아주버님이 저지른 파렴치한 일입니다. 이제 어떡하죠?”

어떤 일들은 일단 폭로만 되면 그 인간의 평소 행실과 연결 지어 전후 사정을 다 파악할 수 있는 법이었다.

“공당公堂(법정)으로 끌고 가야죠!”

손씨가 독살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이리 말하자, 엽영교가 두 눈을 살짝 깜박이며 그녀가 더 입을 열지 못하게 막아섰다.

“이 일로 가장 크게 다친 사람은 큰새언니와 연채예요. 연채의 부군마저도 안 좋은 영향을 받았고요. 어사들이 연채의 부군을 탄핵했다고 들었어요. 저희 집안에서 일어난 추접한 일이 상부에 알려져 황제 폐하께서도 들으신 모양이라 하고요. 그러니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는 상부에서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보고 결정해야겠죠.

또 이 일이 밖에 파다하게 퍼져 있기는 하지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는… 자세히 따져봐야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안 계시니 이 일은 일단 내버려 두죠! 지금은 그 두 사람이 도망가지 않게만 하면 됩니다.”

묘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래. 이 일은 나리께서 돌아오시면 다시 이야기하자꾸나. 전 마마는 가서 하인들을 시켜 앞문과 뒷문은 물론이고 측문들까지 모든 출구를 다 막아 버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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