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283화 (283/858)

제283화

그 시각, 안녕당.

묘씨는 고개를 숙인 채 차를 마시고 있었고, 나씨와 손씨는 고소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함께 자리한 엽영교와 엽미채는 서로 붙어 앉아 소곤거렸고, 이따금씩 은정랑 쪽을 힐끗 쳐다보고는 은근한 웃음기를 내비쳤다.

은정랑과 허서는 사색이 된 얼굴로 권의에 앉아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은 밖에 있는 허대실만 생각하고 있었다.

‘쫓아냈겠지! 쫓아냈을 것이다! 강왕 부대까지 떠났으니 허대실은 이젠 그저 천한 마부에 불과하다. 권력도 권세도 없는 그런 천한 인간은 분명 쫓아냈을 것이다.’

이때, 봉춘과 위자가 비틀거리며 안녕당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세자야…….”

“어찌 됐느냐? 쫓아냈느냐?”

엽승덕은 얼른 그들에게 다가가더니 냉랭한 목소리로 고함치듯 물었다.

“아니요……. 그 허튼소리를 하는 자를 쫓아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작위를 받은 허 장군이 갑자기 문 앞에 떡하니 서더니 자신이 그 허대실이라는 자의 뒤를 봐주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누가 감히 나서서 대항할 수 있겠습니까?”

봉춘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변명했다. 그 말을 들은 은정랑과 허서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허대실은 확실히 장군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를 도와주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은정랑은 갑자기 그날 객줏집에서 허대실이 오만한 얼굴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 뒤를 봐주는 분이 있소!”

은정랑의 조그만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정말로 뒷배가 있을 줄이야. 게다가 그 사람이 바로 허 장군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허대실은 뭐고 허 장군은 또 뭐냐?”

결국 참다못한 묘씨가 은정랑을 쳐다보며 입을 뗐다.

“그게…….”

은정랑이 어떻게 그녀를 속여 넘길지 궁리하며 말을 꺼내는 찰나, 엽영교가 두 눈을 살짝 깜빡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머니, 밖에 그 사람이 있다고 하니 저희 밖으로 나가 봐요.”

“가서 한번 봐야죠. 어떤 간 큰 놈이 저희를 기만하고 있는지 말이에요.”

“맞아요. 가서 봐야죠!”

손씨는 얼른 손을 들며 그 말에 찬성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직감이 들었다.

“가긴 뭘 갑니까? 개망나니 같은 인간이 행패를 부리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다들 집안에 가만히 계세요!”

엽승덕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렸다.

“큰오라버니, 어머니한테도 호통을 치네요?”

엽영교의 눈빛에 조롱기가 스쳤다.

“첫째야, 평범한 사람이 허튼소리를 해 대면 그냥 그렇다 치고 쫓아내면 그만이다. 그러나 저렇게 악질적인 놈이 믿는 구석까지 있나 본데 우리가 집 안에 틀어박혀 얼굴도 내밀지 않겠다는 말이냐? 그냥 내버려 두면 우리 정안후부의 평판이 땅에 떨어지지 않겠느냐?”

묘씨가 살짝 어두운 낯빛으로 말했다. 그녀는 그리 말하며 이미 자리에서 일어섰고 엽영교, 엽미채, 둘째 내외와 셋째 내외는 그녀의 뒤를 따라 우르르 밖으로 향했다.

엽승덕은 창백한 얼굴로 의자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곁의 은정랑과 허서는 두 다리를 덜덜 떨었고 머릿속에선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도 밖으로 나가 허대실을 쫓아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날 자신들이 허대실에게 했던 짓을 떠올리자 감히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진 마마… 자네가 나가서 그자를 쫓아내 주게…….”

은정랑이 떨리는 목소리로 진 마마를 불렀다.

“예.”

진 마마는 얼른 대답한 뒤 묘씨 일행을 따라갔다.

정안후부 대문 밖에서는 허대실이 아직도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정랑, 서야! 너와 네 어미가 나를 어떻게 대했든 간에 난 너희들을 미워하지 않을 것이다. 엽승덕, 이 파렴치한 놈아! 남의 처자식을 빼앗아 가다니.”

주위를 에워싼 백성들도 계속해서 수군거리고 있었는데, 이때 한 노부인이 입을 열었다.

“자네는 어디서 굴러먹다 온 호색한에 사기꾼이기에 이렇게 남의 명예와 절조를 더럽히는 건가! 은씨는 정안후부 세자의 정실부인이네!”

“누가 아니래요. 어제 떳떳하게 다시 정안후부로 들어갔잖아요.”

머리가 희끗희끗한 한 노파가 말을 거들었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 소리나 지껄이지 마시오! 은정랑이 언제부터 후부 세자의 정실부인이었소? 그 사람은 이 허대실이 중매인을 통해 정식으로 맞아들인 아내요!”

허대실은 백성들을 향해 성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모두 몸을 움츠리며 뒤로 한 발짝 물러섰으나 방금 전에 이야기를 꺼낸 그 두 사람은 이미 허대실이 튀긴 침에 얼굴이 젖은 후였다.

“오오, 어떻게 된 건지 알겠구먼!”

이때 몸집이 비대한 다른 노파가 나섰다.

“저 허씨라는 사람은 은씨가 엽씨 가문 세자를 떠난 후 시집간 그 사내 아닌가? 군에서 복무하다가 죽었다고 하지 않았나?”

“아이고, 그런 거였구먼!”

백성들은 혀를 끌끌 찼다.

“하지만 은씨는 그쪽에게 시집가기 전에 이미 엽씨 가문 세자야의 정실부인이었네.”

허대실이 대꾸를 하려는 순간, 대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묘씨 일행이 모두 밖으로 나와 대문 앞에 섰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묘씨가 눈썹을 추켜세우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분이 정안후부 주인마님이시네!”

방금 전 그 뚱뚱한 노파가 허대실에게 묘씨를 소개하더니 이번엔 묘씨를 보고 사정을 대신 이야기했다.

“마님, 어제 그 댁 정실 며느리를 정안후부로 들이지 않았습니까? 이 사람이 그 댁 정실 며느리의 전남편인가 봅니다. 그래서 이리 찾아와 소란을 피우는 거죠.”

노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창백한 얼굴의 진 마마가 앞으로 나와 계단에 섰다. 그녀는 고압적인 자세로 허대실을 내려다보며 중요한 부분은 피하고 지엽적인 이야기만 꺼냈다.

“아… 알고 보니 아직 살아 있던 거구만? 당신이 그 허대실이지? 우리 마님은 원래 당신에게 시집을 갔었지. 일편단심 당신만 바라보고 사셨는데, 당신이 출정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나중에 마을 사람 중 한 사람이 돌아와서 당신이 타지에서 죽었다고 했네. 그 후, 우리 마님은 서 도련님을 데리고 도성으로 올라오셔서 세자야를 만나게 되셨고.

알고 보니 이렇게 살아 있으면서 그 오랜 세월을 죽은 척하고 있었던 거였군. 이제 우리 마님과 서 도련님께서 이곳으로 입적… 부귀를 누리게 되니 이곳에 와서 소란을 피우는 것이냐!”

그 말에 주위에 있던 백성들은 잇달아 경멸 어린 시선으로 허대실을 쳐다봤다.

“그러게 말이야. 진짜 뻔뻔하네! 처자식을 버리고 타지에서 죽은 척하며 오랫동안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던 거잖아. 그럼 재가했다고 탓하면 안 되지. 게다가 재가도 아닌 셈이고! 모든 게 다 인연이었던 게야.”

“뻔뻔하긴 누가 뻔뻔하다는 것이냐?”

허대실은 사납게 목청을 높였다.

“이 몸은 응성에서 전쟁터에 나가 싸우며 가정과 나라를 지켰소. 옥안관에서 참패를 했을 때 내 곁에 있던 형제들은 모두 황량한 전쟁터에 뼈를 묻고 말았지. 그래서 마을 사람인 이전이 고향으로 돌아가 어떤 사람들은 실종됐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전했을 뿐이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집안 사내들이 죽었다는 말을 믿지 않고 몇 년을 기다렸소. 그런데 이 빌어먹을 여편네가 이전의 말만 듣곤 당장에 내 옷을 묻은 무덤을 만들 줄 누가 알았겠소? 날 조금도 기다리고 싶지 않았던 거요. 그 바람에 우리 어머니는 화병으로 돌아가셨고, 이 여편네는 이때다 하고 토지를 전부 팔아 아들을 데리고 도망을 갔소.

그때 난 죽지 않았소. 강왕 전하의 부대가 부상을 입은 날 구출해 주었소! 하지만 서북의 전황戰況이 심각해 2년 후에야 집으로 돌아가게 된 거요. 와 보니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토지는 전부 팔렸으며 아내는 아들을 데리고 도망을 간 후였소!

다들 못 믿겠으면 허씨 집성촌으로 가서 그 여편네가 제일 먼저 내 옷을 묻은 무덤을 만든 사람인지 아닌지 물어보시오. 내가 2년 후에 고향으로 돌아가서 가족들을 찾았는지 아닌지 물어보란 말이오!”

허대실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사람들은 그의 흐느낌 섞인 걸걸한 목소리에 마음이 흔들렸다. 알고 보니 이 사내는 가정과 나라를 지키고 대제와 백성을 위해 전장에서 싸운 병사였다. 구경꾼들은 좀 전처럼 그렇게 멸시 어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게다가 그 은씨라는 사람은 제일 먼저 남편의 옷을 묻은 무덤을 만들었다는데, 너무 매몰차지 않은가?

“그해에… 어쨌든 이미 벌어진 일이니…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세. 굳이 여기서 떠들 필요 없잖나. 원하는 게 있으면 안에서 다 말해 보시오.”

진 마마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말하면 주겠다는 말이오?”

허대실은 이리 반문하더니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난 아무것도 필요 없소. 정랑과 서만 원하오! 이 일이 공정하게 해결되길 원한단 말이오!”

엽영교는 그 말에 웃음을 짓더니 앞으로 한 발 내디디며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리 억지를 쓰는 사람을 봤나. 그 사람은 이제 내 큰새언니이고 내 큰오라버니의 정실부인이다. 그쪽을 만나기 전에 이미 내 큰오라버니의 정실부인이었단 말이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백성들도 연거푸 동조했다.

“맞네! 당신도 참 과하게 소란을 피우는구먼.”

한 노파가 입을 열었다.

“그분은 원래부터 엽씨 가문 세자의 정실부인이었네. 세자의 생모가 중간에서 두 사람을 방해하는 바람에 그분이 전체적인 상황을 고려해 목숨을 끊으려고 했지. 그런데 뜻밖에도 이미 배 속에 아이가 생긴 터라 차마 목숨을 끊지는 못한 거네. 그래서 죽은 척하고 떠난 게지! 그 뒤 자네에게 시집을 간 거고.”

“그게 무슨 망발입니까!”

허대실이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시집을 갔었고 배 속에 아이까지 있었다니요? 이 몸이 한 번 갔다 온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겠소?”

“당신이 고자이니 그랬지.”

한 사내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이가 있는 여인과 혼인을 한 거고 그 아이를 자기 아이로 삼아 키웠던 게지. 그 은정랑이라는 사람은 당신에게 시집을 가면 엽씨 가문 세자를 위해 수절할 수 있으니 그랬던 거고. 얼음처럼 맑고 옥처럼 깨끗한 몸으로 끝까지 정조를 지킬 수 있으니 말이오.”

“망발도 정도껏 하시오.”

허대실이 단박에 부정했다.

“대체 누가 이 몸을 고자라고 했소? 나랑 뒹굴 만큼 뒹군 다 늙은 여편네요. 거기다 감히 이 몸을 고자라고 했단 말이오? 얼음처럼 맑고 옥처럼 깨끗하다고? 에잇, 퉷!”

그 말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다… 당신은 지금 우리 마님의 정조를 더럽히고 있어!”

진 마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정조? 그 여편네가 지킬 정조가 있다고?”

허대실은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어갔다.

“허서도 이 몸의 씨다! 후부의 적자라니, 잠에서 덜 깬 모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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