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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281화 (281/858)

제281화

정선제는 상소를 하나 집어 들어 안에 적힌 내용을 보더니 희끗희끗한 눈썹을 살짝 추켜세웠다. 뜻밖에도 아녀자들에 관한 일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긴 했다. 첩실이 정실부인이 되고 정실부인이 평처가 된 것이다.

“황제 폐하. 그 은씨라는 사람이 원래 정실부인이었는데 오랫동안 억울함을 견디다가 결국 더는 참지 못하고 정안후부로 돌아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림원의 주운환은 태도가 불손하여 어엿한 장모인 은씨에게 차 한 잔도 올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는 손윗사람을 공경하지 않는 그릇된 행동이옵니다.

주운환은 이번 과거 시험의 장원 급제자이니 문인과 재자들 중 으뜸이라 할 수 있는 자 아니옵니까. 한데 처갓집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도 장모를 설득해 집으로 돌려보내기는커녕 오히려 잘못된 행동을 도우며 부추기고 있습니다! 이는 공맹지도孔孟之道에 어긋나는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자가 학자라니 가당치도 않지요!”

그러자 모든 어사들이 잇달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렇게 도량이 좁고 불효부제不孝不悌(어버이를 잘 섬기지도 못하고 어른에게 공손하게 행동하지도 못함)하고 불목不睦하며 불경한 자가 어찌 한 나라의 동량棟梁이 될 수 있겠습니까? 장원 급제자라는 이름을 모욕하는 일입니다. 하오니 황제 폐하께서 주운환의 장원 급제자 호칭을 거두시기를 소신들이 주청드리는 바입니다.”

정선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이미 이 일의 진상을 거의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엽학문이 아무나 손자로 인정할 정도로 어리석을 리가 없고, 어사들 또한 충분히 시간을 들여 엽승덕과 은정랑에게 정말로 혼인 증서가 있다는 걸 밝혀냈기 때문이다.

주운환은 정말로 불경하고 불효부제한 사람이었다. 정선제는 자신의 장녀와 꼭 닮은 주운환의 얼굴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

효심이 가장 지극했던 운하 공주는 자신이 병이 날 때마다 한달음에 달려와 『지장경地藏經』을 읊어주곤 했다. 그런데 그녀와 닮은 얼굴을 한 주운환이 이런 불효막심한 일을 벌였다고 하니 분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봐라, 한림원의 주운환을 불러오너라.”

끄트머리에 서 있던 어린 환관이 ‘예’ 대답하더니 얼른 밖으로 뛰어나갔고, 잠시 후 주운환이 대전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정선제를 향해 공손히 예를 올렸다.

“소신, 황제 폐하를 알현하옵니다.”

정선제의 흐리멍덩한 눈빛이 주운환의 수려하고 고귀해 보이는 얼굴로 향했고 이어 그는 노여움 서린 목소리로 하문했다.

“어사들이 너를 탄핵했다. 어찌 해명할 것이냐?”

어린 환관이 주운환을 부르러 갔을 때 당연히 그에게 이 일에 대해 알려 줬을 테니 정선제는 긴말하지 않고 바로 물었다.

“거짓이옵니다.”

주운환은 담담하게 답변하더니 정선제를 향해 공수하고 말을 이어갔다.

“소신은 바로 ‘효’를 받들기 때문에 이리 행동한 것입니다. 그 은정랑이라는 사람은 결코 정실부인이 아니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증거가 눈앞에 떡하니 있는데도 사실을 왜곡하려는 것이오?”

왕성촌이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그러나 정선제는 이미 계획이 다 있는 듯한 주운환의 차분하고 느긋한 모습을 보고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주씨 가문이 수도의 성문도 못 지킨 건 어쩔 수 없었다 쳐도 이젠 문관으로서도 제 역할을 못 하는군요.”

이 말과 함께 누군가의 비웃음이 울려 퍼졌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니 육십 대로 보이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보였다. 바로 풍씨 가문의 노장군으로, 그는 현재 주씨 가문을 대신해 수도의 성문인 응성에 군대를 주둔하고 있는 풍씨 가문의 주인이었다.

조정의 관리들은 그의 조롱 섞인 말을 듣고는 얼굴에 동의한다는 기색을 비쳤다.

어사들의 압박에는 전혀 여유를 잃지 않던 주운환이었으나 풍 장군의 말을 듣더니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이때, 어린 환관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황제 폐하, 강왕 전하와 허대실이 문밖에 도착하셨습니다.”

“아바마마, 이 일은 중요한 일이옵니다.”

“들라 하라.”

양왕이 상기시킨 우선순위에 정선제도 동의했다. 그는 강왕과 허대실이 서북을 지키고 서로군을 격퇴한 사실을 떠올리더니 안색이 좀 누그러지며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강왕 전하와 허대실은 안으로 드시오!”

채결이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이어 밖에서도 어린 환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키가 8척이나 되는 건장하고 용맹스러운 두 사내가 갑옷 차림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소신, 황제 폐하를 알현하옵나이다.”

두 사람이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일어나거라!”

정선제는 옅은 미소를 짓더니 허대실에게 시선을 향했다. 마흔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이 사내는 작은 산처럼 보일 정도로 건장한 체격을 갖고 있고, 위로 치솟은 눈썹 아래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한눈에도 용맹한 장수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정선제는 기뻐했으나 눈빛에는 실망감도 묻어 있었다. 용맹스러운 장수이기는 하나 나이가 좀 많았다.

그러나 현재 대제는 장군이 부족했고, 그나마도 이미 나이가 많이 든 노장이 여럿인 판국이었다. 몇 안 되는 젊은 장군 중에서는 쓸 만한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이렇게 인재가 부족한 때에 허대실이라는 인물이 툭 튀어나온 것만으로도 정선제는 감지덕지했다. 뭘 더 바랄 수 있겠는가.

“일 년 동안 고생이 많았겠구나.”

정선제가 노고를 치하하는데 강왕이 ‘쿵’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더니 정선제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소신 황제 폐하의 은혜를 저버리고 서북을 지키지 못해 서로군이 사주沙州로 쳐들어가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용맹스러운 허대실이 아니었다면… 서북은 적에게 함락당하고 말았을 겁니다…….”

강왕은 그리 말하며 땅에 엎드리고 통곡했다.

분명 정선제는 서로군의 침입을 막지 못한 강왕을 책망해야 했지만, 현재 대제는 장수가 부족한 실정인 데다 강왕은 대대로 서북에 군대를 주둔시켜 온 구세력이라 뿌리가 깊었다. 설사 적당한 장군이 있다 하더라도 한순간에 그를 대체할 수는 없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정선제는 현 상황이 개탄스러울 따름이었다. 주씨 가문과 소씨 가문이 몰락한 후론 쓸 만한 장수를 찾는 일이 몹시도 어려워졌다. 풍씨 가문이 주씨 가문을 대신해 수도의 성문인 응성을 지키고 있긴 하지만 가까스로 응성을 지키는 것에 불과한 그저 그런 가문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강왕을 나무랄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는 허대실이라는 새로운 장군도 이렇게 데려오지 않았는가.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일은 장수에겐 늘 있는 일이니 앞으로 잘 지키면 될 일이다.”

“황송하옵니다. 폐하.”

정선제의 위로에 강왕은 감읍하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 서북을 지킬 수 있었던 건 전부 허대실의 공로 덕분이옵니다.”

그러고는 허대실이 어떻게 겹겹의 포위망을 뚫고 병사들을 이끌었는지, 또 어떻게 반격을 했는지 등을 들려 주었다. 정선제는 이야기를 듣고 싱글벙글 웃었고 허대실을 쳐다보며 그를 높이 평가했다. 풍 장군마저도 얼굴에 탄복하는 기색을 비쳤다.

“허대실은 앞으로 나와 명을 받들라.”

“예, 폐하!”

정선제의 말에 허대실은 얼른 바른 자세로 앉아 무릎을 꿇었다.

“허대실을 정3품 호위장군虎威將軍에 봉하며 기름진 논 천 경頃(전답의 단위, 시대에 따라 달라지나 대개 천 평 이상의 큰 규모를 뜻함)과 황금 백 냥, 호위장군부虎威將軍府를 하사하겠다.”

지금은 장수가 부족한 실정이니 자연히 작위와 하사품이 후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 폐하, 황은이 망극하옵나이다.”

허 장군은 고개를 조아리며 황제의 은혜에 감읍했다.

“그러나… 소신은 황금과 기름진 밭보다는 황제 폐하께서 소신의 형제를 위해 정의를 구현해 주시길 간청드리옵니다.”

대전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지금 이 허 장군이라는 사람이 뭐라고 했는가? 황금과 기름진 밭은 필요 없다고 했는가?

정선제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허 장군, 무슨 정의 구현을 하고 싶기에 짐에게 청을 하는 것이냐?”

“이 일은 황제 폐하께서도 이미 들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도성을 술렁이게 한 엽씨 가문 정실부인 은정랑 사건입니다.”

허 장군은 이 말을 꺼내면서 열이 확 받았다.

“음?”

정선제는 희끗희끗한 눈썹을 추켜세웠다. 그러잖아도 방금까지 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참 아닌가.

“안 그래도 어사들이 이 일로 한림원의 주운환을 탄핵하고 있었다.”

“황제 폐하, 은정랑은 소신 아우의 내자입니다.”

허 장군은 황제에게 사정을 상세히 고하기 시작했다.

“소신의 아우는 그동안 전쟁터에 나가 싸우며 늘 아내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우가 전쟁터에 나갔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아내가 이미 다른 사내의 사람이 되어 있던 겁니다.

남편이 죽었다고 생각한 아내가 재가를 하는 건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만, 어떻게 아우의 핏줄이 남의 가문에 입적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그 둘은 큰 죄를 지었습니다. 멀쩡한 정실부인을 쫓아내 버렸죠.”

“그게 무슨 터무니없는 말이오!”

어사 왕성촌이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소신들이 이미 조사하고 확인을 했습니다. 은정랑과 엽승덕은 분명 혼인 증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건 조작된 것이옵니다.”

“조작이라니? 어떤 수완 좋은 자가 상주常州와 호부户部가 모두 조작하도록 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주운환의 말에 왕성촌이 재차 목소리를 높였다.

“그건 본인들에게 직접 물으셔야지요.”

주운환은 살짝 조롱기 섞인 목소리로 받아쳤다.

“이런 생억지가 어디 있는가!”

왕성촌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혼인 증서가 있다는데 어떻게 조작한 거라고 말할 수 있는가? 자네는 지금 조작이라고 하는데 그럼 증거를 가져오시게.”

“맞소!”

호부상서戶部尙書도 어림 반 푼어치 없단 식으로 나왔다. 자신들이 어찌 그리 심각한 착오를 범할 수 있단 말인가?

정선제가 미간을 문지르며 엽학문을 찾았다.

“엽학문은 어디 있느냐? 어서 그자를 들이거라!”

그 말에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있던 주운환의 눈빛에 조롱기가 스쳤다. 이미 손을 써서 그를 다른 곳으로 보내 버린 후였다!

“황제 폐하, 비서소감은 지금 휴가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리 고하는 사부상서史部尙書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비서소감은 서적을 관리하는 한직이라 본래 휴가를 쉬이 쓸 수 있었으나 상황이 미묘했다.

정선제의 표정이 굳었다. 지금은 휴가를 보낼 때가 아니어도 한참 아니었기 때문이다.

“폐하, 집안일은 복잡해서 공정한 관료라도 시비를 가리기 어렵사옵니다. 허 장군의 아우가 살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차라리 그들더러 직접 해결하라고 하는 편이 낫습니다! 집안일을 분명하게 바로잡은 뒤 그들보고 확실하게 설명하라고 해야 이후의 일도 해결할 수 있사옵니다.”

공부상서工部尙書가 말했다. 그가 말하는 ‘이후의 일’이란 혼인 증서 조작의 진상을 밝히는 일을 뜻할 터였다.

“황제 폐하, 소신이 청을 드리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옵니다. 그저 소신이 아우를 뒷받침해 줄 수 있도록 해 주시옵소서. 후부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으면 되옵니다.”

“알겠다. 이 일은 우선 너희들이 직접 바로잡거라.”

정선제는 허 장군의 청을 받아들여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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