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280화 (280/858)

제280화

“아, 영교구나!”

엽학문의 누이는 엽영교를 보더니 미소를 지었고 엽영교의 큰언니와 둘째 언니도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엽영교는 엽학문의 누이 곁에 앉으며 말했다.

“고모님, 내일 비주로 돌아가시는 거죠?”

“그래!”

엽학문의 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저희 아버지가 고모님을 모셔다드리는 건가요? 두 분 오랜만에 만나셨잖아요.”

엽학문의 누이는 엽영교의 말을 듣더니 좋은 생각이라고 느껴져 고갯짓하며 동조했다.

“그래! 네 아버지에게 배웅해 달라고 해야겠구나. 가서 네 아버지를 불러오너라.”

엽영교는 두 눈을 살짝 깜빡이더니 기쁜 얼굴로 뛰어나갔다.

잠시 후, 그녀는 엽학문을 데리고 돌아왔다. 엽학문은 누이 곁에 앉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님, 부르셨어요?”

“내일 비주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러니 네가 날 배웅해 주거라! 오랜만에 다시 만나 벌써 헤어지자니 아쉽다만, 내가 이곳에서 잠을 제대로 못 자니 비주로 슬슬 돌아가야 할 것 같다. 네가 날 배웅해 주면 우리 남매가 가는 길에 이야기를 더 나눌 수 있잖니.”

“예? 배웅이요?”

엽학문은 뜻밖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도성에서 비주까지 가려면 사흘이나 걸리니 왕복이 결코 짧은 여정이 아니었다. 엽학문은 좀 달갑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전 조정에 나가 황제 폐하를 뵈어야 하잖습니까. 게다가 이런 노쇠한 몸으로 마차를 그리 오래 타면 몸이 견디질 못할 거예요.”

거절에 엽학문의 누이는 마음이 상했는지 성난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노쇠한 몸으로는 못 견딘다고 했느냐! 그럼 난 젊고 기운이 넘치느냐? 난 칠십이 넘었는데도 네 한마디에 이 노구老軀를 이끌고 그 먼 길을 달려왔다. 그런데 지금 너에게 배웅이나 좀 해 달라고 했더니 넌 이런저런 핑계를 대가며 피하려고 하는구나. 흑…….”

엽학문의 누이는 속이 많이 상했는지 눈물까지 보였다.

“아유, 누님. 왜 우시는 거예요?”

엽학문은 깜짝 놀랐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이쪽을 쳐다보자 얼른 그녀를 위로했다.

“알겠어요, 누님. 제가 내일 비주로 바래다 드릴게요.”

엽학문의 누이는 동생이 아직도 자신을 챙긴다는 생각이 들자 홀가분한 마음으로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엽영교는 그 모습을 보더니 입꼬리를 쓱 올리며 미소를 지었고, 이내 옥패를 불러 엽연채에게 소식을 전달하게 했다.

사람들은 하루 종일 떠들썩하게 즐기고 나서야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장씨 사람들이 귀가할 때 손씨도 장씨 가문으로 되돌아갔다.

삼월 초이튿날에 아이를 낳은 엽이채는 출산한 지 아직 한 달도 되지 않아 여전히 몸조리 중이었다. 그래도 온씨의 소식을 듣고 답답했던 속은 좀 풀린 후였다.

“마님이 오셨습니다.”

엽이채가 침상에서 자신의 아들과 놀아주고 있을 때, 밖에서 류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채야, 어디 내 손자 좀 보여 다오.”

손씨는 안으로 들어오더니 엽이채의 아들부터 품에 안았다.

“어머니, 그 혼례식은 어떻게 되었어요?”

엽이채가 조급함을 드러내며 물었다. 몸조리 중만 아니었다면 반드시 엽승덕의 혼례식에 참석했을 터였다. 체면이 바닥에 떨어진 엽연채가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두 눈으로 직접 지켜보기 위해서 말이다.

“어떻게 되긴 뭘. 무슨 공주를 아내로 들이는 양 성대하게 치렀단다.”

손씨는 화가 치밀어 올라 씩씩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엽이채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다 인과응보죠!”

“넌 웃음이 나오느냐? 허서 그 사생아 놈이 정안후부로 들어왔다. 적장자로 말이야. 그래서 영이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게 되었단 말이다.”

손씨가 성이 난 목소리로 딸을 나무랐다. 그러나 엽이채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자신은 지금 엽연채가 죽도록 미워 그저 그녀가 재수 없는 꼴을 당하는 걸 보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야만 속이 아주 후련해질 것이었다.

* * *

그 시각, 장명가에 위치한 추씨 가문 저택.

엽연채는 탁자 앞에 몸을 숙인 채 수본繡本을 그리고 있었고, 추길과 혜연은 곁에서 그녀를 도와주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옥패가 도착했다.

“큰아가씨, 큰아가씨의 부탁대로 저희 아가씨께서 고모님을 부추겨서 내일 후야께서 비주로 가시게 됐습니다. 적어도 일주일 동안은 돌아오지 못하실 거예요.”

엽연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되었구나. 고모한테 감사하다고 전해 드리거라.”

“큰아가씨, 대체 뭘 하시려는 거예요?”

옥패는 초조한 마음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물었다.

“세자야와 그 첩실에게 복수하시는 거예요?”

“두고 봐라. 좀 있으면 재미있는 구경을 하게 될 거다. 참, 혼례식은 어떻게 되었느냐?”

옥패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아주 떠들썩했어요. 작년 둘째 아씨 혼례식 때보다 더 성대한 분위기였어요. 모르는 사람들은 세자야께서 선녀를 아내로 맞이하시는 줄 알겠더라고요! 그래 봐야 좀 곱상하게 생긴 중년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뿐인데, 저희가 다 부끄러웠어요.”

옥패가 말을 마치고 떠나자 추길이 안달복달하며 말문을 열었다.

“아가씨, 오늘 손님들도 많았는데 어째서 허대실이 가서 소란을 피우지 못하게 하신 거예요? 허서가 허대실의 친아들인 것만 확인되면 후야께서 은정랑과 엽승덕을 바로 내쫓으실 텐데요.”

엽연채는 냉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면 너무 간단하게 끝나지 않느냐? 혼례식도 떠들썩하게 치러졌고 허서도 입적할 때 아주 기뻐했겠지. 그것들이 그 자리에 제대로 앉았을 때 공격할 거다.”

“그 사람들이 혼인한 뒤를 말씀하시는 거죠?”

“그런데 어째서 후야를 다른 데로 보내시려는 거예요? 후야께서 모르게 하시려고요?”

추길의 물음에 엽연채가 ‘허’ 하고 헛웃음을 쳤다.

“하루 그래 가지고 짜릿한 기분이 들겠니? 며칠은 해야 사람들의 관심도 끌고 박수갈채도 받지. 음, 다 됐구나. 가서 어머니께 드리거라!”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붓을 내려놓고 자신이 그린 수본을 집어 들었는데, 수본에는 수선화가 한가득이었다.

* * *

이튿날 아침, 엽연채가 아직 꿈나라에 있는데 밖에서 누군가가 대문을 격렬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작은마님, 큰아가씨. 오늘 마님께서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실 겁니다. 그러니 작은마님과 큰아가씨께서도 어서 돌아오셔서 마님께 차를 올리세요.”

진 마마는 득의양양하게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그러자 지나가던 백성들이 그 주위로 몰려들었고 이어 엽연채와 온씨를 조롱하고 욕하는 소리가 간간이 곁들여졌다. 진 마마는 한 차례 더 문을 두드렸으나 안에서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콧방귀를 뀌고는 정안후부로 돌아갔다.

진 마마가 영귀원으로 들어가니 은정랑이 화장대 앞에 앉아 머리를 빗고 있었다.

“그쪽에선 아직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목을 움츠린 거북이처럼 겁을 먹었던데요.”

“급할 게 뭐가 있는가? 언젠가는 내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걸.”

은정랑은 조그만 붉은 입술을 씩 올리며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뒤에 서 있는 여종은 그녀에게 올림머리를 해 준 뒤 홍옥 장신구를 꽂아 주었고, 치장을 마친 은정랑은 큰 방으로 가서 친척들을 만났다.

은정랑이 친척들과 인사를 나눈 후 엽학문은 채비를 마치고 누이와 함께 마차에 올라 정안후부를 떠났다. 은정랑과 허서, 엽승덕이 대문 앞까지 그들을 배웅해 주었다.

그런데 이때, 밖에서 어린아이들이 환호를 지르며 뛰어왔다.

“와아아! 얼른 저기 좀 봐봐! 강왕 전하께서 도성으로 들어오고 계셔! 대장군님도 들어오고 계시네!”

그 소리에 은정랑과 허서, 엽승덕은 깜짝 놀라며 먼 곳을 쳐다봤다. 백성들은 이미 그곳을 에워싸고 있었고, 가운데 갑옷과 전포戰袍를 입은 존귀해 보이는 한 사십 대 사내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말을 타고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기마병들이 줄지어 따라가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싸고 구경을 하고 있던 사람들 중 누군가가 갑자기 이렇게 소리쳤다.

“허 장군님이다! 저분이 허 장군님 맞지! 정말 늠름하게 생기셨네!”

허 장군은 그 이야기를 듣더니 고개를 돌려 히죽 웃어 보였다.

‘역시 다른 허대실이구나!’

진짜 허 장군을 본 은정랑과 허서는 안도의 한숨을 훅 내쉬었고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간 마음을 진정시킨 은정랑 모자는 허대실이 그 소목이라는 사람과 짜고 자신들을 떠본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길바닥에 쓰러졌던 사내가 어떻게 감쪽같이 사라졌겠는가! 두 사람은 생각할수록 점점 더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오늘 마침내 말로만 듣던 허 장군의 모습을 보게 되었고 그제야 두 사람은 완전히 한시름을 놓게 되었다. 둘 다 건장한 체격의 사십 대 사내이고 덥수룩한 수염도 가지고 있었지만 생긴 건 완전 딴판이었다.

모자는 역시나 자신들이 옳은 선택을 했다며 마음을 놓은 반면, 엽승덕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날 밤 허서는 허대실이 장군이라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어째서 아닌 걸까?

‘설마 허대실이 장군이 아닌 걸 알고서 나에게 되돌아온 걸까?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정랑은 날 사랑해서 돌아왔을 것이다.’

“가요. 나리께서 가장 좋아하는 도화갱桃花羹(찹쌀, 우유, 흰 설탕을 넣고 끓인 뒤 복숭아꽃으로 장식한 음식)을 끓여 드릴게요.”

은정랑이 엽승덕에게 다가가 팔짱을 꽉 끼며 말했다.

“그럽시다.”

엽승덕은 이렇게 다정하게 저를 챙기는 은정랑을 보니 다시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

그들이 집 안으로 들어가자 대문은 굳게 잠겼고 강왕은 부하들을 이끌고 천천히 궁문으로 향했다.

오늘이 되어서야 정선제는 몸이 회복되었다. 지금까지 게을러 본 적이 없는 그는 몸이 회복되자 바로 정무를 보기 위해 조정에 나갔다. 그런데 옥좌에 눈보라가 몰아치기라도 한 듯이 한 무더기의 탄핵 상소문이 쌓여 있을 줄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정선제는 입꼬리를 씰룩이더니 아래에 두 줄로 나눠 서 있는 신하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양왕이 또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이냐?”

이 엄청난 양의 상소로 지탄받을 이가 양왕밖에 더 있는가!

“아바마마, 소자는 억울합니다. 소자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양왕이 ‘허허’ 웃으며 부정했으나 정선제가 그 말을 믿지 않고 입을 열려는 찰나, 제일 과격하고 편파적으로 행동해 온 어사 왕성촌이 나섰다.

“황제 폐하. 소신들이 탄핵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번 과거 시험에서 장원 급제를 한 주운환입니다.”

“아?”

정선제는 그 말에 어리둥절해하며 주운환의 화려하고 준수한 얼굴을 떠올렸다. 운하 공주를 꼭 닮은 그는 재능이 넘치고 정치적 식견이 뛰어나 자신이 눈여겨보고 있는 유망주였는데, 어떻게 벌써 탄핵을 받았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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