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9화
주운환의 눈빛에 그를 낮잡아 보는 듯한 옅은 비웃음이 비쳤다. 주운환이 차를 한 모금 홀짝일 뿐 아무 대꾸가 없자 주 백야는 더욱 초조해했다.
“너는 어린 나이에 장원 급제자가 되었으니 모두의 질투를 받고 있다. 그런데 신중을 기해도 모자랄 판에 이리 조심성 없이 굴면 사람들이 모두 널 오만하다고 욕할 것이다! 자신의 재능만 믿고 오만하게 구는 자의 말로는 늘…….”
주 백야는 안달이 나 금방이라도 눈이 벌겋게 변할 것만 같았다.
“지금 황제 폐하께서 옥체가 미령하시어 며칠 동안 조회에 나오지 않으시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너를 탄핵하라는 상소문이 눈보라 몰아치듯 황제 폐하의 탁자 위에 쌓였을 게다! 사람들이 하나같이 어사들이 준비해 놓은 상소가 작년 양왕 사건이 터졌을 때를 능가할 지경이라고 하더구나.”
여기까지 말한 주 백야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런 딱한 모습의 주 백야를 보고 있으니 옆에 있던 여양과 여한도 절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려는 찰나. 주운환은 생뚱맞은 말을 입에 담았다.
“아버지, 배고프지 않으십니까? 식사나 하시죠.”
그 말에 주 백야는 말문이 막혔고 순간 뱃속이 꽉 차 버린 기분이었다. 내일도 모레도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될 성싶은 그런 답답한 심정으로 말이다!
주 백야는 노파심에 계속해서 충고의 말을 건넸으나 주운환은 그저 차만 마시며 무덤덤한 표정으로 간간이 ‘네’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주 백야는 이제 무슨 말을 더 해야 좋을지 이렇다 할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엽연채는 하인을 시켜 식사를 준비했다. 요리가 준비되자 주 백야와 진씨 등을 불러 함께 식사한 뒤 그들을 돌려보냈다.
* * *
한림원. 편찬직을 맡은 주운환은 조정에 나가 황제를 뵙지 않아도 됐고, 매일 아침이 되면 한림원에서 일거리를 받았다. 그런데 요 며칠 동안 그를 쳐다보는 동료들의 눈빛엔 갖가지 조롱이 담겨 있었다. 하나 주운환은 이를 전혀 개의치 않고 그저 자신의 일에만 집중했다.
“들어 보니 요 며칠간 어사들이 무려 백여덟 장의 상소를 쌓아 놓았다고 하더군. 그 안에 적힌 자네의 죄가 이백 가지가 된다고 들었어.”
탐화인 진지항이 다가와 소식을 전해 주었으나 주운환은 ‘아’ 하더니 미소를 지어 보일 따름이었다.
“전 극단적으로 몰아붙이는 걸 좋아합니다.”
그 말에 진지항은 입을 삐죽거렸다. 더 이상 그를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삼월 스무날이 되었다. 은정랑과 엽승덕의 혼례식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이날, 정안후부의 정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중요한 손님들이 잇따라 정안후부를 방문했다. 엽승덕의 초혼 때보다 훨씬 성대한 모습이었다.
엽학문은 처음엔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다. 초혼도 아니고 또 은정랑이 나이도 많지 않은가. 그러나 엽승덕이 성대한 혼례식을 고집하자 엽학문은 자신의 손자를 생각해 그의 뜻에 따라 주었다.
본채. 엽학문과 묘씨가 상석인 태사의에 앉아 있었고, 싱글벙글 웃는 낯의 손님들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엽영교와 엽미채는 구석에 박혀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는 중이었다.
“이것 좀 봐라. 천박한 여편네 하나를 집안으로 들이는 것뿐인데 이렇게 성대한 혼례식을 치를 줄은 몰랐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여인이 처녀가 타는 꽃가마를 타다니?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엽영교가 작은 목소리로 욕했다.
“그러게요. 지난번 큰언니와 둘째 언니의 혼례식보다 더 성대하네요! 그때 둘째 숙부네가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혼례식에 엄청 공을 들였잖아요. 그런데 이번 혼례식에 참석한 하객들이 그때보다도 더 많아요.”
엽미채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의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고 기분도 엉망진창이었다.
적모, 적장녀와 아주 잘 지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적모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버릴 줄이야. 게다가 새로운 적모는 한눈에도 착한 부류와는 거리가 먼 성싶었다. 그러니 엽미채의 마음은 초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시끌벅적하고 붐빌 수밖에! 전에는 초대장 하나를 보내면 한 집에서 기껏해야 서너 명이 왔을 텐데 이번엔 초대장 하나를 보냈더니 한 집에서 열 명이 넘는 식구가 총출동했어!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이런 괴상한 일이 벌어졌으니 다들 와서 구경을 하고 싶은 게지.”
“어찌 됐든 간에 지금… 저 사람의 체면을 세워 주고 있는 셈이네요.”
엽영교의 냉소 서린 말에 엽미채가 손수건을 꽉 비틀며 대꾸했다.
“고모, 이제 앞으로 어떡하죠…….”
“걱정 붙들어 매거라!”
엽영교는 ‘풉’ 하고 웃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연채가 나한테 너랑 이곳에 모여 떠들썩하게 즐기고 있으라고 하더라. 이 혼례식이 요란하게 치러질수록 나중에 더욱더 수치스러울 거라고 했어. 며칠 후에 재미난 볼거리가 있을 거라면서 말이야!
우리보고는 작은 걸상과 해바라기씨를 준비해 놓으라고 했단다. 때가 되면 씨앗을 까먹으며 재미난 구경거리를 보라 이거지!”
“정말요?”
엽미채는 기대감에 두 눈을 반짝였다.
“네 큰언니가 누구냐. 그 쌈닭이 언제 손해를 본 적이 있더냐?”
엽영교의 말이 아주 그럴싸해 엽미채는 마음을 조금 놓았다. 엽이채 일만 봐도 그랬다. 전에는 아주 기세등등했는데 지금은 기가 팍 꺾여 버리지 않았는가.
“축하드립니다.”
이때, 장씨 가문 사람들이 안내를 받으며 문으로 들어섰다. 장박원과 장굉, 맹씨까지 모두 혼례식에 참석했다.
주씨 가문과 마찬가지로 엽씨 가문 시댁인 장씨 가문은 주운환이 향시에 급제한 후로 주씨 가문과 은근히 경쟁을 해 왔다. 주운환이 장원 급제를 하자 장씨 가문 사람들은 속에서 천불이 났는데, 지금 엽연채와 온씨가 은정랑에게 크게 당하고도 어디 가서 하소연할 수도 없게 되자 장씨 가문 사람들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장박원은 전보다 훨씬 야위었고 볼이 살짝 들어가 있었다. 여전히 준수한 외모이긴 했지만 소년 수재였을 적의 멋스럽고 시원스러운 느낌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유독 생기가 흘러넘치고 두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장박원은 성큼성큼 엽학문 곁으로 걸어가 말을 건넸다.
“할아버님, 처형과 형님은 어째서 오시지 않은 겁니까? 오늘은 백모께서 정안후부로 들어오시는 경사스러운 날이 아닙니까!”
엽학문은 엽연채 부부 이야기에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주운환이 장원 급제자라는 점이 신경 쓰여 낮은 목소리로 적당히 무마하고 말았다.
“됐다. 오늘은 일단 이렇게 하자꾸나.”
“신랑이 신부를 맞이해 돌아왔습니다!”
이때, 밖에서 떠들썩한 환호성이 울려 퍼졌고 이어 혼례식 때 연주되는 음악 소리와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신랑 예복을 입은 엽승덕이 봉관을 쓰고 고운 수를 놓은 하피를 걸친 여인을 데리고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엽승덕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씽긋삥긋 웃고 있었다.
장박원은 엽승덕의 희희낙락하는 모습을 보니 갑자기 자신이 엽이채를 아내로 맞이하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 자신도 이렇게 싱글벙글 웃으며 뜻이 이루어져 득의만만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자 장박원은 고개를 힘껏 가로저었다. 아니다, 잠시 운수가 사나울 뿐이다. 백부와 정랑은 분명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행복하면 할수록 엽연채와 주운환은 더욱 괴롭고 고통스러울 테니 자신도 더욱 기쁠 것이다.
‘엽연채와 주운환 이 빌어먹을 부부는 오늘부터 재수 옴 붙은 나날을 보낼 거다!’
장박원이 이리 저주하는 사이, 엽승덕과 은정랑은 방 중앙에 섰다. 혼례식의 사의司仪(결혼식에서 사회를 보는 사람)가 신랑 신부에게 천지신명과 부모님 등 웃어른들께 절을 올리라고 외쳤다. 두 남녀가 차례로 절을 올렸고 이어 둘은 신방으로 들어갔다.
영귀원의 침실은 새롭게 꾸며져 있었고 곳곳엔 진홍색 ‘쌍희雙喜’가 붙어 있었다. 엽승덕은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신부의 머리에 덮어씌운 붉은 천을 걷어 올렸고, 곱고 아리따운 은정랑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그렇게 오랫동안 노력한 끝에 마침내 소망을 이룬 것이다. 은정랑이 정실부인으로서 예를 올리고 정안후부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불현듯 엽승덕의 머릿속에 그날 그녀가 허대실과 떠났던 장면이 떠오르며 속이 편치만은 않아졌다.
하지만 이내 엽승덕의 의지는 더욱 굳건해졌다. 그건 자신들에게 주어진 시련이었다. 아름다운 사랑엔 늘 이런 시련이 따라오는 법이니 말이다. 기분이 좀 찝찝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는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다독였다.
엽승덕은 은정랑과 합환주合歡酒(전통 혼례식에서 신랑 신부가 서로 잔을 바꾸어 마시는 술)를 마신 후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눈 뒤 밖으로 나갔다. 은정랑은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의 마음에 앙금이 남게 되었으니 앞으로 더더욱 잘해서 그 마음속 앙금을 씻어 내야 했다.
엽승덕이 밖으로 나간 후 허서도 정안후부로 들어왔다. 사람들은 우르르 조상을 모시는 사당으로 향했고 여섯째 증조부가 의례를 주관했다. 허서는 그렇게 엽씨 가문 족보에 올랐고, 성을 엽씨로 바꿨으며, 정실부인이 낳은 적자의 신분으로 족보에 기록되었다.
엽씨 가문 조상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허서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았다. 그날 허대실을 찾으러 돌아갔을 때 어찌 된 일인지 오금에서 갑자기 시큰한 통증이 느껴지더니 산비탈 아래로 굴러떨어져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허대실은 이미 자취를 감춘 후였다.
이후 허서는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혹시라도 허대실이 갑자기 나타나 어머니의 혼례식을 망치고 자신의 입적에 훼방을 놓을까 봐 몹시도 두려웠다. 그런데 오늘까지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겁을 집어먹어 이곳에 올 엄두를 내지 못하는 걸까? 아님 사고라도 나서 세상을 뜬 걸까? 뭐가 됐든 간에 그 사람은 반드시 없어져야만 했다!
그리고 허대실이 돌아와서 소란을 피우지만 않으면, 자신은 반드시 방법을 강구해 엽연채와 온씨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차를 올리도록 할 것이었다.
* * *
한편, 하객들은 모두 대청으로 돌아와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밖에서는 덕명반에서 불러온 배우들이 공연을 하고 있었다. 흥겹고 떠들썩하기 그지없는 분위기였다.
엽학문의 누이와 엽영교의 큰언니 등은 기둥 근처에 차려진 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무대 위 배우들의 공연을 보며 즐거운지 껄껄거리며 웃어댔다. 이때 엽영교가 미소를 지으며 그들 곁으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고모님. 큰언니, 둘째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