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8화
주운환은 붉은 입술을 씩 올리며 그들을 얕보는 듯한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기다란 속눈썹을 아래로 드리웠다. 손에 든 넓고 얕은 술잔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부부의 연을 깨뜨리면 벌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이 녀석아, 허파에 바람이라도 든 게냐!”
허 장군은 ‘흥’ 콧방귀를 뀌더니 바로 반박에 나섰다.
“그 쫓겨났다는 분이 네 장모님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그런데 어찌 그 악독한 여편네가 처갓집으로 들어가게 하려는 것이냐?”
전공을 세운 허 장군이 강왕을 따라 도성으로 돌아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강왕이 뜻밖에도 자신에게 의형제나 다름없는 허대실도 함께 데려오겠다고 하니 허 장군은 당연히 기쁠 따름이었다.
그런데 막상 도성으로 돌아와 보니 황제가 와병 중이라 만나 뵐 수가 없었다. 도성을 지키는 병사들이 지내는 병영에 잠시 머무르는 중에 강왕이 자신들에게 주운환을 소개해 주었다.
당시 주운환은 이렇게 말했다.
“은정랑이라는 여인이 두 분 중 어느 분의 아내인가요? 그 사람이 곧 아들을 데리고 정안후부로 시집가 정실부인이 되고 그 아들은 적자가 될 겁니다. 그러니 어서 집으로 데려가시지요.”
그러면서 주운환은 자신의 신분을 소개했다. 자신은 정국백부 사람이며 이번 과거 시험에서 장원 급제를 했고, 자신의 장모가 바로 은정랑에게 모해당한 그 정실부인이라고 말이다.
이를 듣고 두 허대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기에 직접 나서서 그런 일을 처리하는 모양이었다.
자기소개를 마친 주운환은 또 이런 말을 덧붙였다.
“장군님이시라면 분명 데리고 돌아가실 수 있을 테지만, 그냥 허씨 성을 가진 분이면 아마 데려가지 못하실 겁니다.”
당시 허 장군은 주운환의 생각에 완전히 동의했다.
“그때 전쟁을 치른 후 겨우 마을로 돌아가 소식을 알렸더니, 자네 내자는 바로 자네의 옷을 묻은 무덤을 만들어 어머니를 화병으로 돌아가시게 했네. 딱 봐도 좋은 여인은 아닐세.”
그러나 허대실은 믿을 수가 없었는지 기어코 그들을 시험해 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가히 짐작한 대로였다. 지금 이렇게 여기에 누워 있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 그 개만도 못한 남녀를 이어 줘야 한다니? 주운환의 말에 허 장군과 허대실은 낯빛이 변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주운환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한곳에 다 모였을 때 걷어차 버려야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주운환은 이어 작은 목소리로 자신들의 계획을 털어놓았고, 이야기를 들은 허 장군은 감탄하며 동조했다.
“과연 배운 사람일세. 무척 지독하구먼! 그래, 난 마음에 쏙 드네!”
주운환은 허 장군, 허대실과 이야기를 마친 후 말을 타고 도성으로 돌아갔다.
* * *
엽연채와 온씨는 여전히 추씨 가문에서 지내고 있었다. 추길과 채 마마는 방에서 구럭을 뜨며 모녀 곁에서 안절부절못했다. 은정랑과 엽승덕의 혼례식이 이제 사흘 남은 데다 밖에 그 소문이 파다하게 펴졌기 때문이다.
“아씨, 주씨 가문 마님께서 오셨습니다.”
추씨 가문 여종 하나가 갑자기 안으로 들어와 말했다. 그녀가 소식을 전하는 사이, 밖에서 ‘아이고’ 소리가 울려 퍼지나 싶더니 진씨, 주 백야, 강심설, 주묘서가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그 모습에 엽연채는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결국 왔구나!’
진씨는 온씨가 정실부인에서 평처가 되었고 화가 난 그녀가 첩으로서 예를 올리지 않기 위해 추씨 가문으로 피했다는 이야기를 진작에 들었다. 그녀는 기쁜 나머지 폭소를 터뜨렸고, 엽연채가 하루빨리 돌아오길 고대했다.
그런데 엽연채가 온씨 곁에 있어 줘야 한다는 핑계로 계속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진씨는 조롱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으니 분하고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견딜 수가 없던 참에 오늘 정안후부에서 주씨 가문으로 보낸 청첩장을 받았다. 그래서 그 핑계로 함께 이곳으로 온 길이었다.
진씨는 걸어 들어오며 입을 열었다.
“안사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에휴, 정말… 하늘이 사람을 갖고 놀아도 유분수인데 말이죠.”
온씨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얼른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연채가 요 며칠 동안 이곳에서 지내고 있어 안사돈 보기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다 한 가족 아닙니까? 이런 때 당연히 새아기가 안사돈 곁에 있어 드려야죠.”
진씨는 그리 말하며 짐짓 나무라는 눈빛으로 엽연채를 쏘아보았다.
“안사돈을 모시고 나왔을 때 어째서 집으로 모셔 오지 않은 게냐?”
‘집으로 모셔 가면 우리 어머니가 당신 웃음거리가 될 텐데? 아, 매일 찾아와서 조롱하려고?’
엽연채는 눈의 흰자위를 번득이며 ‘하하’ 웃고는 이렇게 대꾸했다.
“어머니가 전에도 한동안 큰이모댁에서 지내셨거든요. 이곳엔 늘 방이 남는 데다 저희 외할머니도 이곳에 계시고요. 여기 머무르시는 게 더 편하실 테니 그리했습니다.”
“확실히 이곳이 더 편하시겠지.”
주 백야가 얼른 말을 건넸다. 그는 진씨가 온씨를 집으로 데려가겠다는 말을 할까 봐 얼굴에서 식은땀이 다 흘렀다. 온씨는 지금 뜨거운 감자인데 무엇 하러 집으로 들이려 한단 말인가.
추길과 채 마마는 의자와 수돈을 가져왔고, 진씨와 주 백야 등이 자리에 앉자 혜연이 차를 내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진씨는 아까 했던 말을 또 꺼냈다.
“정말이지 세상사는 예측하기 어렵네요! 그런데 사실 또 생각해 보면 별일 아니랍니다. 셋째는 본래 서자이니 새아기가 평처의 여식이든 서녀이든 간에 셋째와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이랍니다.”
그 말에 추길과 채 마마는 안색이 변했다.
“제가 ‘셋째 도련님이 어떻게 갑자기 적녀를 아내로 맞이했을까.’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는데……. 알고 보니 그랬던 거죠. 과연 짚신도 제짝이 있는 법이네요.”
강심설도 때를 놓치지 않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엽연채를 쳐다보며 입을 놀렸다. 그녀의 눈엔 조롱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엽연채가 서녀라고 비웃고 있는 것이었다.
“맞아요. 짚신도 제짝이 있는 법인데, 제 부군은 장원 급제를 하셨죠.”
그러나 엽연채는 화를 내기는커녕 붉은 입술을 씩 올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말은 자신은 장원 급제자에게 어울리는 짝이라는 이야기 아닌가? 강심설은 속이 뒤집혔고 다시 그 불쾌한 감정을 되돌려 주기 위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참, 오늘 정안후부에서 보낸 청첩장을 받았습니다. 사흘 후에 정실부인인 은정랑을 내자로 맞이해 정안후부로 들인다고 적혀 있더군요. 그날 안사돈께서도 집으로 돌아가셔야겠어요. 어쨌든 그분이 정실부인이니까요!”
“그 말이 맞다.”
진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엽연채 등이 언짢아하는 모습을 보자 아주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안사돈께서 언짢으시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셋째와 새아기를 생각하셔야죠!”
진씨의 이 말에 그러잖아도 창백했던 온씨의 낯빛이 더욱 새파래졌다. 사위가 관직이 없는 사람이면 모를까, 하필 그는 이번 과거 시험에서 장원 급제를 했고 지금은 그가 평판을 가장 신경 써야 하는 시기였다.
“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이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주운환이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진씨는 주운환을 보더니 대번에 표정이 안 좋아졌다. 특히 그의 차분한 태도가 눈에 거슬렸다. 재능이 뛰어나 보이는 얼굴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 장원 급제자에게선 이전의 보잘것없던 서자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셋째가 왔구나!”
주 백야는 주운환을 보더니 그제야 한시름을 놓았다. 그러나 주운환은 그를 상대하지도 않고 온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모님, 저희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장모님 마음이 편한 대로 하시면 충분하지요.”
그 말에 온씨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지금도 머리가 아프세요?”
엽연채가 갑자기 온씨를 부축하며 물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진씨 등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머님, 저희 어머니께서 방금 전에 또 두통이 나서 쉬시려고 하던 참이었어요. 어머님은 추씨 가문에 와 본 적이 없으시니 제가 어머님을 모시고 이곳저곳 둘러보며 구경시켜 드릴게요!”
그 말에 진씨의 표정이 한층 굳었다. 그러나 엽연채가 이리 권했는데 안 갈 수가 없어 그녀는 별수 없이 허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꾸나. 조금 뒤에 다시 와서 안사돈과 이야기를 나누면 되니 말이다.”
채 마마는 온씨를 부축해 침실로 들어갔고 진씨는 강심설을 데리고 엽연채와 함께 밖으로 향했다. 방 안에는 주 백야 부자만 남게 되었다.
주 백야가 얼른 주운환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네가 요 며칠 동안 매일같이 일찍 나갔다가 늦게 귀가하는 바람에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
“네, 아버지. 그럼 오늘 이곳에서 함께 식사를 하시죠.”
“그래!”
주운환이 자리에 앉으며 이리 대꾸하자 주 백야는 기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나 이내 표정이 굳어서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지! 내 말은 그게 아니다! 게다가 식사를 한다 해도 너희들이 집으로 돌아와 식사를 해야지.”
“네. 며칠 후면 집으로 돌아갈 겁니다.”
“그럼 됐다.”
주운환의 말에 주 백야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표정이 굳었다.
“그게 아니라! 내가 이곳에 온 건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란다.”
“말씀하세요.”
“셋째야, 지금 네가 하고 있는 행동이 너무 상식 밖이지 않느냐?”
주 백야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며 본론을 꺼냈다.
“지금 네 장모가 갑자기 평처가 되고 내자의 신분도 예전만 못해 네 속이 편치 않을 거란 걸 나도 알고 있다.”
“네. 정말로 편치 않습니다.”
주운환은 그리 말하며 싸늘한 눈빛을 번득였다. 그 파렴치하고 천박한 모자가 감히 엽연채를 이렇게 괴롭히고 있단 사실이 몹시 심기에 거슬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리해서는 안 된다! 네가 네 장모를 모시고 나온 뒤 이곳에 숨겨 두고 있으니 지금 사람들이 뭐라고 이야기하는 줄 아느냐?”
주 백야는 그리 말하며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다들 그 은씨가 원래 정실부인이었는데 그동안 억울하게 지내다가 드디어 정실부인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고 떠들고 있단다. 그런데 네 장모가 도저히 그 수모를 견딜 수 없어 밖으로 피해 있고 정실부인에게 첩으로서 예를 올리려고 하지 않으니 이 얼마나 불경스러운 일이냐고 하더구나!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업신여긴다는 게지. 그러면서 너도 같이 욕하고 있단 말이다.
이번 과거 시험의 장원 급제자인 너는 성현의 글을 읽는 사람 아니냐. 심지어 이번 시험을 본 문인과 재자들 중 최고로 우수한 자이면서 장모를 설득해 집으로 돌려보내기는커녕 오히려 잘못된 행동을 도우며 부추기고 있다며, 공맹지도孔孟之道에 어긋나는 행동을 저지른다고 널 비난하고 있다! 에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