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277화 (277/858)

제277화

허서는 허대실이 마차에서 떨어져 말에 밟혀 죽지 않을 줄은, 하다못해 기절하여 쓰러지지도 않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자 허서는 놀라서 손을 덜덜 떨었다.

자신이 사람을 죽이려고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고, 게다가 이 사람은 그가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정말 자신의 친아버지였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허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모욕감이 들었다.

‘친아버지가 말이나 씻기고 말똥이나 치우는 천한 마부라니! 세상에! 동문들이 알게 되기라도 하면 분명 날 맘껏 비웃어 댈 거다!’

이제야 비로소 후부의 적자 자리에 앉아 며칠 동안 그 영광을 누리며 떵떵거리고 다녔는데, 어찌 쏟아지는 조롱과 모욕 속에 다시 잠길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그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았다.

‘아니다. 내가 왜 죽어야 한단 말인가! 왜! 나는 거인擧人이 된 소년이며 학식도 있고 글재주도 있어 전도가 유망하다. 그런 내가 왜 죽어야 한단 말인가! 죽어야 하는 건 이 뻔뻔스러운 마부다!’

허서는 고함을 내지르더니 도자기를 들고 다시 그를 냅다 내려치려고 했다.

“으아악! 죽어! 죽어 버려!”

허대실은 허서의 흉악한 표정을 보고 기겁했다. 아들이 지금 아버지를 살해하려는 것이었다. 허대실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찌 됐든 허대실도 십여 년을 병졸로 지냈던 사람이었다. 그러니 어디 이런 닭 한 마리 붙들어 맬 힘도 없는 녀석에게 손쉽게 당하겠는가. 그는 허서의 손을 움켜잡고 말했다.

“서야, 너 지금 뭐 하는 짓이냐? 난 네 친아버지다! 그런데 날 죽이려고 하는 것이냐? 지금 내가 가난한 게 못마땅해 이러는 게냐?”

여기까지 말하자 그는 마음이 아프면서도 울분이 치밀었다.

허서는 속마음을 들켜 당황했다. 실제 그런 이유이긴 하지만 어찌 됐든 자신은 고결한 학자였다. 그런데 면전에 대고 가난한 자는 업신여기고 부자는 좋아한다고 말하니 어디 참을 수 있겠는가?

허서는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화가 나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그는 횡설수설하며 큰소리를 쳤다.

“친아버지면서 왜 우리 앞을 가로막아요? 친아버지면서 내가 곧 후부의 적자가 된다는 걸 똑똑히 알면서 왜 찾아와 우리 앞날을 망쳐 버렸냐고요! 아버지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난 지금 후부의 적자였을 겁니다! 어머니는 후부의 정실부인이고요!!”

“너 이놈!”

허대실은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가 허서를 밀쳐 내려는 찰나, 갑자기 어깨에서 쿡쿡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허대실이 ‘악’ 하고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보니 은정랑이 머리꽂이를 들고 그의 어깨를 찌르고 있었다.

“정랑……!”

허대실이 아파서 손을 움츠릴 때 그의 머리에서 ‘퍽’ 하는 소리가 났다. 허서가 또 그의 머리를 내려친 것이다. 허대실은 머리가 핑 돌더니 마차 아래로 굴러떨어져 버렸다.

허서는 마차에서 떨어진 그를 보니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그는 얼른 말고삐를 잡아당겨 가까스로 말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은정랑에게 말했다.

“어머니, 어머니는 먼저 아버지를 찾아가 똑똑히 해명하세요! 아버지는 어머니를 많이 사랑하시니 분명 어머니를 용서하실 거예요.”

지금 그의 입에서 나온 아버지는 엽승덕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 맞다! 내 반드시 네 아버지께 잘 해명할 것이다.”

은정랑 또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터였다. 대답을 들은 허서는 마차에서 뛰어내린 후 왔던 길을 다시 뛰어갔다.

은정랑은 허서가 되돌아가서 허대실을 찾으려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를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은정랑은 사나운 눈빛을 번득였다. 그를 반드시 제거해야만 했다.

은정랑은 어서 가서 엽승덕에게 해명해야 했으므로, 이것저것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마부석으로 올라가더니 말채찍을 내려치며 그곳을 떠났다.

은정랑은 당연히 마차를 몰 줄 알았다. 과거 농촌 아낙네로 지내던 시절, 안 해 본 일이 뭐가 있었겠는가. 마차를 모는 건 일 축에도 못 끼었다.

은정랑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쉼 없이 말채찍을 갈겼고, 가는 내내 어떻게 엽승덕에게 변명해야 할지 끊임없이 머리를 굴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은정랑은 마침내 7년가량 지냈던, 이미 그녀의 집이 되어 버린 송화 골목에 도착했다. 캄캄한 밤이라 주변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도 익숙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이에 내내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녀는 조금이나마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곳이 내 집이다! 이곳이야말로 내 집이며 이곳이야말로 내가 머물러야 하는 곳이다!’

은정랑이 마차를 몰고 송화 골목을 지나가고 있는데, 영존거 맞은편 나무 아래 앉아 있는 엽승덕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은정랑은 얼른 마차에서 뛰어내려 그에게 달려갔다.

“승덕 나리……!”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엽승덕은 어리둥절해하더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랑……. 당신은… 그 사람과 떠난 것 아니었소?”

엽승덕은 성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승덕 나리, 그 사람이 강요한 거예요.”

은정랑은 통곡하며 그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당겼다. 하나 엽승덕이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그자는 대장군이라고 하지 않았소? 대장군을 따라가 행복을 누리려고 했잖소!”

오늘에서야 그는 은정랑 모자가 허영에 들떠 신분 상승을 하려고 자신을 이용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자신의 자존심을 짓밟고 떠나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그뿐만 아니라 정말로 은정랑을 사랑했기에 그들이 떠나는 순간, 온 세상이 다 부서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눈물을 흘리는 은정랑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초조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아니에요, 나리! 나리…….”

그녀는 그리 말하며 절망스러운 얼굴로 눈물을 흘렸다.

“승덕 나리!”

은정랑은 눈물을 흘리며 그를 껴안고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나리,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리예요. 그동안 못 느끼셨어요? 못 느끼신 거예요?”

엽승덕은 그녀의 말을 듣더니 가슴이 요동쳤다.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쉰 목소리가 은정랑의 절망감과 무력감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었다. 또 그녀는 계속해서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그 모습에 엽승덕은 마음이 아팠다. 어떻게 느끼지 못하겠는가? 지금 이 순간 그녀가 느끼는 절망감과 무력감을 자신도 모두 느끼고 있었다.

“나리, 제가 잘못했어요. 그 사람한테 흔들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서가 그 사람의 핏줄이라… 제가 잠시 잘못 생각했어요……. 서도 친아버지를 원해서… 그래서…….

그런데 나리를 떠나고 나서, 떠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어요. 전 나리 없이는 안 된다는 걸요! 나리야말로 이번 생에서 제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걸요! 나리야말로 이번 생에서 제가 기대야 할 사람이에요! 서가 절 탓한다 하더라도 전 나리를 떠날 수 없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정랑! 정랑!”

엽승덕은 애틋한 사랑이 느껴지는 그녀의 절절한 고백에 감동해 눈물이 앞을 가렸다. 자신이 어떻게 해야겠는가? 당연히 그녀를 용서해야 했다.

“정랑, 난 당신을 용서할 거요! 당신이 내 곁에 머물기만 하면 그걸로 충분하오.”

엽승덕은 그리 말하며 감동을 느꼈고 또 마음이 설레었다.

“우리는 영원히 함께할 것이오! 사흘 후면 우린 혼례식을 올릴 거고 천지 신령과 부모님 등 웃어른들에게 절을 올릴 것이오! 세상 사람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금실 좋은 부부가 될 것이오.”

그 말에 은정랑은 눈물을 거두고 미소를 지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저희는 그럴 거예요!”

자신의 인생은 그럴 것이다. 원래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던 것이다. 뜻밖에 튀어나온 같잖은 문제는 그저 한 차례의 시련에 불과했다. 이제 모든 것이 올바른 길로 돌아갔다.

* * *

한편, 그사이 허서는 허대실을 찾기 위해 왔던 길을 되짚어갔다. 자신은 후부의 적자가 될 것이고 고귀한 신분이 될 것이며 자신의 앞길은 탄탄대로일 것이다.

‘그러니! 그러니……!’

허서는 뛰어가며 잔혹한 생각을 했고 이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때, 저 멀리 한 사람이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허서는 바닥에 놓인 넓적한 돌을 집어 들더니 그를 해치워 버리기 위해 그대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에 맞았는지 오금에서 시큰한 통증이 느껴졌다. 허서는 그대로 바닥에 꿇어앉았고, 이어 중심을 잃고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산비탈로 굴러떨어졌다.

그러자 호리호리한 체형의 한 사람이 나무에서 뛰어내리더니 허대실을 향해 달려갔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허대실은 이미 기절한 상태였다. 주운환은 그를 둘러메고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 * *

정신이 돌아온 허대실은 자신이 낯선 방에 누워 있음을 깨달았다. 밖에선 훈련을 하는 병졸들의 기합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실아, 정신이 드는 것이냐? 어떻게 된 게냐?”

침상 곁에는 사십 대로 보이는 건장한 체격에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한 사내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 그 불효막심한 놈이 절 죽이려고 했어요.”

멍한 눈빛으로 천장을 쳐다보고 있던 허대실은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곁에 앉아 있던 그 사내가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제기랄, 이 몸이 말하지 않았더냐! 그 모자는 허영에 들뜬 것들이라고! 이제 너도 똑똑히 봤을 게다!”

허대실은 속상하고 또 실망한 나머지 원망 어린 눈빛을 번득였다.

“형님, 절 꼭 도와주셔야 돼요.”

“당연하지!”

그러더니 그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감히 내 아우를 건드리다니. 이 허대실이 그것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형님, 형님이 제 뒤를 봐주시니 마음이 놓이네요. 앞으로 형님을 위해 말을 열심히 씻길 겁니다!”

“무슨 그런 말을 하느냐! 너와 난 같은 이름에 같은 성씨를 가졌고 같은 마을 출신인 형제다. 우리 마을 사내들은 다 죽고 너와 나, 이전 이렇게 셋만 남았는데 내가 네 뒤를 봐주지 않으면 누구 뒤를 봐주겠느냐!”

허 장군이 가슴팍을 두드리며 허대실에게 약속했다. 허대실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파렴치한 것들을 보기는 내 난생처음이다!”

허 장군은 콧방귀를 뀌며 분통을 터트렸다.

“지금 당장 죽여 버리고 그것들의 속셈을 까발리자꾸나. 혼인은 어림도 없지!”

이때, 구석에서 누군가의 작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허 장군과 허대실이 고개를 돌려보니 연청색 옷을 입은 미소년이 구석에 앉아 있었다.

소년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커다란 술잔을 잡고 있었는데, 그가 다리를 꼬니 남경南京 비단으로 만든 연청색 옷이 차르륵 펼쳐지다가 눈이 한곳에 쌓이듯 그의 다리 위로 모였다. 그 모습이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장군님은 그들이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어째서 그 부부를 억지로 갈라놓으시려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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