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276화 (276/858)

제276화

“에이! 그거참…….”

허대실은 허서의 성급한 몸짓에 그만 몸이 뒤집혀 나무 걸상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은정랑은 신발 따위는 가져오지도 않았고 허대실을 위해 신발을 만든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러나 아들에게 다른 의도가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신어 봐요, 당신.”

“멀쩡한 신발을 갑자기 바꿔 신으라니. 객줏집으로 돌아간 다음에 바꿔 신겠소! 에이 참…….”

허대실이 미간을 찌푸리며 재차 거부했으나 이미 그의 신발을 벗긴 허서는 이어 그의 양말마저 벗겨 버렸다. 그러자 마차 안에는 순식간에 지독한 발 냄새가 진동했다.

그러나 허서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풍등을 든 채 허대실의 두 발을 쳐다봤다. 커다란 두 발에 털이 숭숭 난 발가락 열 개가 하나도 빠짐없이 있었다. 허서는 그 온전한 모습에 순간 멍해지더니 발 냄새도 개의치 않고 손을 뻗어 그의 두 발에 잘만 붙어 있는 새끼발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발가락이 어떻게…….”

“서야, 뭐라고 했느냐?”

은정랑은 허서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채고는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오른쪽 새끼발가락이 반쯤 잘려 나간 거 아니었어요?”

허서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묻자 허대실은 어리둥절해하더니 흠칫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발을 움츠리며 신을 달라고 재촉했다.

“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참, 날 주려고 새 신을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어서 이리 다오!”

허서는 더는 이것저것 고려할 여유가 없어 다급히 물었다.

“아버지, 아버지는 이번에 전공을 세워서 황제 폐하의 병이 회복되면 작위를 받게 되시잖아요. 그럼 저택을 하사할 수도 있는데 그리되면 어디에 살지 골라야 할지도 모르잖아요. 아버지는 어디에서 살 생각이세요?”

“그게 무슨…….”

허대실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머뭇거렸다. 그 순간, 방금 전 은정랑이 다정한 얼굴로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서야,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게냐? 밖에서 떠도는 소문을 듣고 오해를 한 것이냐?”

허대실의 이 말에 허서는 낯빛이 확 변했고 은정랑도 작고 갸름한 얼굴이 확 굳더니 가슴이 방망이질하기 시작했다. 소문? 오해? 그게 무슨 말인가? 자신들이 그를 전공을 세운 허 대장군으로 오해했다는 말인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어떻게 오해일 수가 있단 말인가! 방금 전 자신들은 끝장을 내고 왔다. 엽승덕을 뻥 차 버리지 않았는가! 그러니 허대실은 허 장군이 맞아야 했다. 절대 틀렸을 리가 없고 틀려서도 안 되었다.

“왜 그렇게 묻는 거니?”

허대실은 미간을 찌푸리며 재차 입을 열었다.

“설마 내가 장군이 아니라 말이나 돌보는 마부라 해서 나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게냐?”

‘말을 돌보는 일을 한다고?’

그 말에 은정랑과 허서는 머리가 핑 돌았다. 말을 돌보는 것도 직업이라고 하는 소리인가!

“어떻게 소문일 수가 있어요!”

허서는 그 말을 듣고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재빠르게 변명의 말을 꺼냈다.

“아, 저… 저흰 그런 뜻이 아니라…….”

허대실이 아직도 자신들을 떠보고 있는 것일까 봐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더 이상 도박을 할 수도 기다릴 수도 없어 허서는 얼른 이렇게 둘러댔다.

“제가… 어제 동문 하나를……. 맞아요, 동문 하나가 갑자기 저에게 자기 형도 강왕 전하를 따라 함께 도성으로 돌아왔다고 말했어요. 그러면서 허대실이라는 이름의 장군이 있다고 해 제가 궁금해서 아버지에게 여쭤본 거예요.

아버지, 설마 지금 저희를 떠보시는 거예요? 저희 모자가 그동안 힘겹게 지내다가 어쩔 수 없이 한 사내한테 몸을 의탁했는데, 그걸 보고 저희에게 복수라도 하시려는 거예요?”

이렇게 말하니 잘못한 쪽은 또 허대실이 되고 말았다. 때를 놓치지 않고 은정랑이 흐느껴 울며 한탄했다.

“흑흑……. 그때 내가 허서를 데리고 어머님을 따라갔어야 했어요. 그랬다면 이렇게 몸을 더럽히며 살지는 않았을 텐데……. 당신의 핏줄을 남겨 줘야 한다는 생각 따위를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정랑, 이러지 마오. 난 당신과 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게 아니오! 정말이오!”

허대실은 얼른 그녀를 품에 안고 다독였다.

“두 사람에게 보복할 생각 같은 건 더더욱 없소. 다만 당신과 허서가 말하는 허 장군은 내가 아니라 이 말이오. 그저 나와 성과 이름이 같을 뿐이오.”

허서와 은정랑은 단정적인 그의 말투에 낯빛이 싹 변했고 온몸 역시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장군이 좋을 게 뭐가 있소. 전장에 돌아가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 사람들이오. 그러다 보면 보잘것없는 목숨마저 부지할 수 없소.”

허대실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세 식구가 함께 잘 살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소. 마차는 내가 모는 게 더 낫겠구려!”

그는 그리 말하며 안에서 나오더니 마부석에 앉아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여기 지리는 내가 알고 있소. 그저께 성안으로 들어올 때 함께 지내던 동생과 같이 들어왔는데 그 동생 집이 이 근처에 있소. 그 동생은 몰래 집으로 돌아왔거든! 거기 가서 하룻밤 신세 좀 집시다.”

마차는 대로 위를 한참 동안 내달렸다. 주변의 황무지에서 싸늘한 바람이 휙휙 마차 안으로 불어닥쳤다.

허서와 은정랑은 멍하니 앉아 있었고 낯빛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두 사람은 한마디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허대실이 장군이 아니라 일개 병졸에 불과하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들은 확실하게 조사를 했고 분명 상주 오수현 허씨 집성촌에 살던 허대실이라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틀릴 수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허대실의 새끼발가락은 멀쩡하게 달려 있었고, 또 그가 직접 자신은 그 장군이 아니라고 밝혔다. 하지만…….

허서와 은정랑은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두려워서 감히 소리를 낼 수는 없었고 이 상황을 믿고 싶지도 않았다.

“워워.”

밖에서 허대실이 말을 멈추는 소리가 들렸고 그는 고개를 돌려 마차 안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가서 문을 두드려 보겠소.”

그는 그리 말하며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은정랑과 허서는 굳은 얼굴로 밖을 쳐다봤다. 눈이 이미 어둠에 익숙해진 터라 은백색 달빛 아래 주변 황무지를 살펴볼 수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방 두 칸짜리 작은 초가집이 보였다. 그곳은 바로 허대실과 함께 돌아온 강왕의 부하가 사는 집이었다.

은정랑과 허서는 넋 나간 눈빛을 하고 있었고 허대실은 그 초가집 문 앞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려댔다.

“소목아, 나 대실이야!”

잠시 후, ‘끼익’ 소리가 나며 초가집 문이 열렸다. 마차는 그 초가집에서 좀 떨어져 있는 데다 밤이어서 문을 연 사람의 얼굴이 또렷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한 사내가 손에 등잔을 들고 있는 모습만 보였다.

소목은 허대실을 보더니 ‘오’ 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 허 마부였구먼! 난 대실이라고 하기에 그 대장군이신 줄 알았지! 헤헤헤.”

그 말에 은정랑과 허서는 가슴속으로 한기가 파고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원래는 아내와 객줏집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실수로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이곳에서 하룻밤 신세 좀 질까 해.”

“어?”

허대실이 허허 웃으며 부탁하자 소목은 난처한 얼굴을 했다.

“대실 형님, 형님을 돕기 싫어서가 아니라……. 마침 오늘 장인어른과 장모님, 손아래 처남 일가가 오는 바람에 방이 꽉 차서 발 디딜 틈이 없수. 그래서…….”

“아유 됐네. 무슨 말인지 알았어.”

허대실은 이해한다는 얼굴로 말했다.

“서둘러 객줏집으로 돌아가면 되네. 별로 먼 거리도 아니고.”

“그럼 더 붙잡아 두지 않겠수. 참, 형님은 이번에 서북으로 안 돌아가는 거죠? 운도 좋수!

맞다, 형님. 형님은 오랫동안 말 씻기는 일을 해서 솜씨가 수준급이잖수. 마침 내 손아래 처남이 어제 말을 판매하는 상점에 아는 사람이 있는데 그곳에 말 씻기는 사람이 부족하다고 했수. 형님에게 일자리를 소개해 줘야겠구먼.”

“소목아, 정말 고맙다.”

소목의 말에 허대실은 감동하여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고 이어 두 사람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허서와 은정랑은 어안이 다 벙벙했다.

‘정말로 장군이 아니라 말이나 닦는 마부였다는 말인가? 맙소사!’

모자의 눈이 마주쳤다. 사색이 되어 당혹스러운 기색을 보이는 상대방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어 두 사람은 현기증이 나 하늘과 땅이 뱅글뱅글 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방금 전 자신들이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고작 마부 하나 때문에 후부의 세자를 걷어찼다니, 세상에 이런 황당하고 끔찍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니다! 이는 사실이 아닐 것이다! 모두 거짓말이 분명했다! 이제 앞으로 자신들은 어쩌면 좋단 말인가? 말이나 닦는 사람을 쫓아가야 한단 말인가? 그와 함께 빈곤하게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은정랑과 허서는 순간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은정랑은 절대로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전에 시골에 살 때는 별 볼 일 없는 마부가 벌어 오는 돈으로도 만족하고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 몇 년간 부유한 생활을 해 왔고, 제비집을 한 번만 덜 먹어도 서운한 기분이 들었는데 어디 허대실과 함께 고생하며 살고 싶겠는가?

이때, 허대실이 허허 웃으며 걸어왔다. 그는 점심에 입었던 그 회백색 단갈을 입고 있었고 얼굴엔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나 있었다. 아까는 이 모습이 소박하고 기개가 있으며 더없이 영민하고 용맹스러워 보였다. 장군이라면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기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보니 궁상맞고 초라해 보일 뿐이었다. 이자는 말이나 닦는 사람이었다. 말을 씻기고 말똥이나 치우는 천한 마부였던 것이다. 그러자 퀴퀴하고 시큼한 냄새가 확 느껴졌다.

“아이고, 이것 참 공교롭게도 저 집에 사람이 많아 우리까지 묵지는 못한다네. 그냥 객줏집으로 돌아가야겠구먼! 거긴 넓으니 훨씬 편할 거고 여기서 그리 멀지도 않으니까.”

허대실은 헤실거리며 마부석에 앉더니 가볍게 말채찍을 휘둘렀다.

은정랑과 허서는 화딱지가 나 가슴이 쿵쿵거렸고 독사처럼 그의 뒷모습을 매섭게 노려봤다. 결국 허서는 더는 참을 수가 없었는지 보따리에서 커다란 도자기를 꺼내더니 그대로 허대실의 머리에 내려쳤다.

“이 사기꾼! 사기꾼아!”

그런데 그냥 ‘퍽’ 소리만 날 뿐, 도자기는 깨지지 않았다.

허대실의 머릿속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는 머리에서 느껴지는 통증 때문에 몸이 옆으로 기울어졌지만 말고삐를 놓치지는 않았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는지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서야. 너, 너 이게 무슨 짓이냐?”

허서와 은정랑의 더없이 험상궂은 표정에 허대실은 기겁했다.

“너, 너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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