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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275화 (275/858)

제275화

그리하여 모자는 진 마마 등 하인들을 따돌린 뒤 물건을 챙기기 시작했고 귀중한 장신구 같은 것들을 모두 보따리에 넣었다. 그 후, 허서는 몰래 객줏집으로 달려가 허대실에게 오늘 밤 자시子時(밤 11시~새벽 1시)에 이곳을 떠날 것이니 그도 객줏집에서 떠날 채비를 마치라고 말을 전했다.

시간은 빨리도 흘러 금세 자시가 되었고 하인들은 이미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보따리를 등에 진 모자는 살그머니 문을 열고서 밖으로 빠져나갔다.

오늘은 열엿새라 크고 둥근 달이 하늘에 떠 있었다. 골목에는 등불이 하나도 없었지만 은백색 달빛이 온 거리를 환하게 비추고 있어 주변 사물을 보는 데 별 어려움은 없었다. 모자가 이제 막 문을 나서 몰래 그 객줏집으로 가려는 찰나,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랑, 서와 어디를 가는 것이오?”

그 말에 은정랑과 허서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바닥에 나동그라질 뻔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뜻밖에도 엽승덕이었다.

“승…덕 나리?”

은정랑과 허서가 고개를 돌려 보니 집에서 입는 갈색 비단옷 차림의 엽승덕이 그곳에 서서 미간을 찌푸린 채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엽승덕은 보따리를 등에 지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더니 가슴 아프면서도 감동한 듯한 눈빛을 띠었다.

“오늘 진 마마에게서 서찰을 받았네. 두 사람이 균이의 다리가 부러진 게 마음에 걸리고 또 온씨도 그렇게 하고 있으니… 날 떠나서 그것들에게 모든 걸 돌려주려 한다고 적혀 있더군.”

그 말에 은정랑과 허서는 표정이 굳었다.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란 말인가? 자신들이 떠나려 한다는 걸 진 마마가 어떻게 알았을까? 게다가 온씨와 엽균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는 게 마음에 걸려서 떠나는 거라고 했단 말인가?

그러나 엽승덕이 그리 생각하고 있다 하니 은정랑은 일단 억지웃음을 지으며 동조했다.

“맞아요……. 어쨌든 균이는 나리의 친아들인데 제가 어떻게…….”

“어떻게 그리 모진 마음을 먹었소!”

엽승덕은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어갔다.

“내 눈엔 당신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귀하오. 당신이 날 사랑하기만 하면 난 그걸로 충분하오! 당신 마음 다 알고 있소! 날 너무 사랑해서 날 위해 생각하느라 이러는 거겠지. 하지만… 당신은 이걸 알아야 하오. 당신이 없으면 난 지옥에서 사는 것과 다름없다는 걸 말이오.”

은정랑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허서도 정색을 했다. 두 사람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정랑, 서야.”

이때, 근처에서 또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은정랑과 허서는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겨우 몸을 돌려 보니 건장한 허대실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두 사내는 앞뒤로 서서 모자와 약 한 장丈(1장은 약 3m임) 정도 떨어져 있었다. 모자가 두 사람 사이에 낀 셈이었다.

“여, 여긴 왜 온 거예요?”

은정랑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어쨌든 자신은 엽승덕과 오랫동안 깊은 정을 나눈 사이였다.

“객줏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도저히 마음이 안 놓여서 데리러 왔소.”

허대실이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엽승덕은 그 말에 벙찌고 말았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이 사내가 정랑과 아는 사이란 말인가? 게다가 두 사람을 데리러 왔다는 건 또 무슨 이야기고? 정랑과 허서가 자신을 떠나 이 사내와 함께 가려고 했단 말인가?

“당신은 누구요?”

엽승덕이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정랑과 허서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요?”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오!”

허대실이 버럭 화를 냈다.

“설마 당신이 바로 정랑을 몰아붙여 몸을 의탁하게 하고 남의 아들마저 강제로 빼앗으려 한다는 그 겁쟁이 세자요?”

“지금 무슨 망발을 하는 게냐? 아니, 넌 누구냐?”

엽승덕이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그는 무명옷을 입고 있는 허대실을 보더니 그가 평범한 백성임을 알아차리곤 단번에 기세가 확 올랐다.

허서는 미간을 찌푸린 채 독한 눈빛을 번득이더니 허대실을 이렇게 불렀다.

“아버지.”

엽승덕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허서를 쳐다보며 물었다.

“너 지금 저자를 뭐라고 불렀느냐?”

“저분은 제 아버지입니다.”

허서가 눈썹을 추켜세우며 답했다.

“허 대 자 실 자. 제 친아버지세요. 아버지가 살아 계셨던 거죠. 그래서 저희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시려는 거예요.”

이게 웬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란 말인가! 엽승덕의 낯빛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정랑……. 날 제일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소? 전에 당신의 죽은 남편은 거칠고 난폭해 다정함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다고 했잖소. 부모님의 독단적인 결정에 따라 하는 수 없이 저자에게 시집갔을 뿐이라고, 날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하지 않았소.”

은정랑은 그의 말에 깜짝 놀라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녀는 허대실이 오해라도 할까 봐 걱정이 되어 성난 목소리로 반박했다.

“지, 지금 무슨 망발을 하는 겁니까! 누가 그런 소리를 했다는 거예요!”

엽승덕은 그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정랑!”

“정랑……. 서야…….”

허대실도 은정랑 모자를 부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설마 당신이 스스로 원해서 저 사람과 함께한 거요?”

“아니에요! 당신! 난 그런 적 없어요!”

은정랑은 더 이상 체면이고 뭐고 없었다. 그녀는 재빨리 허대실에게 달려가 말했다.

“난 살아서도 당신 사람이고 죽어서도 당신 사람이에요. 그리고 서는 당신의 유일한 핏줄이고요. 난 서에게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마지못해 저 사람과 함께한 거예요.”

“그럼 됐소. 갑시다!”

허대실은 기쁜 마음에 은정랑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한쪽에 세워져 있는 작은 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정랑! 가지 마시오!”

엽승덕이 그녀를 부르며 쫓아가려고 하는데 허서가 그를 확 밀어 넘어뜨리더니 냉랭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저희 아버지께서는 곧 대장군 작위를 받으실 분이십니다! 그러니 눈치가 있으시면 물러나세요! 저희에게서 멀리 떨어지시라고요!”

엽승덕은 그 말에 큰 충격을 받아 넋이 나가고 말았다.

허서는 얼른 뒤를 쫓아갔고 은정랑과 허대실은 이미 근처에 세워져 있는 마차에 타고 있었다. 허서는 눈치껏 마부석에 앉았다.

“정랑…….”

엽승덕은 머릿속에서 ‘쾅’ 굉음이 울리는 것만 같았다. 그는 금방이라도 정신줄을 놓을 것만 같은 모습으로 그들의 뒤를 쫓아갔다.

“정랑, 정랑! 가지 마시오! 이건 다 거짓말이야!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분명 나라고 했잖아! 당신이 없으면 난 죽는단 말이오……!”

엽승덕이 뒤에서 자신의 마음을 다 줘 버린 은정랑을 절절하게 불러 대니 정말로 그녀와 그가 진실한 사랑을 나누었던 듯 보였다. 이에 은정랑은 몸서리를 치며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고, 두려운 마음에 감히 허대실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허대실은 굳은 표정을 한 채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더니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당신이 전에 어떻게 지냈던 간에 지금 돌아왔으니 그걸로 됐소! 우리 세 식구가 함께하면 그 무엇보다도 강하오! 난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데도 당신과 허서가 내게 돌아오겠다고 하니 그걸로 나에 대한 애정은 증명된 것이오.”

그의 진심을 느낀 은정랑은 슬프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했다.

“앞으로 난 당신과 함께 잘 살 거예요. 우리 세 식구는 영원히 함께 잘 살 겁니다.”

그녀는 그리 말하며 그의 가슴에 기대고 눈물을 흘렸다. 이 말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그녀는 정말로 허대실과 함께 잘 살고 싶었다.

허대실이야말로 자신의 남편이고 아이의 아버지이지 않은가. 그러니 그와 함께 살아야 비로소 제대로 사는 셈이고, 그런 인생이야말로 제대로 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정랑!”

허대실은 그녀를 안아 주며 자신도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마침내 자신의 아내를 찾게 되었는데 어찌 감동하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자신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데도 아내와 아들은 저와 함께하겠다고 했다. 그러니 이 이상 더 바랄 게 없었다.

“지금은 가진 게 없어서 당신과 서가 좀 힘들겠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두 사람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오. 조금 고생스럽기는 하겠지만 우리 세 식구가 함께 노력하면 분명 생활은 점점 더 윤택해질 것이오.”

은정랑은 여전히 감동에 푹 빠진 채 되찾은 남편을 응원했다.

“고생하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어요! 고생스러운 건 당신이죠. 우린 뒤에서 묵묵히 당신을 응원할 거예요. 그러니 당신은 맘 편히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가요!”

“군대를 이끌기는 무슨! 강왕 전하께서 내가 고생한다는 걸 아시고는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 주셨소. 그러니 앞으로 서북으로 가지 않아도 되오. 우리는 이곳 도성에 정착하면 된다오. 그리고 이미 수행하고 있는 공무公務도 있소. 으악!”

허대실이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마차가 갑자기 급정거해 은정랑과 함께 마차 벽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아버지,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왜 군대를 이끌지 않으세요?”

마차를 몰던 허서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는 허대실의 말에서 뭔가 이상한 부분을 눈치챘다.

현재 대제는 장군들이 부족한 실정이니 설령 허대실이 전장을 떠나고 싶어 한다 해도 황제가 그걸 윤허할 리 없었다. 그러니 강왕이 그에게 그만두라고 한다고 그만둘 수 있을 리가 있겠는가? 또 그럴 것이라면 왜 황제에게 전공을 보고하려고 하겠는가? 그리하면 괜히 골칫거리만 만드는 셈 아닌가?

허서의 머릿속에 무서운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설마 자신의 아버지가 전공을 세운 그 허대실이 아니란 말인가?

허서는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오늘 분명 상주 오수현 허씨 집성촌에 살던 허대실이라고 분명히 들었다. 그러니 어떻게 다른 사람일 수가 있겠는가.

허서는 갑자기 그 뾰족한 얼굴의 사내가 했던 말 중에 한 부분이 떠올랐다.

“참, 아버지. 어머니가 아버지 신발을 한 켤레 만드셨어요. 한번 신어 보세요.”

그는 그리 말하며 마차의 우측 상단에 걸어 둔 풍등風燈을 꺼내 든 다음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캄캄했던 마차 안이 일순간 환해졌다.

“뭐라고? 신을 바꿔 신으라니? 돌아가서 하자꾸나!”

허대실이 창문에 달린 발을 걷어 올리며 밖을 내다보니 그들은 황량한 교외에 도착해 있었다.

“왜 이런 곳에 온 것이냐?”

“날이 어두워 제가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허서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는 원래부터 마차를 모는 데 숙련되지 않았고, 더군다나 날까지 어두워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이런 황량한 교외에 도착했던 것이다.

“어서요. 아버지. 어머니의 성의를 무시하시면 안 되죠.”

허서는 그리 말하며 직접 허대실이 신고 있던 신발을 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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