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274화 (274/858)

제274화

“저런……. 대낮에 창피한 줄도 모르고! 여긴 더 못 있겠구먼!”

진 노야는 안색이 확 변하더니 자리를 떨쳤다. 엽승덕도 따라서 방을 나서려 하다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어째서 저 소리가 은정랑의 목소리와 비슷하게 들리는 걸까? 물론 절대 그럴 리가 없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은정랑은 늘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으니, 어딜 봐서 옆방의 저… 저 뻔뻔한 여인과 같겠나!’

진 노야는 이미 방을 나섰고 엽승덕도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그곳을 떠났다.

* * *

한편,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가 되어서야 은정랑과 허대실의 거사는 끝이 났다.

은정랑은 이렇게 저렴한 객줏집에서 자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엽승덕과 좋은 곳에서 묵는 게 이미 습관이 된 터였다. 그러니 거사를 치르는 동안 자신의 신음소리가 바깥에 다 들리게 됐으리라고 어디 짐작이나 했겠는가?

그녀는 옷가지를 챙겨 입은 후 허대실에게 당부했다.

“당신, 앞으로 며칠 동안은 여기서 가만히 있어야 돼요. 내가 그 일만 해결하면… 우린 영원히 함께할 수 있어요.”

“해결할 게 뭐가 있소? 때가 되면 내가 가서 당신과 허서를 영존거에서 데리고 나오면 되지. 그 사람들이 후부 사람들이라고 해도 강제로 남의 아내를 빼앗을 수는 없소. 우리 주장은 이치에도 맞소! 그뿐만 아니라 난 만만한 사람이 아니오! 내 뒤를 봐주시는 분도 계신데 겁날 게 뭐요!”

허대실은 말끝에 후부가 하찮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은정랑은 오만한 그의 말투를 듣더니 가슴속에서 흥분과 설렘이 몰려들었다. 역시 그는 대장군이었던 것이다.

은정랑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를 살살 달랬다.

“그래도 그 사람이… 어쨌든 우리 모자를 오랫동안 돌봐 줬으니 돌아가서 잘 설명해 줄 수밖에 없어요. 만약 그쪽에서 물러서지 않으면 그때 당신이 나서요.”

은정랑은 당장에라도 허대실을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얼른 그런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허서에게서 확실한 답을 들은 후에 신중히 움직여야 했다.

두 남녀는 얼마간 더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 뒤 은정랑은 방을 나섰고 그녀는 손수건을 살랑살랑 흔들며 낭하를 걸어갔다.

그런데 이때 ‘끼익’ 소리가 나면서 오른쪽 방문이 열리더니 그 노부부가 문 뒤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부부는 ‘흥’ 콧방귀를 뀌며 경멸 어린 시선으로 은정랑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은정랑은 아래층으로 내려와 천천히 그곳을 떠났고 점원은 기둥 뒤에 숨어 몰래 그녀를 훔쳐보고 있었다. 그러나 은정랑은 그 시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 * *

한편, 허서는 마차를 몰고 성 밖으로 나가 반 시진을 내달려 마침내 도성을 지키는 병영 부근에 도착했다.

멀리서 보니 병영은 커다란 나무 울타리로 빙 둘러싸여 있고 주위는 보초를 서고 있는 병사들로 가득했다. 안쪽으로는 숙소가 줄지어 배치되어 있고 커다란 광장에선 병사들이 질서정연하게 서서 검술을 연마하고 있었다.

허서는 그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도성을 지키는 병영은 중요한 곳이라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말을 몰고 병영 근처에 있는 조그만 마을로 가 어느 요릿집으로 들어갔다. 품위 있는 곳이라 할 순 없어도 장사는 아주 잘되는 곳이었다.

요릿집 안은 손님으로 가득했다. 이 마을에서 병영까지는 이각 정도밖에 걸리지 않아 많은 병사들이 휴가를 보낼 때 이 마을에서 술을 마시고 밥을 먹곤 했다.

현재 강왕의 부대가 병영에서 잠시 머무르고 있으니 당연히 도성을 지키는 병사들과 함께 훈련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이 요릿집에서 휴식을 취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허서가 안으로 들어가자 점원이 얼른 그를 맞이하며 물었다.

“손님, 식사하러 오셨나요? 아님 묵으실 건가요?”

허서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작은 말굽은을 그의 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 보시게. 이곳에… 강왕 전하의 부하들이 있는가?”

점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강왕 전하의 부대는 무슨 일로 찾으시는 거죠?”

이 요릿집은 병영에서 머무는 군사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곳이었다. 강왕의 부대가 잠시 병영에 머문다고 하니 당연히 진작에 그 소문을 들었다.

게다가 점원은 이곳에서 십 년 넘게 일한 사람이니 와서 술 마시는 손님들의 얼굴을 대부분 알았다. 낯선 얼굴을 보거나 낯선 말투를 들으면 그들이 강왕의 부하임을 즉시 알아보았다.

“무슨 악의가 있어서 그런 건 절대 아니라네. 친척을 찾으러 온 것이니 아는 게 있으면 좀 알려 주시게. 가서 물어볼 게 있어서 그러니.”

“마침 지금 한 사람이 있습니다.”

허서의 청에 점원은 그리 답하며 한 곳을 가리켰다. 허서가 고개를 들어 보니 창가에 놓인 팔선상 옆에 칼로 깎은 듯이 뾰족한 얼굴에 작은 눈, 입이 툭 튀어나온 한 사내가 그곳에 홀로 앉아 자작자음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허서는 얼른 그쪽으로 걸어가 그에게 예를 올렸다.

“저기 말씀 좀 묻겠습니다.”

“그쪽은 누구요?”

사내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저는 이명이라고 합니다. 저희 아버지도 서북의 병영에 계셨는데 강왕 전하께서 도성으로 돌아오셨다고 하여 이렇게 말씀 좀 여쭙고자 왔습니다. 저희 아버지도 운 좋게 함께 도성으로 돌아오셨는지 말이죠.”

허서의 얼굴은 대단히 간절해 보였다.

“아, 그런 거였군. 자네 아버지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가?”

사내가 밝고 시원시원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묻자 허서는 알아서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이렇게 말했다.

“저희 아버지 존함은 이 노 자 금 자이십니다. 큰 물결 할 때의 그 노澇입니다.”

허서는 일부러 흔하지 않은 이름으로 말했다. 너무 흔한 이름으로 지었다가 정말로 이름이 겹치는 사람이 있으면 큰일이니까.

“그런 이름은 없었네. 적어도 내가 알기로 강왕 전하를 따라 도성으로 돌아온 사람들 중엔 그런 이름을 가진 자는 없었네.”

사내가 고개를 가로젓자 허서는 옅은 한숨을 쉬더니 다시 서북쪽의 상황이 어떠한지, 춥지는 않은지 등을 물어보며 자신의 친아버지에게 관심을 쏟는 척했다.

사내는 가족이 서로 떨어져 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잘 알기에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었다. 이렇게 두 사람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서로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다.

“참, 병사들 중에 허 대장군이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엄청 대단한 분이라고 하던데요.”

허서가 웃으며 운을 뗐다.

“그렇게 함부로 부르면 안 되네! 아직 작위를 받은 게 아니니 말일세!”

사내는 얼른 정색한 다음, 다시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때 대실 형님이 아니었으면 다들 죽은 목숨이었지.”

허서는 ‘대실’이라는 두 글자를 듣더니 가슴에 흥분으로 가득 찼다.

‘정말이었구나! 정말이었어!’

그러나 신중을 기해야 한단 생각에 허서는 그 사내에게 또 물었다.

“저도 그분에 대해 들었는데 상주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마침 제 고향도 상주인데 놀라운 우연의 일치이죠.”

“그러게 말일세!”

사내가 헤헤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죽엽청竹葉靑(역사가 대략 1,500년 정도 되는 오래된 전통주로 독특한 향과 달콤한 맛을 가지고 있음)을 단숨에 들이켰다.

“설마 그 형님과 아는 사이인가?”

“어쩌면 친척일지도 모르는데 확실하지는 않아요.”

“그래? 친척일 수 있단 말이지? 그럼 내가 그 형님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볼 테니 자네 친척인지 아닌지 가늠해 보겠나? 대실 형님은 사십 대로, 키가 8척이 넘고 덥수룩한 수염이 난 우락부락한 사내일세.”

허서는 들으면 들을수록 가슴이 설레고 흥분되었다!

“다만 요즘 걷는 게 시원치 않지. 지난번 전투에서 오른쪽 새끼발가락 절반이 잘려 나가는 바람에 아직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네.”

허서는 어제 걸음걸이가 시원치 않던 허대실의 모습을 떠올리더니 이렇게 또 물었다.

“그분은 상주 어디 사람이에요?”

“어디 사람인지 내가 알고 있지. 상주 오수현烏水縣에 있는 허씨 집성촌 사람이네.”

“허, 허씨 집성촌…….”

허서는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맞다! 그가 맞다! 바로 그였다! 그의 친아버지인 허대실이다! 상주 오수현 허씨 집성촌에 살던 허대실, 그 사람은 바로 그의 친아버지였던 것이다.

“어떤 것 같은가? 자네 친척이 맞는가?”

허서는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흥분을 억누르곤 실망감이 역력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휴, 아니네요! 제 친척은 오수현 백석진白石鎭 사람이 아니거든요.”

이 사내가 돌아가서 자신이 찾아와 이런 이야기를 물었다는 걸 허대실에게 전할지도 몰랐다. 그럼 그와 자기들 모자 사이에 틈이 생길 수도 있으니 이 사실을 철저히 숨겨야만 했다. 알아낼 것을 다 알아낸 허서는 술잔을 비우고 술값을 계산한 다음, 마차를 몰고 그곳을 떠났다.

송화 골목으로 돌아와 보니 은정랑은 침실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허서는 얼른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머니.”

은정랑은 허대실과 한나절을 뒹굴어 녹초가 되어 있었지만 허대실의 일로 너무도 흥분한 나머지 잠을 깊이 이루지 못했다. 자신을 부르는 아들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야, 돌아온 것이냐? 알아본다는 일은 어떻게 되었느냐?”

“확인했습니다!”

허서가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상주 오수현의 허씨 집성촌에 살던 허대실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이 맞아요!”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은정랑도 흥분한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오늘 허대실이 보여 줬던 열정을 떠올려 보니 그가 자신에게 진심임을 알 수 있었다.

당시 허대실의 옷을 묻은 무덤을 만든 뒤, 자신은 허서를 데리고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 시집을 갈 생각이었다. 그래서 도성으로 향하는 동안 꽤 많은 사내들을 겪어 봤지만, 그 사내들은 자신에게 진심이 아닌 듯싶었고 정실부인들도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 도성으로 쫓겨 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엽승덕을 만나고 나서야 자신은 한 사내가 한 여인을 마음에 두면 어떻게 행동하는지 알게 되었다. 경험을 미루어 볼 때 지금 허대실은 진심으로 자신들 모자를 받아들이려는 것이었다.

“그럼 이제 우리는…….”

은정랑은 자신과 엽승덕의 혼례식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제 사흘밖에 안 남았으니 정말로 허대실을 따라갈 거라면 서둘러 떠나야 했다.

“그 사람들과 여러 말 할 필요 없어요. 그랬다가는 또 다른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요.”

허서가 은정랑을 재촉했다.

“지금 당장 휴대하기 간편한 귀중품이나 귀한 의복만 챙겨서 떠나야 해요. 그런 후에 아버지한테 엽학문과 약속을 잡으라고 하면 되고, 그 자리에서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지 엽씨 가문 핏줄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힐 거예요.

그럼 엽학문은 분명 화가 나서 뒤로 넘어가려고 할 테고 저희에게 다시 정안후부로 들어오라고 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엽학문은 아버지를 두려워할 테니 감히 저희를 어쩌지는 못할 겁니다.”

“네 말이 맞다!”

은정랑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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