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273화 (273/858)

제273화

“그렇게 말할 필요도 없어요. 때가 되면 아버지한테 그 사람들을 눌러 달라고 하면 돼요. 그럼 그 사람들은 조용히 입 다물 거예요! 엽학문 그 겁쟁이가 감히 소란을 피우겠어요? 그럼 조용히 혼례식을 취소하면 되고 백성들은 원래 잘 잊어버리잖아요.

저흰 상주에 있는 고향으로 가서 한두 해쯤 지내다가 다시 도성으로 돌아와 이름을 바꾸면 돼요. 혹시라도 저흴 알아보는 사람이 물어보면 그때 그 일은 오해였다고 말하며 그럴싸하게 포장하면 그만입니다.”

허서는 어떻게 뒤처리를 할 것인지도 이미 생각을 해 두었다. 은정랑은 들으면 들을수록 미래에 대한 희망이 생겼다.

“정안후부의 작위는 너의 대까지만 누릴 수 있는 작위다. 네 밑으로는 대물림되지 않는 자리이지. 네가 문인의 길을 걸으며 노력한다 하더라도 작위는 얻을 수 없다.

그러나 행군하며 전쟁에 참가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네 아버지가 조금만 더 능력을 발휘하고 몇 년 만 분투하면 작위를 얻을 수도 있다. 설령 네 아버지가 타지에서 세상을 떠난다고 해도 영웅이라는 명예가 남을 게다.”

허서는 정안후부는 제대로 된 권력자조차 사귀지 못하는 형편이니, 향후 자신이 과거 시험에 붙어 벼슬길에 오른다고 해도 장원이나 탐화로 붙지 않는 이상 주운환이 자신보다 앞설 거라는 생각에 초조해하고 있었다.

자신이 잘난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반드시 일갑 안에 들 수 있다고 감히 장담할 수는 없었다. 이갑 안에 드는 것도 사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니 신분은 높으면 높을수록 좋았다. 그리고 어쨌든 간에 자신은 이미 엽연채를 이겼다. 자신은 그녀의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조차 엄두를 못 내도록 치욕을 주는 데 성공했고, 얻어걸리긴 했어도 그녀의 친오라비의 다리를 부러뜨린 다음 집에서 쫓아내는 데도 성공했다.

엽연채는 이가 갈릴 정도로 화가 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추씨 가문에 숨어 있지 않았다면 자신은 분명 엽연채의 표정을 보러 그녀를 찾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자신은 그녀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내버린 다음 사정없이 짓밟아 버리고 새로운 귀족인 허 장군의 아들이 될 계획이었다.

‘쯧쯧, 그렇게 되면 엽연채의 표정이 분명 아주 가관이겠지.’

“방금 전에 네 아버지가 말하길 우리가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보니까 네 아버지는 진심 같더라. 결국 그때 네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아 우리가 오해를 하는 바람에 이렇게 많은 일이 벌어진 게다.”

은정랑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대실의 말이 진심이 아니라면 그렇게 애절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며 손을 잡지는 않았을 것이다. 허대실의 굵고 단단한 두 손이 손을 잡고 있을 때 그녀는 당혹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은정랑은 조금 우쭐한 기분이 들었고 저도 모르게 탁자 위에 올려진 구리거울을 쳐다봤다. 거울엔 자신의 조그맣고 갸름한 아리따운 얼굴이 비쳤다.

은정랑은 어릴 때부터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를 믿고 교만하게 굴었지만, 자신의 용모가 도성 안에서는 최고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여전히 혼이 쏙 빠지게 사내들을 홀릴 수 있다고 자신했다.

‘후세 사람들이 내 사적事績을 알게 되면 나를 대제의 달기(중국 은나라 주왕의 비妃. 왕의 총애를 믿고 음탕하고 포악하게 행동했다며 망국亡國을 초래한 악녀로 비난당함)라고 부르며 욕하고 한숨짓지는 않을까? 이렇게 말할지도 몰라. “달기와 같은 외모를 가진 건 아니었지만 사내를 홀리는 능력은 달기를 능가했다.”라고 말이지.’

물론 이건 그녀의 망상에 불과했지만, 본인은 그런 줄 알지 못했다.

정신을 차린 은정랑이 조금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내일 우리는…….”

“이 일은 좀 더 기다려야 합니다.”

허서는 아주 이성적으로 행동했다. 그도 허대실의 진심을 느꼈고 더군다나 허대실이 자신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건 이치에 맞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늘 신중하게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정말로 그 허 장군이 맞는지 확실히 알아봐야 해요! 잘못 안 것이라면 큰일 나니까요.”

그 말에 은정랑은 깜짝 놀랐고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훅하고 숨을 내쉬더니 가슴을 두드리며 동조했다.

“그래! 확실히 알아봐야지!”

“어머니는 내일 아버지를 찾아가 아버지를 위로해 드리고 마음을 진정시켜 드리세요. 저는 직접 성 밖으로 나가 조사를 해 볼게요.”

모자는 잠시 더 의논한 뒤 각자 자신의 처소에서 잠이 들었다.

* * *

이튿날 아침, 허서는 직접 작은 마차를 몰고 위자와 함께 성 밖으로 나갔다. 은정랑은 가장 본분을 잘 지키고 성실한 어린 여종을 데리고 허대실이 묵고 있는 객줏집 맞은편에 위치한 요릿집으로 갔다.

은정랑은 요기를 좀 한 다음 여종에게 손수건을 사 오라 했다. 여종이 자리를 비우자 그녀는 계산을 한 뒤 그곳을 떠나며 점원에게 말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자신은 밖에서 돌아다닐 것이니 여종은 먼저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이다.

요릿집을 나선 은정랑은 몰래 허대실이 묵고 있는 객줏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니 허대실은 작은 산처럼 그녀의 앞에 우뚝 서 있었다. 평범하지만 깔끔한 회색 단갈을 입고 있는 그는 얼굴에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나 있었다.

어제저녁엔 불빛이 너무 어두워서 그가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은데 지금 제대로 보니 아주 다른 느낌이었다. 비록 무명옷을 입고 있기는 하지만, 그 모습이 되레 소박하면서도 기품 있어 보였고 얼굴에 난 수염 역시 지저분해 보이기는커녕 강건한 사내의 풍모를 돋보이게 했다.

은정랑은 허대실에게 점점 빠져들었다. 차림새를 보니 과연 자수성가한 장군다웠다.

은정랑은 도성에서 지내는 동안 식견이 넓어진 터라 부귀한 차림을 했다고 그에 걸맞은 품위를 가진 건 결코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전에는 엽승덕을 보고 있으면 좋은 옷을 입고 기품 있는 외모를 가지고 있는 사내로 보였는데, 지금 허대실과 비교해 보니 엽승덕은 아무 능력도 없으면서 고귀한 척이나 하는 나약한 식충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랑!”

허대실은 은정랑을 보자마자 두 눈이 반짝 빛나더니 흥분해서는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그의 짙은 살내음이 얼굴 앞으로 확 풍겨오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오랫동안 함께 살았던 부부인데 못 할 게 뭐가 있소! 그동안 매일같이 당신을 그리워했소.”

오랫동안 굶은 허대실은 욕정이 타올라 당장이라도 이성의 끈을 놓을 것만 같았다. 게다가 은정랑은 나이를 열 살도 더 먹었음에도 젊었을 때보다 가녀리고 아름다워 보였다. 관리를 잘한 데다 부티 나 보이는 의복을 입고 있어 고귀한 자태를 뽐내는 대갓집 부인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허대실은 평생 귀부인을 탐낼 꿈도 꾸지 못했는데 뜻밖에도 그러한 귀부인이 자신의 아내였던 것이다. 그러니 허대실이 더 참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를 잡아당겼다.

“아이고……. 다, 당신…….”

은정랑은 조신하게 행동하려고 했으나 그의 힘을 당해 내지 못했다. 게다가 그녀도 그럴 생각이 아예 없는 게 아니었다. 허서가 가서 조사를 한다고 했지만 은정랑은 이미 허대실이 장군이라고 완전히 믿고 있었다.

또 믿든 아니든 일단은 그를 잘 ‘달래 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니 지금은 그저 ‘강요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것이다.

은정랑은 이내 허대실과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오랫동안 굶주렸고 또 한 사람은 식충이와 육칠 년 가까이를 함께한 상태였다.

은정랑은 지금 허대실과 몸을 섞고 있으려니 흥분과 설렘이 격렬하게 몰려왔고,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아아’ 하고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객줏집은 규모가 작은 곳이라 방음이 좋지 않았다. 환한 대낮에 점원이 새로 온 손님을 객실로 안내하고 있었고 그 손님이 막 입실하려는 찰나, 뜻밖에도 한 객실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점원과 손님의 표정이 확 굳었다.

손님은 서너 살이나 되어 보이는 어린 딸과 함께 온 젊은 부부로, 부끄러운 소리에 낯빛이 확 변했다.

“이, 이런 곳에서 잘 수 있겠어요?”

부인이 정색을 하더니 곧장 남편과 함께 아이를 데리고 그곳을 떠났다. 점원은 화가 나 낯빛이 새파래졌고 허대실이 묵고 있는 방을 향해 ‘퉤’ 침을 뱉으며 욕했다.

“벌건 대낮에 뻔뻔스럽기도 해라! 신음소리나 내고 있다니!”

그러나 이 객줏집은 원래부터 장사가 잘되지 않는 곳이었다. 허대실이 통 크게 값을 지불했으니 훼방을 놓지는 못하고 뒤에서 구시렁거릴 뿐이었다.

그 후에도 또 노부부 한 쌍이 객줏집에 왔다. 객줏집에서 숙박비를 반값으로 깎아 주자 그들은 허대실이 묵고 있는 방의 오른쪽 방에 입실했다.

노부부는 옆방에 묵고 있는 은정랑이 내는 신음소리를 한참 동안 듣고 있었다. 어색한 눈빛으로 서로를 쳐다보며 말이다.

노부부가 민망한 분위기 속에서 그 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 왼쪽 방에 묵고 있는 사람들은 차를 마시고 있었다. 화려하고 품위 있어 보이는 차림의 이 두 사내는 교우로, 다름 아닌 엽승덕과 그의 친구인 진 노야였다. 그리고 이 진 노야는 바로 이번 과거 시험에서 탐화로 합격한 진지항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진씨 가문은 예전부터 정안후부와 친분이 좀 있었지만 진 노야는 내심 엽승덕을 업신여겼다. 그러나 진 노야는 그런 티를 일절 내지 않고 엽승덕과 이야기를 나눌 때 늘 웃음꽃을 피우곤 했다.

그런데 오늘 진 노야가 엽승덕과 만난 건 이번 과거 시험에서 장원 급제를 한 주운환의 부탁이 있기 때문이었다. 진 노야는 주운환이 전도유망한 사람이라고 판단했기에 이런 사소한 부탁을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

엽승덕은 갑자기 자신과 만나자고 한 진 노야를 쳐다보며 미간을 찡그리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운을 뗐다.

“진 형, 오늘 무슨 까닭으로 저를 보자고 하셨습니까? 게다가 이런 곳에서 말이죠?”

그러자 진 노야가 웃으며 말했다.

“자네에게 부끄럽지만, 사실 이 객줏집이… 내 벗이 운영하는 곳인데 장사가 너무 안 돼 내 그 친구 장사에 보탬이 돼 주려고 이곳에 온 거라네.

또 듣자 하니 자네 내자가 이 근처에 산다고 하더군. 그래 갑자기 자네 생각이 나서 이렇게 불렀고. 곧 자네 내자가 정안후부로 들어온다고 하던데 정말 축하하네.”

그 말에 엽승덕은 기분이 좋아졌고 이어 진지항이 탐화로 합격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지금 두 집안이 친분을 쌓아 놓으면 향후 허서가 벼슬길에 올랐을 때 서로 도와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엽승덕은 진 노야의 비위를 맞추며 그에게 잘 보이려고 했다.

“진 형의 영랑令郞이 탐화로 합격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이 또한 경사 아닙니까! 한잔하시죠, 진 형!”

엽승덕은 술잔을 들더니 그와 함께 술을 마셨다. 그런데 이때, 옆방에서 요란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진 노야와 엽승덕의 표정이 확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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