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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272화 (272/858)

제272화

‘세상에 이런 우연의 일치가 어디 있겠는가? 설마…….’

허서의 마음은 강과 바다가 뒤집히는 듯이 혼란스러웠다. 두렵기도 하고 달갑지 않으면서도 격렬한 흥분이 몰려왔다.

‘그럴 리가……! 설마 내 아버지가……?’

“그래! 강왕 전하와 함께 다녔다.”

허대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향으로 돌아간 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너와 정랑의 행방도 알 수 없게 되었다. 당연히 두 사람이 업신여김을 당해 떠났을까 봐 걱정됐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아직 군인의 신분이라 오랫동안 그곳에 머무를 수 없었단다. 게다가 내가 두 사람을 찾고 싶어도 일개 병졸에 불과한데 어떻게 찾을 수 있었겠니? 그래서 서북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고 나중에 다시 찾을 생각이었단다.”

“서북에서는… 어떻게 지내셨는데요?”

허서는 떠보듯이 물었다.

“에휴!”

허대실은 한숨을 쉬더니 이렇게 말했다.

“서북에서도 그저 운이 좋고 명이 길었을 뿐이다. 그래서 크고 작은 전투에서 목숨을 잃지 않았던 게지. 다만 지난번 전투에서는 정말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다. 그래서 강왕 전하께서 도성으로 돌아가신다고 하기에 나도 따라서 돌아온 게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전투라고 했는가? 그럼 그 전투일 것이다! 혁혁한 전공을 세운 그 전투 말이다.

“그럼 지금…….”

눈치를 챈 은정랑도 가슴이 쿵쿵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가 어떤 관직을 갖고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리 물으면 허영에 들뜬 사람처럼 보일 수 있었다. 은정랑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렇게 물었다.

“그럼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으니 성과가 좀 있어야 스스로에게 떳떳할 거 아니에요.”

“어떻게 지내긴 뭘. 그저 보잘것없는 일개 병졸에 불과하지!”

허대실은 손사래를 쳤으나 이내 낙관적인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요즘… 지내다 보니 희망이 좀 보인다네. 위쪽에서 나를 눈여겨보고 있으니 앞으로는 점점 더 좋아질 걸세.”

은정랑은 조금 망설였으나 허서는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런데 두… 두 사람은 어떻게 후부의 정실부인과 적자가 된 건가?”

허대실은 그리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아버지, 어떻게 저희를 원망하실 수 있어요?”

그러더니 허서는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는 살아 계셨으면서 어째서 일찍 돌아오지 않으신 거예요? 아버지가 일찍 돌아오셨다면 할머니는 돌아가시지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저와 어머니도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는 않았을 거고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살지는 않았을 거예요.

나중에 도성으로 와서… 어머니는 엽승덕에게 몸을 의탁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저희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었을 거예요. 그때 어머니는… 어머니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까지 하셨어요. 저만 아니었다면…….”

“그때 난, 서는 당신의 유일한 핏줄이니 어떻게든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은정랑은 흑흑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나도 아오! 왜 모르겠소! 그동안 고생 많았소.”

허대실은 감정이 북받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잘못했소. 난 괜찮으니… 당신과 허서가 돌아오기만 하면 되오. 그런데… 당신과 서가 무슨 정실부인과 적자라고 하던데 그건 무슨 소리요? 설령 다른 사내에게 의지했다 하더라도 어떻게 당신이 내 부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있소? 어떻게 서를 다른 사내의 아이라고 할 수가 있소?”

처자식이 살기 위해 다른 사내에게 몸을 의탁한 건 그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혼인을 부정하고 허서마저 다른 사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라고 말하는 건 존엄을 가진 한 사내로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은정랑은 일단은 그를 진정시켜야 했기에 눈물을 흘리며 거짓을 늘어놨다.

“우리도 강요당한 거예요……. 엽승덕이… 그 사람이 말하길… 사실 자신은 고자라 자기 자식도 전부 다른 사람의 씨라고 했어요. 마침 내가 그 사람에게 몸을 의탁했고, 그 사람이 보니 허서가 공부도 잘하고 장래도 밝아 보이니 기어코 우리보고 정실부인과 적자가 되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야 자신의 체면이 선다면서 말이죠.”

“됐소! 난 그런 건 신경 안 쓰오!”

허대실은 손사래를 치더니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찌 됐든 이 모든 게 내가 제때 돌아오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니 당신과 허서를 탓하지는 않겠소. 두 사람이 돌아오기만 하면 되오. 우리 세 식구가 합심해 나서면 설명 못 할 게 뭐가 있겠소?

게다가 난 지금 그저 힘없는 일개 병졸이 아니라 내 뒤를 봐주는 분이 있소! 정안후부 같은 건 별것 아니오. 절대 감히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소.”

그는 그리 말하며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에요? 정말 잘됐네요.”

은정랑은 확신에 찬 그의 어조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밖에 나온 지 오래됐으니 우선 돌아가 봐야겠어요. 안 그러면 그 사람이 우리를 어떻게 대할지 몰라요. 무슨 일이 있거든 내일 저녁에 다시 이야기해요. 참, 지금 어디에서 지내고 있어요?”

“황제 폐하께서 병이 위중해 강왕 전하께서 아직 입궁하라는 명을 받지 못하셨소. 그래서 우리들은 일단 성 밖에 있는 병영에서 지내고 있소. 나는 오늘 당신 일 때문에 특별히 휴가를 얻어 나온 거고. 이곳에서 며칠 머무르면서 우리 일을 해결할 수 있다오. 원래도 객줏집을 찾으려 했는데 이곳으로 오게 됐으니 이곳에서 지내야겠소!”

“알겠어요. 이곳에 머물러요. 그리고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 돼요. 그 일은… 내일 우리가 다시 찾아오면 그때 다시 상의하는 게 어때요? 어쨌든 이곳은 도성이니 함부로 행동하면 안 돼요.”

은정랑이 허대실에게 당부했다.

“당신이 하라는 대로 하겠소.”

허대실은 갸름하고 작은 그녀의 어여쁜 얼굴을 넋이 나간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마음이 요동쳤다.

“그럼 우린 먼저 돌아가 볼게요.”

은정랑이 허서를 잡아당기며 돌아서려는데, 갑자기 허대실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크고 거친 그의 두 손이 그녀의 조그마한 손을 꽉 움켜쥐었다.

“정랑…….”

허대실이 애틋한 목소리로 은정랑을 부르며 그녀의 부드러운 손을 꼭 부여잡더니 못내 아쉬운지 좀처럼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은정랑의 오이씨 같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좀 징그럽다는 느낌이 들어 얼른 그의 손을 뿌리치고 허서와 함께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은정랑과 허서는 객줏집을 나오자마자 황급히 송화 골목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나갈 때처럼 후문을 통해 몰래 들어온 후 은정랑의 침실에서 의논을 했다.

“이제… 어떡하면 좋으냐?”

은정랑은 고민스러운 얼굴이었다.

“어머니, 어머니 생각엔 아버지가 전공을 세워 곧 작위를 받을 허 대장군인 것 같으세요?”

허서가 흥분된 표정으로 물었으나 은정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그럴 리는 없다. 방금 전에 그 사람이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았느냐? 자기는 일개 병졸에 불과하다고…….”

“당연히 그리 말해야 하죠! 아직 작위를 받은 것도 아닌데 어디 감히 스스로를 대장군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아버지가 지금 스스로를 과시하며 황제 폐하께서 몇 품의 대장군직을 내릴 거라고 이야기하면, 황제의 뜻을 함부로 추측하는 게 됩니다! 그리했다가는 작위를 잃게 되겠죠.”

“그, 그런 거니?”

은정랑은 깜짝 놀라더니 허서의 말을 거의 믿게 됐다.

“네가 보기에 네 아버지 같은 사람은 몇 품의 관직을 받을 것 같으냐?”

그녀가 이를 악물고 물었다.

“적어도 4품의 관직은 받을 거예요! 어쩌면 3품을 받을지도 모르죠! 하사품도 아주 후할 거예요. 기름진 밭과 금은金銀 같은 것도 적잖이 받을 수 있을 거예요! 거기다 명성도 높아질 겁니다!”

허서가 흥분해 술술 내뱉는 말에 은정랑은 깜짝 놀랐다.

“그럼 엽승덕보다 훨씬 나은 것 아니냐?”

“훨씬 낫다 뿐이겠어요! 하늘과 땅 차이죠! 후부는 듣기에나 좋을 뿐이에요. 오늘 어머니도 보셨겠지만 저희에게 의복이나 장신구 등을 마련하라고 은화 일천 냥을 주었는데, 그거 가지곤 턱도 없죠! 돈을 더 받으려면 유월에 토지세와 전세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집안에 빈둥빈둥 놀고먹는 사람들이 한가득이고 문제가 한둘이 아니에요. 게다가 할아버지도 대단치 못한 관리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그마저도 품계가 떨어졌고요! 엽승덕은 더 말할 것도 없고요. 몇천 냥을 주고 산 한직도 박탈당했죠, 친분을 맺고 지내는 사람들 중에도 제대로 된 권신은 하나도 없죠.”

그러자 은정랑은 달갑지 않은 눈빛을 보였다.

“내가 재가를 해서 이제 우리가 정안후부로 들어가려는데 그 사람이 이렇게 번듯한 모습으로 돌아왔으니…….”

원래대로라면 조용히 정안후부로 들어갔을 텐데 뜻밖의 문제에 부딪히고 만 것이다. 허대실이 전처럼 별 볼 일 없는 가난뱅이였다면 개의치 않았겠지만 이렇게 더없이 번듯한 모습으로 나타날 줄이야.

은정랑은 이런 상황에서 문제투성이인 정안후부로 시집가려 하니 영 마뜩지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정안후부면 감지덕지했을 텐데 이젠… 역시 비교를 안 해야 마음 상할 일이 없는 것이다. 그녀는 입술을 꽉 물며 말을 이어갔다.

“우린 이미 정안후부 쪽에 길을 닦아 놨다……. 게다가 이미 대외적으로 공표도 했지. 우린 이제 정안후부의 정실부인이고 적자다. 그런데 이제 와서 또 아니라고 하면…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이 일로 말썽이 생기면 너무 추접해 보일 게다.”

“정안후부에서 일어난 추잡한 일이 어디 한두 개였나요?”

그러나 허서는 콧방귀를 뀌며 모친을 설득했다.

“작년 삼월부터 지금까지 꼬박 일 년 동안 조용했던 적이 있었나요? 자매간에 남편을 빼앗고 세자가 옥살이를 하고 적녀는 남색가에게 시집갈 뻔했죠. 저희 일이 하나 더 추가되는 것뿐이에요.”

“그 말이 맞다!”

은정랑도 모진 사람이라 바로 결심했다.

“게다가 그 사람은 어찌 됐든 네 친아버지다. 아무려면… 친아버지가 더 낫지! 어떻게 남의 조상 밑으로 들어가 친아버지가 아닌 자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겠느냐!

그리하면 널 아끼셨던 할머니께 어떻게 떳떳할 수 있겠느냐? 나중에 허씨 가문 조상님들은 또 무슨 낯으로 뵙겠느냐! 사람들에겐 강요를 당한 것이라고 둘러대면 그만이다.”

그녀는 그리 말하며 자신의 이야기가 너무나도 사리에 맞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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