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271화 (271/858)

제271화

그러자 은정랑은 사색이 된 얼굴을 들며 말을 더듬었다.

“너, 너도 보았느냐? 환각이 아니었어?”

“어머니, 왜 이러세요? 무섭게 왜 이러시는 거예요?”

허서는 초조한 목소리로 아까 그 사내를 언급했다.

“대문 맞은편 커다란 나무 아래에 서 있던…….”

은정랑은 두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너도 봤다는 말이냐……! 아니다. 너도 귀신에 홀린 걸 거다.”

“전 똑똑히 봤어요.”

허서는 점점 더 미간을 심하게 찌푸렸다.

“저만 본 게 아니에요. 진 마마도 보지 않았나요? 게다가 그 사람에게 큰 소리로 호통도 쳤잖아요. 왜 그러시는 건데요? 그 사람이 누군데요?”

은정랑은 머리가 핑 돌더니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답했다.

“그… 그 사람은 네 아버지다.”

“제, 제 아버지는 정안후부에 계시는 거 아니에요? 어머니, 이번엔 또 무슨 놀이를 하시려는 거예요?”

허서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후… 후부에 있는 분이 아니라 허, 허…….”

은정랑은 도저히 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 어머니가 말씀하는 사람이… 설마… 그, 그럴 리가요!”

허서도 그가 누구인지 눈치를 채자 갑자기 안색이 확 변했다. 그러더니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성이 난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어머니, 그 사람은 세상을 떠났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그 사람은 죽었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째서 살아 있는 거지?”

은정랑은 허서의 팔뚝을 꽉 잡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당시 마을에 사는 건장한 사내들은 전부 징병되었다. 결국 이전 아저씨 한 명만 살아 돌아왔고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 다들 전장터에서 죽고 말았다고 말했지. 그 사람도 마을로 돌아오지 않았는데 죽지 않은 거면 왜 그랬겠어?”

허서는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그가 일고여덟 살쯤 되었을 때 그의 친아버지는 전쟁터로 끌려가 그는 줄곧 어머니, 할머니와 함께 살았었다.

나중에 들리는 말로는 마을로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은 전부 타지에서 죽은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았을 리가 없다고 했다. 그 당시 할머니는 울고불고 소리를 치며 죽었을 리가 없다고 했고, 하도 울어서 눈까지 멀어 버렸다.

그런데 어머니는 죽었을 거라고 하며 아버지의 옷을 묻은 무덤을 만들었다. 이에 할머니는 화가 나서 몸져누웠고 두 달도 안 되어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살아 돌아왔단 말인가? 생각을 거듭하던 허서는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우린… 곧 후부의 정실부인과 적자가 된다…….”

은정랑이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눈이 시뻘겋게 변할 정도로 두 눈을 부릅뜨더니 비틀거리며 침상에서 내려와 창밖을 향해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추태를 부렸다.

“이 급살 맞을 빌어먹을 놈아! 왜 돌아온 것이냐? 내가 허서랑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그 오랜 시간을 견뎌 내어 드디어 오늘 같은 날이 왔는데……! 왜 기어코 돌아온 것이냐!

살아 있었으면서 왜 그때 돌아오지 않은 것이냐? 그러지 않았다면 우린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다 네가 초래한 결과이니 우리를 원망하지 말거라! 다 네가 만든 결과다. 흑흑!”

“어머니!”

허서는 깜짝 놀라 얼른 그녀를 품에 안고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마님…….”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던 진 마마 등은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진 마마는 하던 일을 멈추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주렴을 사이에 두고 아직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는데 허서가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진 마마와는 상관없는 일이니 나가 봐요! 어머니께서 방금 전에 잠이 드셨는데 악몽을 꾼 거예요…….”

주렴 때문에 진 마마는 안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허서가 목소리를 높이자 감히 이것저것 물어볼 수 없어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진정하세요!”

허서가 은정랑 귀에 대고 다급히 소리쳤다.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렇게 추태를 부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그녀가 정말로 놀랐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도 적잖이 놀랐고 또 두려웠다.

“지, 진정하라고 했느냐……? 이런 상황에 내가 어떻게 진정할 수가 있겠느냐?”

은정랑은 ‘흡’ 숨을 들이마셨지만, 여전히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저희가 이렇게 오랫동안 노력을 해 왔는데 그걸 수포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허서는 이를 악물며 매서운 눈빛을 번득였다.

“저희가 떠나라고 설득을 하는 거예요! 돈을 주면 되죠! 백 냥을 주는 거예요. 아니, 천 냥을 줘서 젊은 부인을 얻으라고 하면 될 겁니다.”

그러자 은정랑이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보내 버리자! 자기 행복을 찾아 떠나라고 하자.”

그녀도 허서와 마찬가지로 차갑고 매서운 눈빛을 번득였다.

“이, 이런……. 저 사람이 아직도 밖에 있다! 문을 두드리면 어쩌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신분이라도 말하면……. 이 일은 절대로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어서 가서 저 사람을 진정시켜야겠구나.”

허서가 서둘러 밖을 살펴보니 진 마마와 여종 두 명이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허서는 얼른 주방으로 들어가 청소 중인 그녀들에게 일렀다.

“어머니가 서재에서 나와 함께 서책을 보신다고 하니 진 마마와 너희들은 함부로 방해하지 말거라. 늦었으니 어서 가서 잠자리에 들거라!”

“예!”

진 마마가 대답하자 허서는 돌아가서 은정랑을 데리고 후문을 통해 슬그머니 밖으로 빠져나왔다. 은정랑은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허대실과 마주칠까 두려우면서도 또 허대실이 떠났을까 봐 염려스러웠다.

이곳을 떠난 그가 정안후부에 가서 입이라도 잘못 놀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가 이곳으로 와서 자신들을 찾았다는 건 분명 자신들이 곧 정안후부의 정실부인과 적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찾아와서 뭘 어쩌려는 걸까? 우리에게 복수라도 하려는 걸까? 아니면 협박을 해서 돈을 뜯어내려는 걸까?’

영존거 후문은 작은 골목과 맞닿아 있었고, 모자가 그 골목 끝까지 걸어가니 다시 송화 골목이 나왔다. 그리고 그 사내는 영존거 정문 맞은편에 자라난 커다란 나무 아래에 여전히 서 있었다.

그를 본 은정랑과 허서는 낯빛이 확 변했다. 둘은 잠시 주저했으나 결국 이를 악물고 그에게로 걸어갔다. 나무 아래에 서 있던 그 사내는 그들을 보고는 깜짝 놀랐고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정랑……. 서야…….”

“할 말이 있으면 저쪽으로 가서 해요.”

은정랑은 그의 목소리를 듣자 온몸에 닭살이 좌악 돋았다. 그를 진정시키려고 온 것이니 간곡한 태도로 말을 건네야 마땅한데도 그와 얼굴을 맞대니 속이 뒤집히고 혐오감이 들어 표정 관리가 잘되지 않았다.

은정랑은 그리 말한 뒤 잰걸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허대실은 순간 어리둥절해하더니 복잡한 표정을 지은 채 그녀를 따라 그곳을 떠났고 허서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허서는 속으로 조용히 궁리를 했다.

그런 생각을 하자 허서는 제대로 준비를 하고 나오지 않은 게 후회가 됐다. 하지만 지금 이 일은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라 준비를 할 겨를도 없었고, 그렇기에 그를 진정시키려고 이리 직접 나온 것이었다.

‘게다가… 어찌 됐든 간에 이자는 내 친아버지다……. 친아버지를 내 손으로 직접……. 이건 금수만도 못한 행동이지 않은가? 정말로 그리해야 한다면 사람을 구해서 해야만 한다.’

그렇게 허서가 별의별 잡생각을 다 하는 사이, 은정랑은 조그만 객줏집에 도착했고 허서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 작은 은화를 건넨 후 2층으로 올라갔다.

방 안으로 들어가 밝은 불빛 아래 서니, 은정랑은 그제야 눈앞에 서 있는 사내의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회색 빛깔의 평범한 단갈短褐(짐승의 털이나 거친 삼베로 만든 짧은 옷. 평민들이 입던 옷)에 검은색 허리띠를 찬 그는 수염이 덥수룩하고 얼굴이 가무잡잡하며 피부는 거칠었다. 한눈에 봐도 그동안 고단한 생활을 했으며 힘들게 일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은정랑은 그 모습을 보니 가슴이 답답하고 그가 더욱 싫어졌다. 허서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은정랑은 자신과 허서의 차림새를 다시금 살펴보고 허대실과 비교하더니 자신들과 허대실은 사는 세계가 완전히 다름을 느꼈다.

“정랑… 서야……. 정말 보고 싶었다.”

반면, 허대실은 눈시울을 붉히며 감격에 겨워 했다. 그러나 은정랑과 허서는 그 말에 낯빛이 하얗게 질렸고 그저 역겨움만 느껴질 뿐이었다.

은정랑은 이를 악물고 따져 묻기 시작했다.

“우리가 보고 싶었다고요? 우리가 보고 싶었으면 왜 돌아오지 않은 건데요? 그때 징병으로 끌려가 군에 입대한 후 이전만 돌아왔어요. 다들 당신이 타지에서 죽었다고 했죠! 살아 있었으면서 왜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

허대실이 옅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때 나와 이전 등이 옥안관에서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우리 군은 서로군 그 나쁜 놈들에게 몰살당했소. 당시 난 내가 죽은 줄만 알았소. 정신을 잃고 시체들 틈바구니에 섞여 있었는데, 나중에 온 강왕 전하의 부대가 날 구출해 줬소.

그 뒤로 쭉 강왕 전하를 따라 서북에 머무르며 그곳에서 반년 이상 상처를 치료했소. 그리고 마침 그곳에서 또 전쟁이 일어나 반년 동안 참전했다오. 일 년쯤 후에 집으로 가 보니… 당신과 허서는 보이지 않고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더군! 흑흑…….”

그는 그리 말하며 목 놓아 울었다.

은정랑은 구역질이 날 것만 같으면서도 속으로 좀 켕기기도 했다. 당시 이전이 마을에 돌아와 소식을 전했을 때 대부분은 의관묘衣冠墓를 만들지 않고 전쟁터에 나간 사내들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자신만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이 쓸모없는 인간은 왜 타지에서 죽지 않았단 말이야?’

자신은 동네에서 가장 예쁜 아가씨였다. 그러니 당연히 제일 좋은 곳에 시집을 가야 했다. 그런데 잘나가던 부잣집이 명 짧은 시아버지 때문에 고생하다가 결국 가산을 모두 날려 먹을 줄, 수중에 척박한 밭 두 묘畒만 남게 될 줄이야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 탓에 자신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빈곤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자신은 더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 사람은 죽지 않고 돌아왔단 말인가?

은정랑은 자신이 좋은 사주를 타고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지금처럼 부귀를 누릴 수 있게 되었겠는가?

‘이제 곧 후부의 정실부인이 되게 생겼는데 하필이면 이때…….’

은정랑은 그런 생각이 들자 이 상황이 전연 달갑지 않아 매섭고 독한 눈빛을 번득였다.

“방금 전에 뭐라고 하셨어요? 강왕 전하와 함께 다니셨다고요?”

그런데 허서는 다른 부분에 주목하고 있었다. 지금 강왕이 도성으로 돌아온 사실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는가. 그의 군대에 분명 허 장군이라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자신의 아버지도 성이 허씨였다. 그리고 분명 타지에서 죽었어야 할 사람이 공교롭게도 눈앞에 서 있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