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270화 (270/858)

제270화

“이번 일로 오라버니는 교훈을 얻은 셈이에요. 안 그랬으면 끝까지 정신을 못 차렸을 거예요.”

엽연채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어머니,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제 사람이 그쪽에서 오라버니를 돌보고 있어요. 그러니 어머니도 오라버니를 보러 그곳에 갈 생각은 하지 마세요. 당분간 오라버니를 상대하지 않으셔야 오라버니가 어머니를 소중하게 생각할 거예요.”

온씨는 입을 틀어막아 흐느낌을 억누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 밖에 사람이… 또 왔습니다!”

이때, 추길이 굳은 얼굴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채 마마는 안색이 확 변하더니 화가 나 씩씩거렸다.

“파렴치하고 사악한 년!”

“마마는 여기서 어머니를 잘 보살펴 드려요.”

그러나 엽연채만은 오히려 낄낄거리며 즐거워했다.

“가자꾸나. 작은 걸상도 가져가 문 뒤에 놓고 앉은 다음 뭐라고 떠드는지 들어봐야겠구나. 지금 안 듣고 안 보면 앞으로 또 이런 기회가 없을 게다!”

그 말에 채 마마와 추길, 혜연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엽연채는 희희낙락한 얼굴로 정말 걸상을 가져오더니 추씨 가문 대문 뒤에 앉았다. 추길과 헤연은 화가 나서 귀를 틀어막는 데 반해 엽연채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해바라기씨까지 까먹기 시작했다.

밖에선 이미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작은마님, 열흘 후면 저희 마님께서 정안후부로 들어오십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으시는 겁니까?”

밖에서 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목소리의 주인은 은정랑이 가장 신뢰하는 심복인 진 마마였다.

“저런 뻔뻔한 여인을 봤나!”

추길은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 그녀와 싸울 기세였다.

“우리가 지금 나가서 욕으로 응수하면 사람들은 우리가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생각할 게다.”

엽연채는 해바라기씨 한 줌을 나눠 주며 그런 그녀를 말렸다.

“쫓아내 봤자 꿈쩍도 안 할 테니 놀게 내버려 두거라.”

그들이 문을 열지 않자 진 마마는 더욱 기고만장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저희 마님께서 정안후부로 들어가니 속이 편치 않으시다는 거 잘 압니다. 그러나 원래 저희 마님이 정실부인이었고 그 사실은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송화 골목에서 지낼 때 마님께서는 저희를 찾아와 몰아붙이셨죠.

그러나 저희 마님은 마님을 난처하게 만들고 싶어서 이러시는 게 아닙니다. 그저 집안의 화목을 위해 이러시는 것뿐입니다.”

밖은 이미 백성들이 한가득 모여들어 있었다. 그들은 진 마마의 이야기를 듣더니 혀를 차고 한숨을 쉬며 수군거렸다.

“온씨라는 사람 말이야. 독하고 옹졸한 사람이네.”

“저희 마님이 치욕을 참으며 사람들에게 첩실이라는 오해를 받으실 때, 작은 마님은 저희 마님이 정실부인인 걸 알고 계셨잖습니까. 그래서 거듭 저희를 찾아와 몰아붙였던 거죠. 이제 더는 참으려야 참을 수가 없어 마땅히 가졌어야 했을 것들을 되찾아 온 건데, 작은 마님은 그걸 견디지 못하고 이렇게 도망쳐 나오신 겁니다.”

진 마마가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나니 백성들은 은정랑은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하고 온씨에게는 욕을 했다. 진 마마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우쭐거리더니 흐뭇한 마음으로 그곳을 떠났고 백성들도 차차 자리를 떴다.

* * *

정안후부의 놀라운 소식은 강왕이 도성으로 돌아왔다는 소식과 함께 여러 요릿집과 공연장에서 세인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엽균이 정안후부에서 쫓겨난 후, 은정랑과 허서는 다시 송화 골목으로 돌아갔다. 출가하는 날까지 그곳에서 지낼 참이었다.

이날 은정랑과 허서는 밖으로 나가 옷감을 고르고 몸 치수를 재며 옷을 한가득 준비했다. 이제 정안후부로 입적되면 정실부인과 적자로 살게 되니 당연히 입고 지낼 의복을 새로 마련해야 했다. 엽학문은 통 크게 은화 일천 냥을 그들에게 주며 의복과 장신구 등을 마련하라고 했다.

두 사람은 밖에서 한나절을 이상을 보낸 후, 저녁 어스름이 깔리자 아예 식사까지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진 마마가 등롱을 들고 그들 앞에서 길을 비추었고, 뒤로는 우락부락한 어멈 둘이 여러 가지 물건을 들고 따라오고 있었다. 은정랑 모자는 중간에 서서 천천히 걸어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동안 그들은 이렇게 당당하게 대로를 걸어 본 적이 없었고 이렇게 후련한 마음으로 길거리를 돌아다녀 본 적도 없었다. 전에는 밖에 나가면 늘 사람들의 멸시 어린 눈빛을 받았는데 이젠 사람들마다 공손하게 행동할뿐더러 치욕을 견디며 지내 온 마음 넓은 사람이라고 칭찬까지 했다. 그럼에도 은정랑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머리 장신구와 네 의복 장신구를 사는 데만 대략 칠백 냥 정도의 은화를 썼다. 남은 삼백 냥으로 뭘 하겠느냐?”

“할아버지께서 유월에 전세田稅와 토지세가 올라온다고 하셨어요. 그때가 되어야 집안 살림이 좀 넉넉해질 거예요.”

허서는 그리 말하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전에 네 아버지가 정안후부는 늘 수입보다 지출이 많다고 했는데 그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정말로 그렇구나. 대체 이게 무슨 후부란 말이냐! 어쩜 이리 가난할 수가 있어!”

은정랑은 옅은 한숨을 쉬었다.

과거 그녀가 시골에서 살 때는 다들 찢어지게 가난한 농민들뿐이었다. 시골의 부호라고 해 봤자 집안에 은화 몇십 냥 있는 게 고작이었다. 그녀의 집안은 은화 몇십 냥을 가진 부호에서 빈털터리가 되었고, 가산을 다 팔아 버려 남은 거라곤 척박한 밭 두 묘畒뿐인 가난한 집이 되어 버렸다.

당시 남은 거라곤 그 척박한 밭뿐이라 하는 수 없이 다른 사람의 밭에서 소작할 수밖에 없었고, 그때 그들이 소작했던 밭은 바로 어떤 후부의 별장에 딸린 밭이었다.

매년 여름이 되면 밭에서 일하던 그들은 아들딸을 데리고 별장으로 놀러 온 그 후부의 부인을 보게 되었다. 앞에선 길을 열고 뒤에선 수많은 하인들이 부인을 따랐으며 그녀는 화려하고 귀한 의복과 장신구를 걸치고 차고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후부와 공부公府는 화수분(재물이 계속 나오는 보물단지)을 가진, 먹고 입을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대궐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 와 보니 후부와 공부도 평범한 백성과 다를 바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들 중에도 가난한 집이 있고 부유한 집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은정랑은 얼른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도 오늘 같은 날이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꽤 괜찮은 수확을 거둔 셈이었다. 정안후부는 본인이 상상했던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자신의 신분으로 허서까지 데리고 지금의 결과를 얻은 것만으로도 이미 꿈같은 일이라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야, 아직 기억하느냐? 네가 어릴 때 우리가 소작하던 곳이 어떤 후부의 땅이었다는 거 말이다. 그때 네가 왜 하필이면 대지주나 소지주의 땅이 아닌 후부의 땅을 소작해야 하냐고 물었었지. 매년 여름 그 사람들의 부유한 생활에 주눅 들면서 말이야. 어쩌면 하늘이 우리에게 준 암시였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우리도 그런 생활을 누리게 될 수 있을 거라는 암시 말이지.”

은정랑은 그리 말하며 입술을 씩 올렸다. 후부의 정실부인과 적자가 되는 날이 오리라고 그때는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맞아요! 모든 게 다 운명으로 정해져 있던 거죠.”

허서도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자는 요 며칠 동안 일어난 일이 가져다주는 기쁨을 만끽하며 천천히 송화 골목으로 들어섰고 이어 영존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때, 앞에서 등롱을 들고 가던 진 마마가 미간을 찌푸렸다. 영존거 맞은편 나무 아래에 키가 크고 건장한 사람이 서서 멍한 눈빛으로 영존거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존거 대문 양쪽에 걸린 진홍색 등롱 두 개에서 불빛이 조금 새어 나와 그자를 비추자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러나 얼굴이 또렷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마님, 도착했으니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요.”

진 마마는 경계 어린 눈빛으로 그 사내를 쏘아봤다.

‘오밤중에 왜 여기에 서 있는 거야? 보아하니 좋은 사람 같지는 않은데!’

진 마마는 서둘러 은정랑을 보호하며 영존거 대문 앞으로 걸어갔다. 은정랑은 그 사람을 힐끗 쳐다보더니 더는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진 마마를 따라 걸어갔다.

그런데 은정랑이 몸을 돌리자 갑자기 그 사내가 굵고 묵직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정랑!”

그 목소리에 은정랑은 순간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정랑, 날 못 알아보는 거요? 서가… 이렇게 커 버렸다니.”

이때, 그 사내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재차 말했다.

은정랑은 질겁했고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돌아서서 그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사십 대 전후로 보이는 이 사람은 평범한 외모에 수염이 지저분하게 자라나 있고 어두운 색의 간편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가 은정랑을 빤히 응시하자 그녀는 사색이 되어서 뒤로 한 발 쓱 물러섰다.

“그, 그럴 리가……!”

“마님! 왜 그러세요?”

진 마마 등은 깜짝 놀랐고 허서는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는 이 사내가 한 말을 재빠르게 포착했다.

그는 왠지 모르게 묘한 느낌이 들었고 또 안 좋은 예감이 들어 얼른 은정랑을 자신의 뒤로 숨겼다.

“어디서 굴러온 호색한이냐?”

진 마마가 앞으로 다가서며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넌 누구냐? 누군데 감히 우리 마님의 존함을 함부로 불러대는 것이냐?”

“가자! 어서 가자꾸나!”

이미 정신줄을 놓은 듯한 은정랑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침 영존거 문이 열려 있어 그녀는 서둘러 정신없이 문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진 마마도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치더니 황급히 은정랑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쾅’ 하는 큰 소리와 함께 영존거의 대문이 굳게 닫혔으나 은정랑은 여전히 이 상황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두려움에 온몸을 덜덜 떨었고 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허서는 단 한 번도 이렇게 당황하고 겁에 질린 모친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서둘러 그녀를 부축하며 물었다.

“어머니, 왜 그러세요?”

“마님, 괜찮으신 거예요?”

진 마마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나… 난 괜찮으니 진 마마는 주방에 가서… 먹을 것 좀 만들어 주게.”

은정랑은 풀린 다리를 이끌고 겨우겨우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다. 진 마마는 걱정이 되었으나 일단은 돌아서서 주방으로 향했다.

허서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따라가며 말했다.

“어머니, 무슨…….”

“어떻게 이런 일이……. 불가능한 일이다! 절대 이럴 리가 없어!”

은정랑은 침상에 웅크리고 앉아 자신의 몸을 꽉 안았다.

“어머니,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허서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깜짝 놀라 물었다.

“방금 전 그 사내는… 누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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