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9화
엽영교와 묘씨 등은 엽균이 사정없이 두들겨 맞는 모습을 보고는 조금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전에 그가 했던 못된 짓거리를 떠올려 보니 통쾌한 기분이 훨씬 더 크게 느껴졌다.
사람들은 잇달아 그 자리를 떴다. 엽학문은 처참한 모습의 엽균을 보고 있자니 그래도 마음이 좀 쓰렸다. 하지만 그는 단국공부 사람들의 치사하고 집요한 수법을 잘 알았다.
‘제대로 벌을 주지 않았다면 아마 또다시 찾아와 소란을 피웠을 것이고 그리되면 허서에게도 영향이 미쳤을 것이다.’
엽학문은 그런 생각이 들자 콧방귀를 뀌고는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엽균은 바닥에서 일어서지도 못하고 있었다.
“흑……. 내 다리… 내 다리가…….”
허서는 그쪽으로 걸어가 그의 앞에 쭈그리고 앉더니 입꼬리를 쓱 올리며 조롱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넌 이제 데리고 놀 만큼 놀았다.”
“뭐?”
엽균의 머릿속에서 굉음이 진동하는 것만 같았다.
“균아, 괜찮은 게냐? 몸조리 잘해야 된다. 그래야 또 우리에게 기쁨을 선사하지.”
은정랑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허서를 거들었다.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는 모를 것이다. 너는 매번 온씨를 배신하고 우리를 보러 왔고, 심지어 온씨에게는 떡 한 덩이도 안 사 주면서 나에게는 늘 한매수정고를 사다 주지 않았느냐!
이렇게나 효심이 지극한데 내가 어찌 널 안 좋아할 수가 있겠느냐? 생각해 보면 넌 친어머니마저 돌보지 않고 일편단심 우리에게만 잘해 주었지. 우리에게 완전히 놀아나는 널 보며 난 큰 성취감을 느꼈단다.
온씨가 뭔데? 나보다 예쁘고 출신이 좋으면 뭐 하겠느냐? 그래 봐야 남편의 몸과 마음은 전부 나에게 향해 있고 아들마저도 우리 때문에 어머니와 척을 지는데 말이다! 온씨가 우리 때문에 분통이 터져 각혈하는 모습을 봤을 때 난 정말이지 크나큰 성취감을 느꼈단다. 그러니 몸조리 잘하거라. 난 너랑 더 놀고 싶단다! 하하하!”
엽균은 아파서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은정랑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바늘처럼 그의 마음을 콕콕 쑤셔 대니 정신을 잃으려야 잃을 수가 없었다. 득의양양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다 나왔다.
“하, 하하…….”
그랬던 것이었다. 자신은 늘 그들이 제 호의에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의기양양해하며 저를 비웃고 있었다. 자신은 그저 그들의 손에 쥐어진 패나 다름없었다. 자신이 순순히 맞춰 줄수록 그들은 더욱 즐거웠을 것이다. 그래야 이쪽의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더욱 고통스럽고 괴로워할 테니 말이다.
알고 보니 모든 게 진짜였다. 다만 자신이 계속해서 믿고 싶어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사실은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다. 그들이 정안후부로 입성한 그 순간, 이전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리란 것을 말이다.
앞으로 집안의 대를 이을 것이니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 허서는 가진 게 하나도 없으니 시험을 봐서 공명을 얻어야 한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이었다. 사실은 저를 자만에 빠지게 하여 장래를 망쳐 놓고, 허서는 출세하게 만들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기 위해서였다.
아이를 데리고 밑바닥에서 발버둥 치며 살았던 가련한 과부가 자신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며, 그저 첩실 자리를 얻어 그의 아버지 곁에 계속 머무를 수만 있으면 된다는 말은 다 거짓이었다. 이 야심만만한 사람들은 자신의 동정심을 이용해 정안후부에 입성한 후 자신과 어머니, 누이동생을 사지로 내몰려고 했던 것이다.
허서와 은정랑이 떠난 후, 초주검이 되도록 매를 맞은 엽균은 고통 속에서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 가운데 누군가가 자신을 옮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흔들리는 마차를 타고 한참을 가서야 그는 차디찬 곳에 내동댕이쳐졌다.
엽균은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이런 고통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뭐 이렇게 죽어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싶었다. 어차피 더 이상 얼굴을 들고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니.
그런데 이때, 작은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엽균이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떠 보니 가녀린 사람 형체가 그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다가와 앞에 멈춰 서는 게 아닌가. 곱고 아리따운 소녀가 허리를 숙이고 그를 빤히 쳐다보더니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오라버니.”
“여… 연채야…….”
엽균은 그녀를 보더니 그만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악!”
이어서 엽균의 자지러지는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엽연채가 발로 그의 상처 부위를 밟았기 때문이다!
“아파요?”
엽연채는 낄낄거리며 웃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나와 어머니도 아프거든요!”
“미안하다…….”
눈물이 엽균의 앞을 가렸다. 그는 팔뚝 위로 얼굴을 묻은 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정신 차린 거예요?”
엽연채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신 차렸다. 내가 그것들한테 속은 거였어……. 그것들을 믿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엽균이 하염없이 눈물을 쏟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어리석…….”
엽연채는 꽃다운 얼굴을 싸늘하게 굳히더니 몸을 숙여 그의 뺨을 ‘짝’ 소리가 나게 후려쳤다.
“아니요. 오라버니는 아직 정신을 못 차렸어요.”
엽균은 자신이 왜 정신을 못 차렸다고 하는 건지 알 수 없었으나 감히 그녀의 말에 반박할 수는 없었다. 이어 엽연채의 얼음장 같은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귀에 꽂혔다.
“은정랑과 허서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던 건 그들이 대단한 술수를 썼기 때문이 아니에요. 운 좋게도 오라버니 같은 팔푼이를 만났기 때문이죠! 오라버니는 그들을 믿지 말았어야 했지만, 그보다 더 하지 말았어야 할 행동은 바로 책임을 회피하고 자신의 소임을 다 하지 않은 것이에요.
오라버니는 은정랑 모자를 도울 때 무슨 생각을 했었나요? 가련하고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니 오라버니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나요?
오라버니는 저희한테 케케묵은 생각을 갖고 있으며 공명과 관록만 좇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은 후부의 가산을 물려받는다는 생각을 하며 득의양양해했죠. 입으로는 평등을 외치며 다 같은 사람이라고 해 놓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은 후부의 적자이니 향후 후작의 지위와 가산을 물려받게 될 거라고 생각하며 우쭐거렸을 거예요.
그래서 자기는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고, 허서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 괴로움을 견디며 공부를 해서 위로 올라가는 수밖에 없다고 안 되었다고 여겼죠. 매번 이런 생각을 하며 우월감에 도취되어 있었죠?
다른 공자들이나 서원 동문들과 어울리는 걸 싫어하고 하루 종일 송화 골목에 처박혀 있으려고만 했던 것도 그곳에 있어야만 자신이 높은 데서 남을 내려다보는 듯한 우월한 존재로 느껴졌기 때문이겠죠.
오라버니는 머저리일 뿐이에요. 위로 올라가기 위한 고생을 견디고 싶지 않았고, 자신의 무능함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온종일 송화 골목에 처박혀서 우월감이나 찾고 있었던 거죠.
어디 그뿐인가요? 무능한 놈이면 무능한 놈답게 가만히나 있을 것이지 자신이 무슨 위대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남들과는 다른 사람인 것처럼 거들먹거리며 다녔죠!”
엽균은 너무도 부끄럽고 분했다. 귀를 틀어막고 듣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녀의 말은 그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결국 그는 체념하고 그녀의 말을 모두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내뱉는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엽균은 마침내 완전히 깨닫고는 땅 위에 엎드려 목 놓아 울었다. 엽연채는 콧방귀를 뀌고는 밖에 있는 경인에게 말했다.
“끌고 가거라!”
경인이 다가와 엽균을 끌어내려고 하는데 그가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었다.
“싫다……. 난 돌아가지 않을 거다. 날 죽게 내버려 두거라! 어차피 이렇게 되어 버리지 않았느냐……. 난 무능한 놈이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그럼 이제 제가 그 무능한 놈을 이용해 봐야겠군요!”
엽연채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능한 놈도 한 군데 쓸데가 있거든요. 끌고 가서 치료를 마친 후에 여인을 구해 혼인을 시킬 거예요. 그리고 손주를 낳아 어머니께 안겨 드리는 거죠.”
엽균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리고…….”
엽연채는 쭈그리고 앉더니 핏기가 하나도 없는 창백한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정말이지 꼴사납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다.
“오라버니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오라버니는 어머니의 아들이에요! 오라버니가 아무리 못돼 먹은 놈이고 형편없어도… 어머니는 여전히 오라버니를 사랑하세요. 이 세상에서 어머니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오라버니라고요.”
엽균은 그 말을 듣더니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그는 몸에서 느껴지는 통증도 개의치 않고 대성통곡했다.
“내가 잘못했다, 잘못했어…….”
“데려가거라.”
엽연채가 몸을 홱 돌리자 이미 들것을 가져온 경인과 여한은 엽균을 그 위에 올렸다. 그러고는 낡은 사찰 밖으로 나와 그를 마차 위에 실었다.
“아가씨, 집으로 가실 건가요?”
경인이 물었다,
“내 별장으로 데려가거라. 몸이 회복되면 다시 이야기하자.”
‘이 꼴이 되어 버렸으니 어머니가 알게 되면 마음 아파하실 테지.’
마차 안에 실린 엽균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고, 경인은 마차를 몰고 별장으로 향했다. 엽연채는 또 다른 마차를 타고 장명가에 위치한 추씨 가문으로 향했다.
지난번 주운환이 엽연채와 온씨를 데리고 정안후부를 나선 후 그들은 주씨 가문이 아니라 추씨 가문으로 갔다. 그리고 엽연채는 지금 온씨와 함께 그곳에서 지내고 있었다. 주씨 가문은 추씨 가문보다 사람이 많아 말이 많을 테고, 또 그곳에서 지내게 되면 진씨가 그들을 얼마나 비웃을지 모를 일이었다.
추씨 가문 사람들은 원래 정월대보름 이후 떠나려 했는데 추경이 요성寥城에서 사업차 볼일이 있어 서둘러 돌아가지 않고 쌍둥이 형제만 정성으로 돌아갔다. 이월 말에 요성으로 향한 온사월과 추경, 추랑 형제는 아직 집으로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온씨는 아직 엽균의 일을 모르고 있었다. 엽연채만 엽영교가 보내 온 사람을 통해 엽균이 정안후부에서 쫓겨난 일을 한발 먼저 알게 된 것이었다.
온씨는 궁명헌에서 혜연과 함께 구럭을 뜨고 있었다. 그녀는 엽연채가 돌아오는 모습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디 갔다 오는 길이냐?”
“오라버니가 집에서 쫓겨났어요.”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그녀 옆에 앉았다. 온씨는 순간 멍해지더니 이내 가슴이 조여들었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런 날이 올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자신도 허서를 받아들일 수가 없는데 은정랑이 어찌 엽균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녀는 말없이 한참을 있다가 재차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지금… 균이는 어찌 되었느냐?”
“두들겨 맞아서 다리를 다쳤어요. 상처를 치료하고 몸조리를 하라고 지금 제 별장으로 보냈어요. 괜찮을 거예요.”
엽연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알려 주자 온씨는 마음이 아파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오라버니가 잘못했다고 반성했으니 앞으로는 어머니께 효도할 거예요.”
온씨는 이 말을 듣더니 더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잘못한 걸 알았으면 그걸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