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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268화 (268/858)

제268화

“단국공부라고 했느냐?”

상석에 앉아 있던 엽학문은 미간을 찡그리더니 이내 기뻐하며 말했다.

“어서 본채로 모시거라.”

단국공부는 과거 황제를 따라 천하를 제패했던 일등공신이었다. 벌써 수십 년이 지난 일이지만 황제는 여전히 제왕의 창업創業에 힘을 보탰던 그의 공을 마음에 두어 총애를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때로는 단국공의 한마디가 황제의 뜻을 좌지우지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그 단국공부 사람이 정안후부를 방문한 것이다. 엽학문이 감히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이렇게나 좋은 일이 일어나다니.

“서야, 어서 가서 뵙자꾸나.”

엽학문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권세와 지위가 높은 사람과 친분을 쌓을 수 있게 되다니, 허서에게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허서는 상기된 얼굴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정안후부가 아무리 별 볼 일 없다 하더라도 어쨌든 후부이니 자신에게 많은 인맥과 기회를 가져다줄 모양이었다.

“그런데…….”

유이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분들께서 지금 이쪽으로 몰려오고 계십니다. 보아하니 좋은 일로 오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엽학문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째서…….”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누군가가 건들건들한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정안후부 세자의 아들은 어서 밖으로 튀어나오거라!”

엽학문과 묘씨 등은 어리둥절해하더니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나갔다. 나가 보니 일상원 문 앞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하인 몇 명이 커다란 활간滑杆(가마의 일종으로, 자리의 사방이 트여 있음)을 들고 있었고 키가 작고 뚱뚱한 한 청년이 그 위에 앉아 있었다.

스물일곱 정도 되어 보이는 이 사내는 엽전 무늬가 들어간 초록색 비단옷을 입고 있고 우락부락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곁눈질로 힐끔 쳐다보니 굵은 넓적다리에 흰 붕대를 칭칭 감고 있어 한눈에 다리를 다쳤음을 알 수 있었다.

엽균과 허서는 활간에 누워 있는 사내를 보더니 안색이 확 변했다. 그는 바로 춘시 결과 발표 날에 자신들과 몸싸움을 벌였던 자였다.

‘이 사람이 단국공부 사람이란 말인가?’

엽영교와 엽승신 내외, 엽승강 내외도 이미 소식을 듣고 이곳으로 달려와 있었다. 그들은 험악한 분위기를 풍기는 한 무리를 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뉘신지…….”

엽학문이 미간을 찌푸리며 운을 뗐다. 이에 잘 갖춰 입은 집사가 앞으로 한 발 내딛더니 냉랭한 목소리로 신분을 밝혔다.

“이분은 저희 단국공부의 둘째 나리이십니다.”

엽학문은 이 말을 듣더니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이 ‘둘째 나리’는 단국공부 셋째 아들이 낳은 적장자였고, 셋째 아들 또한 적출嫡出인지라 단국공부에서도 아주 귀하게 여기는 자손이었다.

엽학문은 단국공부에서 사람이 왔다고 하기에 점잖고 고상한 사내들이 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도성에서 한량으로 유명한 그가 올 줄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저… 곽 공자께서 무슨 가르침을 주시려고 이곳에 오셨는지요?”

엽학문이 허허 웃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네게 가르침을 주려고 왔!”

곽 씨는 ‘흥’ 소리를 내며 사납게 소리쳤다.

“지난번에 이 몸의 다리를 부러뜨린 놈이 누구냐? 썩 튀어나오거라!”

“예?”

엽학문은 깜짝 놀라 순간 멈칫했고, 다시 곽 씨를 쳐다보니 그의 다리는 붕대로 겹겹이 감싸져 있었다. 그는 그 모습을 확인하더니 낯빛이 확 변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저희 정안후부 사람들은 모두 점잖은 사람들입니다.”

“지난번에 이 몸에게 부딪힌 것으로도 모자라 이 몸의 다리까지 부러뜨렸소. 날 때리면서 자신이 정안후부 세자의 아들이라고 큰소리를 치더군. 하하하. 아주 기세등등했지.”

곽 씨의 싸늘한 냉소에 허서는 깜짝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때 신분을 들먹이며 물러서라고 엄포를 놓은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곽 공자, 분명 다른 사람이 용서를 구하려는 마음에 함부로 저희 가문을 들먹였을 겁니다. 저희 정안후부 사람이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습니까?”

엽학문이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변명했다.

“함부로 떠든 거라니. 내가 분명… 아! 저것들이다! 바로 저것들이오!”

곽 씨는 허서와 엽균을 보더니 흥분하여 고함을 질렀다. 엽학문의 안색이 또다시 확 변했다.

“분명 오해일 겁니다.”

“후야.”

곽씨 가문 집사가 앞으로 한 걸음 내딛더니 엽균과 허서의 차림을 보고는 바로 그들의 신분의 알아차렸다. 그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희 나리가 다리를 못 쓰게 되실지도 모릅니다. 보세요. 어쩌실 겁니까? 오늘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시면 저희 단국공부는 끝까지 갈 겁니다!”

엽학문은 끝까지 간다는 말에 몸을 덜덜 떨었다. 단국공부는 상대하기 만만치 않은 집안이며 자신들의 결점은 철저히 감싸고도는 도량 좁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황제는 단국공부가 제왕의 창업에 도움을 준 공을 잊지 않고 그들을 좋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작년에 왕 시중侍中의 아들이 단국공부의 젊은 부인을 희롱했다가 파면을 당했고 지금까지도 왕씨 가문은 재기에 성공하지 못했다. 만약 이 일이 황제의 귀로 들어가게 된다면 정안후부는 끝장이 날 것이다.

엽학문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럼… 곽 공자는 저희가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어떻게 하길 원하냐고 물었소?”

곽 씨는 기가 차서 허허 웃더니 붕대로 칭칭 감긴 자신의 다리를 툭툭 치며 되물었다.

“후야의 생각은 어떻소?”

그 말에 엽학문은 흠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엽균의 뺨을 냅다 후려쳤다.

“이런 개망나니 같은 놈. 네가 한 짓거리를 보거라!”

“할아버지… 전…….”

그에게 뺨을 맞은 엽균은 휘청거렸다. 그가 아무리 어리석다 하더라도 지금 자신이 얼마나 큰 사고를 쳤는지 알 수 있었다.

“네가 벌인 짓이니 마땅히 벌을 받아야지! 여봐라, 가서 몽둥이를 가져오너라!”

엽학문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유이와 다른 하인들이 얼른 밖으로 뛰어나갔다.

“할아버지…….”

엽균은 엽학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둔하다 해도 이번 일은 간단히 매 한 대 맞는 걸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방금 전에 곽씨 가문 집사가 말하길 자기네 상전이 다리를 못 쓰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정말로 그런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 자신의 다리는 분명 못 쓰게 되고 말 것이었다.

“이런 개망나니 같은 놈, 하루 종일 말썽만 피우고 다니더니 곽 공자의 다리마저 부러뜨린 것이냐! 오늘 내가 네 다리를 분질러 놓지 않으면 내 성을 갈 것이다!”

엽학문이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엽균은 일이 자신의 예측대로 돌아가는데도 여전히 멍하니 서 있었다. 애초 곽 씨가 지목한 사람은 두 사람 아닌가. 그의 말대로 자신과 허서가 같이 벌인 일인데 할아버지는 왜 자신의 뺨만 때리신단 말인가?

이때, 유이를 비롯한 하인들 몇 명이 커다란 몽둥이 두 개를 들고 걸어왔다.

“치거라!”

엽학문이 조금의 온정도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그러자 하인들은 얼른 엽균을 자빠뜨린 다음 엽균의 왼쪽 다리 위로 커다란 몽둥이를 힘껏 내려쳤다.

“악!”

엽균이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이어서 두 대, 세 대……. 몽둥이는 인정사정없이 그의 몸 위로 내리꽂혔다. ‘퍽’ 하고 들린 마지막 소리에 엽균은 자신의 다리가 이미 부러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도 매타작을 멈추지 않는 그들을 보니 자신의 다리를 못 쓰게 만들려는 게 분명했다.

엽균은 아파서 죽을 것만 같았고 마음속에선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으악! 제 다리는 이미 부러졌습니다! 부러졌다고요! 공자… 지난번에 제가 공자의 다리를 부러뜨렸으니… 이제 갚은 셈이지요…….”

그러나 곽 씨는 냉소를 지으며 반박할 따름이었다.

“그쪽을 때리는 건 그쪽 할아버지인데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그쪽 할아버지가 그쪽을 놓아주길 원한다면 그리 말하면 되는 거 아니겠소!”

“할아버지! 할아버지…….”

엽균은 울부짖으며 애원하는 눈빛으로 엽학문을 쳐다봤다. 그러나 엽학문은 단국공부가 너무도 무서웠고 엽균 이 개망나니 놈도 몹시 밉살스러웠다. 이런 사고를 치다니! 싸돌아다니며 사고만 치는 골칫덩어리이니 이참에 다리를 못 쓰게 만들어 버리면 깔끔하게 정리될 것이 분명했다.

엽균은 꿈쩍도 하지 않는 엽학문을 보고는 놀랍고 또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때 멀찍이 서 있는 허서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표정을 지은 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었다.

“허서 형님……! 곽 공자를 때린 게 나이기는 하지만 형님 때문에 내가 그리한 게 아닙니까……! 할아버지는 형님을 아끼시니… 형님이 할아버지를 말려 줘요!”

속으로 덜덜 떨고 있던 허서가 냉랭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균아, 난 그때 너보고 사람을 때리라고 한 적이 없다! 네가 저분의 다리를 부러뜨렸으니 당연히 앙갚음을 당하는 게지.”

“이, 이런!”

엽균은 그 말을 듣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난 다 형님을 위해서 그런 거예요! 다 형님을 위해서 그랬다고요! 형님이 두들겨 맞고 있으니… 내가 형님을 도와주러 나선 겁니다! 형님은 내 형제인데 형님이 수모를 당하는 꼴을 내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 내 다리가 못 쓰게 될 지경인데… 형님은 어째서…….”

“서는 너보고 말썽을 일으키라고 한 적이 없다……. 흑흑… 넌 어쩜 그리 악독한 마음을 가진 게냐. 기어코 서를 끌어들여야 속이 시원하겠느냐?”

은정랑은 세상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런 못된 놈을 봤나. 금수만도 못한 놈!”

엽학문은 허서를 끌어들이려 한다는 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당장 밖으로 쫓아내거라. 저 녀석은 더 이상 이 엽학문의 손자가 아니다.”

“악!”

이때, 엽균이 또다시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그의 왼쪽 다리는 이미 피로 흥건히 젖어 있고 본래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밖으로 내다 버리거라!”

엽학문은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치더니 고개를 돌려 곽 씨에게 공수를 하며 말했다.

“저 빌어먹을 손자 놈에게 벌을 내리고 집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좋소.”

곽 씨는 ‘하하’ 냉소를 터트리더니 허서를 쳐다보고 ‘흥’ 소리를 내며 한마디 했다.

“뻔뻔하기는! 가자!”

곽 씨는 허서도 눈에 거슬리기는 마찬가지라 그 역시 제대로 손봐 주고 싶었지만, 한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린 것만으로도 이미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보복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이상 손을 대면 너무 과한 처사가 된다.

‘내 다리를 부러뜨린 당사자에게는 대갚음해 주었으니, 뭐.’

곽씨 가문 하인들은 주인이 타고 있는 활간을 들어 올린 후 위풍당당하게 그곳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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