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267화 (267/858)

제267화

“그만 일어나거라!”

엽학문이 미소를 지으며 은정랑 모자에게 말했다.

“이제 뜰을 비우고 청소를 할 것이다. 잠시 후에 가서 한번 보거라. 어디가 좋을지 직접 골라야지.”

“그럼 정랑은 어디서 지내나요? 영귀원이 후원의 중심이니 정랑이 그곳에서 지내야겠죠?”

엽승덕의 말에 묘씨가 미간을 찌푸리며 우려를 표했다.

“온씨가 그곳에서 20년 가까이 지냈다. 그렇게 오래 지냈으니… 곳곳에 그 아이의 흔적이 가득할 게다. 은씨 네가 그곳에 들어가 지내면 불편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은정랑은 개의치 않는단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머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지내야 하는 곳이면 그곳에서 지내야 하죠. 전 개의치 않습니다.”

묘씨는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영귀원을 청소하자꾸나!”

엽학문이 말했다.

“서야, 어서 밖으로 나가 한번 둘러보거라. 그리고 네가 지낼 처소를 골라 내게 알리거라. 그럼 서둘러 정리를 하게 할 것이다.”

허서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자신의 시동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반 시진 후, 허서가 돌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할아버지, 전 등고루登高樓가 마음에 듭니다. 방향도 좋고 2층 높이의 건물 양쪽으로 대나무가 자라나 있어 송화 골목에 있는 제 방과 아주 흡사합니다. 그곳에 들어가면 빨리 적응할 수 있을 거예요.”

“오, 그럼 그곳으로 하렴.”

엽학문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묘씨를 쳐다보며 일렀다.

“지금 사람을 시켜 그곳을 정리하게 하시오.”

묘씨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눈을 번득였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전 마마, 여종들 몇 명을 데리고 등고루로 가서 그곳을 정리하게나.”

“예, 마님.”

전 마마는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이각쯤 지나 밖에서 돌아온 엽균이 자신의 처소로 들어갔는데, 여종 몇 명이 자신의 물건을 치우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뭣들 하는 짓이냐? 감히 내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다니!”

엽균은 격노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그러자 전 마마가 눈의 흰자를 보이며 대답했다.

“큰도련님께서… 그러니까 허서 도련님이 이곳에서 지내겠다고 하시니 도련님은 처소를 옮기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말에 깜짝 놀란 엽균은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고 대번에 안녕당으로 뛰어갔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묘씨와 엽학문이 상석에 앉아 있고 은정랑, 허서, 엽승덕이 하좌에 앉아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방 안은 웃음소리가 가득해 더없이 즐겁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엽균은 씁쓸한 기분에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할아버지,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제 처소를 옮기고 서보고… 제 처소에서 지내라고 하시다니요.”

“어?”

엽학문은 그제야 등고루가 엽균의 처소였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그의 시선이 허서에게로 저절로 향했다.

엽균은 엽학문의 그런 모습을 보더니 그가 상황을 전혀 몰랐다는 걸 알아채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서야……. 아니, 형님, 그곳은 제…….”

“아, 그곳이 너의 처소였니?”

허서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미안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럼 그곳으로 안 가마.”

그러자 엽학문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다른 곳을 다시 골라 보거라.”

그 말에 허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서책을 볼 때 장소를 꽤 가리는 편입니다. 전에 송화 골목과 상주에서 지낼 땐 장소가 좋아 책을 보고 글을 짓는 데 영감이 절로 떠오르곤 했습니다.

그런데 정안후부는 이곳저곳을 다 둘러보았는데 등고루를 빼고는 저에게 영감을 주는 장소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당분간은 거처를 옮기지 않으려고 합니다. 제가 진사로 합격을 하면 다시 정안후부로 들어오겠습니다!”

“뭐라?”

엽학문은 깜짝 놀라 그를 만류했다.

“그럴 수는 없다! 다음 춘시까지 3년이나 남았는데 또 밖에서 3년을 지내겠다는 말이냐?”

그러나 허서는 고집을 부리며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아무튼 이곳은 익숙지 않습니다.”

“균이 너는 글을 쓸 일이 없으니 네가 옮기거라.”

엽승덕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싫습니다! 제가 왜 옮겨야 합니까!”

엽균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허서가 형이 되고 저를 대신해 가문의 대를 잇게 된 후로 그는 계속 답답하고 울적한 마음이 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처소를 옮기는 것 따윈 개의치 않았을 텐데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전 옮기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서는 적장자인데… 밖에서 지내면…….”

은정랑이 막막한 표정을 지으며 걱정을 표했다.

“밖에서 또 무슨 말을 지어낼지 모릅니다. 어쩌면 서가 사실은… 사실은 엽씨 가문 핏줄이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럼 저희 정안후부의 평판은…….”

“그럼 제가 들어와야겠네요. 그러나 등고루는 균이의 처소이고 균이가 원치 않으니 제가 다른 곳에서 지내야겠죠. 서책을 읽고 글을 쓰는 건…….”

허서는 억울하고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제가 공부를 접겠습니다! 접으면 되죠!”

“이!”

그 말을 들은 엽균은 피를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이 말은 어째 너무 익숙하게 들렸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해 보더니 그만 흠칫하고 말았다. 어디서 들었는지 생각이 난 것이다.

허서는 전에도 똑같은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바로 온씨가 영존거를 방문해 이들 모자를 정안후부로 들이려고 했을 때였다. 그때 허서는 정안후부로 들어가면 공부에 집중할 수 없지만 자신을 닦달하는 온씨의 뜻에 따르지 않을 방도도 없으니 공부를 그만두겠다고 했었다.

그때 자신은 그 말을 듣고 허서가 너무 안됐고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너무 가증스럽다고 느꼈었다. 분명 허서가 공부를 하지 못하도록 핍박해 과거 시험을 치를 수 없게 하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그 이야기가 자신에게 돌아온 것이다. 게다가 자신은 허서에게 공부를 그만두라고 몰아붙이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자신부터도 전에는 그렇게 여겼으니 말이다.

“무슨 망발을 하는 게냐! 네가 왜 공부를 접어! 균이 네가 한 짓을 보거라! 잘하는 짓이구나!”

엽학문은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치더니 엽균이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라도 지은 양 그를 노려봤다. 그러나 그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전… 할아버지…….”

엽균의 머릿속에서 ‘쾅’ 하고 굉음이 울려 펴졌다.

지금의 할아버지는 그때의 자신과 대단히 비슷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은 당시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입장이 되어 버렸다. 억울하고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이 모든 감정을 어머니와 누이동생은 그때 느꼈을 것이다. 그때 자신은 대체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아버님, 괜찮습니다…….”

은정랑은 눈물을 흘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와 서는 아직 밖에서 지내니… 사람들에게 정안후부로 안 들어가는 게 아니라 과거 시험 때문에 공부에 더 집중하기 위해서 들어가지 않는 거라고 잘 말하면 될 겁니다. 12년이라는 세월 동안 저는 이렇게 버텨 왔습니다.”

“그럴 수는 없소.”

엽승덕이 써늘한 눈빛으로 엽균을 쏘아봤다.

“네 어머니가 얼마나 가여운 사람인지 보거라. 홀몸으로 고생스럽게 허서를 키웠는데 넌 이런 사소한 것도 이해해 주지 못하는 게냐. 정말 악독하고 몰인정하구나!”

엽균은 어안이 벙벙했다. 악독하고 몰인정하다? 자신의 어디가 그렇다는 것인가? 자신이 무슨 천인공노할 짓이라도 저질렀다는 말인가? 아니, 자신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저를 욕한다는 말인가! 엽균은 억울하고 괴로워 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차마 울지는 못했다. 자신도 전에 이렇게 누이동생과 어머니를 욕하지 않았던가.

“됐다. 처소를 바꾸면 죽기라도 한단 말이냐? 억울해하며 옹졸하게 구는 모습이 네 어미와 판박이구나.”

엽학문은 냉랭한 목소리로 엽균을 닦아세웠다.

“그곳은 글공부를 하기에 가장 제격인 곳이다. 등고루 이 세 글자는 내가 직접 붙인 이름이다. 네가 열심히 학문을 익혀 장차 과거 시험에 붙고 관리가 되어 높은 자리에 오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리 지은 것이다. 그래서 너에게 그 뜰을 준 것이고.

그런데 네가 온종일 빈둥거리기만 하고 배운 것도 없고 재주도 없는 놈이 될 줄 어디 상상이나 했겠느냐? 내가 괜한 헛수고를 했던 게지! 지금 생각해 보니 이 뜰은 본래부터 네가 지내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그러니 서에게 주거라!”

물론 엽학문도 허서가 엽균을 억누르려고 일부러 이러는 줄 알았다. 그러나 허서가 그리하려고 하니 엽학문은 그의 뜻에 맞춰 주려고 했다. 허서가 정안후부에서 초장부터 본때를 보여 줌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허서는 존귀한 적장자이며 정안후부의 후계자임을 인식하게 하고, 엽승신 내외도 더 이상 설치지 못하게 막으려는 의도였다.

엽균은 너무도 답답하고 억울했다. 그가 고개를 들어 보니 허서는 여전히 울분이 가득한 굴욕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고 은정랑은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리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전에는 이 두 사람이 더없이 가련해 보였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할아버지!”

엽균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뭔가를 말하려는 찰나 엽학문이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그 입 다물거라! 서와 네 어머니는 그 오랜 세월을 억울하고 가난하게 지내 오다 이제서야 겨우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너는 출신도 좋고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물건을 쓰며 살아오지 않았느냐! 그리고 온 가족에게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 왔고! 지금 서와 네 어머니는 겨우 너에게 뜰 하나를 달라는 것뿐인데, 넌 그런 사소한 것을 두고도 이 두 사람과 다투려는 것이냐?”

엽균은 그 말에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다. 그러자 전에 온씨가 분을 못 이기고 각혈을 했던 일이 떠올랐다. 엽연채와 엽영교가 저를 나무라자 자신도 이리 쏘아붙이지 않았는가.

“이렇게나 가여운 정랑이 이제서야 겨우 잘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댈 데라곤 아버지와 아버지의 총애밖에 없는데 어머니는 이것조차도 정랑과 다투시려는 겁니까?”

그때 자신은 어째서 그런 말을 내뱉었던 걸까. 이런 일이 있고 나서야 자신은 그 말이 얼마나 뻔뻔스러웠는지, 또 온씨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을지 깨닫게 되었다.

허서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엽균의 모습을 보며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비웃음을 날렸다.

‘네가 뭐 어쩔 건데?’

자신이 그렇게 오랫동안 참아 왔는데 왜 또 참아야겠는가!

“후야!”

이때, 유이가 안으로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단국공부袒國公府에서 사람이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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