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6화
“그런데 그 온씨라는 사람이 성깔이 보통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게다가 자신은 귀족 출신이고 사위가 장원 급제자가 됐다는 걸 믿고 홧김에 정안후부를 떠났다고 들었어요. 절대로 정실부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아랫사람으로서 예를 올리지 않겠다는 뜻이죠.”
“듣자 하니 그 온씨라는 사람은 은씨가 외실로 지낼 때 그 사람이 정실부인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매번 은씨를 찾아가 그녀를 억누르고 정안후부로 들어와 첩실이 되라고 강요를 했다죠. 은씨를 확실히 첩실로 앉히려고 그런 겁니다. 그래야 정실부인이 자신을 억누르지 못할 테니까요.”
“와, 정말 악독하네요!”
백성들은 차를 마시거나 식사 후 휴식을 취할 때 이 사건뿐만 아니라 이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한 소식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건 바로 강왕이 도성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이었다.
강왕은 전쟁에 능하며 지략도 뛰어난 용맹한 이였다. 그는 대대로 서북에 군대를 주둔해 그곳을 지켜 왔는데, 서북은 서로와 인접한 곳이라 항상 서로군의 침입을 받았다.
작년 연말에 전쟁이 또 일어났는데 강왕은 중상을 입었고, 이때 남은 병력은 서로군에 포위 공격을 당했다. 서북 전체가 함락당할 뻔했는데, 다행히도 커다란 동추銅錘(구리로 만든 한 쌍의 병기로, 끝부분이 커다랗고 둥글어 거대한 망치처럼 생겼음)를 든 누군가가 목숨을 아끼지 않고 뛰쳐나와 전력을 다해 대세를 만회했다.
그 사내는 이후 서로의 군사들을 내몰 때도 용맹을 떨치며 꽤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번에 강왕이 도성으로 돌아온 건 소관 업무를 보고하고 그 사람을 위해 논공행상을 주청하기 위함이었다.
“듣자 하니 그 사내는 키가 8척尺에 달하고 건장하게 생겼으며 두 손에는 커다란 동추를 들었다고 해요.”
“한 사람이 전력을 다해 대세를 만회하고 서북을 지키다니! 대제에 큰 영웅이 탄생했어요!”
“듣기로는 성이 허씨라고 하던데요.”
“맞아요. 그 정도 전공을 세웠으면 어떤 관직이 내려질까요? 적어도 3품 장군은 되겠죠?”
사람들은 신바람이 나서 떠들어댔다. 얼마 전에 끝난 전쟁과 강왕 그리고 그 허 장군을 시시때때로 입에 담았다. 아직 작위가 내려진 게 아닌데도 장군이라는 칭호는 이미 그와 떼려야 뗄 수 없게 되었고 사람들은 모두 그를 ‘허 장군’이라고 불렀다.
“참, 오늘 궁으로 들어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왜 아직도 성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거예요?”
무대 아래에서 한 사람이 이리 물었다.
“황제 폐하께서… 지난번 합격자들에게 베푼 연회에서 바람을 쐬는 바람에 지금까지 와병 중이시라고 들었어요. 아직 다 회복하지 못하셨다고 해요. 적어도 폐하께서 병을 회복하셔야 도성 안으로 들어오라고 명이 내려질 거예요.
지금 강왕 전하 등은 성 밖에 위치한 도성을 수호하는 병영兵營에 머무르고 계신다고 해요. 황제 폐하의 용태가 좋아지시면 그때 폐하를 알현하고 작위를 받겠지요.”
“그랬던 거군요.”
사람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 * *
허서는 아주 득의양양했다. 집안에서뿐만 아니라 서원에서도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갔고 사람들을 만나면 온갖 질문과 칭찬을 받았다.
온씨가 집을 떠난 지 이틀째 되던 날, 허서는 서원에 가서 요 스승 등에게 선물을 건네며 감사 인사를 드렸다. 그가 스승들이 업무를 보는 방에서 나오자마자 함께 수학하는 벗들이 그를 빙 둘러쌌다.
“허 형, 사람들이 형을 첩실의 아들, 딸려온 의붓자식이라고 떠들어댔는데 형이 엽씨 가문의 적장자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제 본래의 부모 밑으로 입적을 하게 됐으니 참으로 경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 방금 전에 스승님은 무슨 일로 찾아뵌 거예요?”
허서가 의기양양하게 대꾸했다.
“좀 있으면 우리 할아버지께서 날 위해 국자감에 입학 신청서를 넣어 주신다고 했거든. 그래서 특별히 선물을 준비해 스승님들께 감사 인사를 전하러 온 거란다.”
그 말을 들은 그의 벗들은 부럽기도 하고 질투도 났으며 후회가 되기도 했다. 허서는 스물한 살에 과거 시험에 합격했으니 이 서원 안에선 이미 최고로 자리매김한 학자였다. 이 서원의 학자들 중 주운환이나 진지항 같은 천재는 아무도 없으니 다들 허서를 부러워하던 판국이었다. 그나마 그가 첩실의 아들이란 점이 위안을 주었는데, 이제는 처지가 완전히 역전되고 말았다.
여태 허서를 모욕했던 사람들은 따귀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고, 그를 더욱 시기했으나 감히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허서는 자신을 헐뜯었던 자들의 주눅 든 모습을 보게 되자 십 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허서와 친하게 지내던 한 벗이 말문을 열었다.
“허 형, 호사다마라고 하지만 끝까지 노력하니 이렇게 빛을 보게 되는 날이 오는군요. 참, 듣기론 강왕 전하께서 도성으로 돌아오셨는데 그중에 허 장군이라는 분이 있나 봐요. 다 성이 허씨네요. 어쩌면 형님의 친척일지도 모르죠! 하하하!”
그 말에 허서는 눈썹을 추켜세웠다. 그도 허 장군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라고 감탄해 마지않았었다.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거야?”
허서의 또 다른 벗이 대뜸 반박했다.
“허 형이라니. 엽 형이라고 불러야지! 그러니 그 장군이라는 사람은 성이 허씨여도 엽 형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인 게지.”
이때, 허서와 사이가 좋지 않은 통통한 동문 하나가 냉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쩌면 친아버지가 돌아온 것일지도 모르지.”
“그게 무슨 망발입니까?”
허서의 뒤에 서 있던 시동 위자가 차가운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저희 도련님은 정안후부의 적장자이시고 저희 마님은 절개가 굳은 분이십니다. 그러니 저희 마님께 감히 똥물을 튀기지 마십시오.”
그 동문은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으나 자신을 노려보는 다른 동문들의 눈길에 당황하여 콧방귀를 뀌더니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
허서는 조롱기 가득한 눈빛으로 줄행랑을 치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그러다가 갑자기 만약 정말로 자신에게 대장군인 아버지가 있었다면 엽승덕 밑으로 입적이 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허서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친아버지가 설령 정말 살아 있다 하더라도 장군이 됐을 리는 만무했다.
* * *
한편, 허서의 서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장명가가 위치하고 있었다. 푸른 덮개가 달린 조그만 마차가 사람들로 붐비는 대로를 지나 성문에 도착했고, 안에 탄 사람이 패자를 내밀자 바로 성문 밖으로 향했다.
마차는 대략 반 시진쯤 달려 작은 마을로 들어서더니 평범한 객줏집 문 앞에 멈춰 섰다. 마차 안에서 청수하면서도 화려하게 생긴 한 소년이 뛰어내렸고 이어서 장미처럼 요염한 자태를 뽐내는 한 소녀가 내려왔다. 다름 아닌 주운환과 엽연채였다.
“가시지요. 안에 계십니다.”
주운환이 이리 말하며 엽연채와 함께 요릿집 안으로 들어서자 점원이 그들을 2층 매화 귀빈실로 안내했다. 문 입구에 세워진 한매寒梅에 눈이 내리는 그림이 그려진 병풍을 돌아 들어가니, 위엄을 풍기는 잘생긴 사십 대 중년 사내가 늠름한 모습으로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바로 강왕이었다.
두 사람은 얼른 앞으로 다가가 그에게 예를 올렸다.
“강왕 전하를 뵈옵니다.”
“예의 차릴 것 없네. 어서 일어나시게!”
강왕은 두 사람을 쓱 훑어보더니 엽연채를 보고는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에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런 후에 그의 시선이 주운환에게 향했다.
“자네가 주씨 가문 아들인가?”
“예.”
주운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듣자 하니 장원 급제를 했다지.”
강왕은 이리 말하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개탄했다.
“주씨 가문 사람들도 이젠 과거 시험을 보다니 참으로 애석하구나.”
과거 주씨 가문과 강왕부, 소씨 가문, 영국후부는 대제의 사대四大 진국鎭國 가문이었다. 지금의 풍씨 가문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소씨 가문은 적과 내통해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모함을 받아 온 집안이 재산을 몰수당하고 참형을 당했다. 그리고 주씨 가문은 응성이 함락되고 옥안관에서 참패하는 바람에 몰락하고 말았다. 이젠 영국후부와 강왕부만 남았는데 이 두 가문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그나마 소씨 가문은 강왕이 뒤에서 힘을 써 준 덕분에 나중에 억울한 누명을 벗었다. 강왕은 완강한 왕당파王黨派라 어느 황자의 편에도 서지 않고 중립을 지켰으나 그래도 소씨 가문과는 연이 있어 양왕과는 친분이 두터웠다.
강왕은 혼란과 허무로 뒤엉킨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때 네 가문 중에서 가장 용맹한 가문이 주씨 가문이었는데 이젠… 장원 급제자가 나와 버렸구나, 에휴.”
영 마뜩잖다는 이 눈빛과 말투에 엽연채는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자리에 앉게나!”
강왕이 권하자 두 사람은 커다란 탁자 옆에 놓인 의자 위에 앉았다.
“듣자 하니 허대실을 찾고 있다지?”
강왕이 미소를 지으며 본론을 꺼냈다.
“그런데 어떤 자를 찾고 있는 겐가?”
그 말에 엽연채가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
“예? 누구라니요?”
그러자 강왕 곁에 있던 양왕이 대신 답했다.
“하나는 전공을 세워 곧 작위를 받을 대장군이고, 다른 하나는 병영에서 말에게 먹이를 주고 씻기며 말똥을 치우는 마부라네! 두 사람은 같은 성에 같은 이름을 갖고 있지. 공교롭게도 한 지역 출신이기도 하네. 어떤 자를 고를 것인가?”
그러자 엽연채가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어린아이들이나 선택을 하려고 하죠. 소인은 두 명을 다 원하옵니다!”
주운환은 미소를 머금고 그녀를 쳐다보며 ‘역시 제대로 놀 줄 안다니까!’ 하고 생각했다.
엽연채와 주운환은 이곳에서 한 시진쯤 머물다가 자리를 떴다.
* * *
수업이 끝나자 허서는 곧장 송화 골목으로 돌아갔고 다시 은정랑과 함께 정안후부로 향했다. 이제 그곳은 엄연히 그들의 집이니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먼저 안녕당에 가서 엽학문과 묘씨에게 문안 인사를 드렸는데, 엽승덕도 그곳에 있었다.
엽학문은 전에는 관아에서 나오면 곧장 서재로 가서 자신의 일을 보았고 안녕당에 머무르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한데 허서와 정랑이 정안후부로 들어오게 된 이후로는 엽학문은 안녕당에서 꼼짝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허서가 자주 묘씨의 처소로 와서 문안 인사를 드리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허서가 그들에게 예를 올렸다.
묘씨는 그 모습에 기가 찬 듯한 표정을 지었고 속으로는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지만, 그저 장단에 맞춰 줄 수밖에 없었다. 허서는 이제 적장자이고 학문에도 능하니 장차 집안의 대를 잇게 될 것이므로 아니꼬워도 인정하지 않으면 어떡하겠는가. 묘씨는 속으로는 혐오감이 들었지만 그래도 마음을 고쳐먹고 최대한 빨리 그들을 받아들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