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5화
엽연채와 온씨가 떠난 후 집안사람들과 엽영교의 언니들도 모두 정안후부를 떠났고, 엽학문의 누이만 갈 길이 멀어 정안후부에 하루 머무르기로 했다.
엽학문과 엽승덕, 은정랑 모자는 아직 안녕당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십여 일 후에 있을 혼례식의 세부 사항에 대해 의논하는 중이었다.
낯빛이 새하얗게 질린 엽균이 고민과 원망이 섞인 눈빛을 하고선 울먹이는 목소리로 따졌다.
“아버지……. 다들 왜 저를 속인 거예요! 저를 속였다고요!”
“뭘 속였다는 말이냐!”
엽승덕은 찻잔을 들고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심드렁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런 건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이다.”
“선의의 거짓말이요?”
엽균은 그 말을 인정할 수 없었다.
“선의라니요…….”
“이 말은 네가 했던 말이 아니더냐!”
엽승덕이 반박했다.
“넌 입이 가볍기 때문에 혹시라도 말실수를 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너에게 선의의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다 네 어머니와 서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래. 균아. 네가 전에도 자주 말하지 않았느냐? 선의의 거짓말은 중요한 거라고 말이다.”
은정랑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거들었다. 이에 엽균은 말문이 막혔고 어안이 벙벙했다. 자신은 확실히 그 말을 했고, 게다가 한두 번 한 것도 아니었다.
전에 자신은 늘 온씨와 엽연채를 속이고 몰래 은정랑 모자를 만나곤 했다. 그리고 은정랑은 늘 그런 자신을 염려해 주었다.
“공자님께서 이렇게 몰래 저희와 만나며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속이는 건 올바르지 못한 행동이 아닐까요?”
그때 자신은 이렇게 당당히 대꾸했다.
“이건 속이는 게 아니라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봐 봐요. 내가 선의의 거짓말을 하니 어머니와 누이동생은 마음이 괴롭지 않고 난 두 사람에게 잘해 줄 수 있잖아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보는 거죠.”
그때는 스스로를 참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그 ‘선의의 거짓말’을 당해 보니 마음이 아프고 괴롭기 짝이 없었다. 어머니와 누이동생은 자신이 그들을 속이고 이 두 사람과 만났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이젠… 서가… 아니, 이젠 적장자이니 전 어떻게 되는 거죠…….”
엽균은 그럼 가산은 어떻게 되고 집안의 대는 누가 잇는 건지 묻고 싶었다.
“어떻게 되긴 뭘?”
엽승덕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서가 적장자이니 넌 당연히 차남이지! 이미 똑똑히 말한 사실이지 않느냐.”
“그게 아니라…….”
엽균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결국 그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냈다.
“전에 아버지께서 제가 집안의 대를 이을 거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저더러 적장자가 아니라니, 그럼 집안의 대는 누가 잇습니까?”
“넌 차남에 불과하고 거기다 평처의 소생이다. 배운 것도 없고 재주도 없으면서 집안의 대를 이을 생각을 하는 것이냐!”
엽학문은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치며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봤다. 그 말을 들은 엽균의 머릿속에서 ‘쿠웅’ 하고 굉음이 울렸다. 마치 온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균아.”
은정랑이 눈물을 머금고 그를 쳐다보며 말문을 뗐다.
“언제부터 이렇게 재물을 탐내는 사람으로 변한 것이냐?”
“그러게 말이오. 어디서 이런 못된 것을 배운 것이냐?”
엽승덕이 동조하며 냉랭한 목소리로 그를 나무랐다.
“너는 늘 재물을 하찮게 보고 공명과 관록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찌 공명과 관록을 탐내는 속물적인 인간으로 변한 것이냐? 설마 아직도 가산과 대를 잇는 것에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이냐?”
“저… 전 그런 속물적인 인간이 아닙니다.”
엽균은 단박에 그의 말을 부인했다.
“전 다른 사람의 것을 탐낸 적이 없습니다…….”
“그럼 됐다. 서가 적장자이니 이 아이가 집안의 대를 이어도 문제 될 게 없다. 넌 네 일이나 잘하거라. 집안엔 네가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충분하고, 서도 너를 박대할 리 없지 않느냐?”
엽승덕의 말에 엽균은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분명 맞는 말이긴 한데 왜 불공평하다고 느껴지는 걸까?
“그런데… 서가 적장자였다면… 원래부터 집안의 대를 이을 수 있었던 거잖아요. 그럼 왜 학문까지 익혔던 거예요? 전에 아버지께서 분명 저는 집안의 대를 이을 사람이니 열심히 학문을 익히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하지만 서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 학문을 익혀 과거 시험을 보는 수밖에 없고, 그래야 출세할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엽승덕은 그가 성가셔서 더는 못 참겠는지 어두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며 반문했다.
“네 생각엔 왜 그런 것 같으냐?”
“그게…….”
엽균은 순간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믿고 싶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그리고 넌 학문을 익히는 걸 본래부터 싫어했다. 온씨가 그렇게 닦달했는데 결과가 어땠느냐. 학문을 익혔느냐?”
엽균은 정곡을 찔려 말문이 또 막히고 말았다.
“우리는 너보고 학문을 익히지 말라고 한 적이 없다. 네가 싫어서 안 해 놓고 이제 와서 우리를 탓하는 것이냐?”
엽승덕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균아, 학문을 익히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게냐? 그럼 이제부터 열심히 하면 되지 않느냐!”
은정랑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 겨우 열여덟 살이니 열심히 하면 된다. 너는 지금 우리가 서는 공부를 시켜 공명과 관록을 좇게 했고, 너는 공부를 안 시키고 발목을 잡았다고 우리를 힐난하고 싶은 것이냐? 하지만 열심히 공부하고 아니고는 다 너희들 스스로의 호불호에 따른 것이었다.
허서는 공부하는 걸 좋아하고 기뻐했기에 좋은 스승님을 붙여 줘 공부를 잘할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그런데 너는 공부하는 걸 싫어했고 공부를 안 해야 즐거워했으니 너에게 공부를 하라고 강요하지 않은 것이다. 너희 둘은 다 우리 아들이고 우린 그저 너희들이 즐겁게 지내기를 바랐을 뿐이다. 그게 잘못된 것이냐?”
엽균은 그녀의 말을 듣고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았다. 어떻게 들어도 틀린 부분은 없었다. 하지만…….
“사람은 어떤 신분으로 태어나느냐에 따라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는 것이다.”
은정랑이 이어서 말했다.
“서는 공명과 관록을 좇는 게 아니라 학문을 익히는 걸 좋아하고 적장자로 태어났으니 공명을 얻고 집안의 대를 이어야 마땅한 것이다. 그게 잘못된 것이냐?”
“아… 아니요.”
엽균이 고개를 떨구자 은정랑이 이어서 말했다.
“너는 차남이고 학문을 익히는 걸 싫어하며 자유롭고 한가롭게 지내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노는 걸 좋아한다. 이젠 집안의 중책을 떠맡을 필요가 없으니 앞으로도 계속 자유롭고 한가롭게 지내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즐겁게 놀면 된다. 이게 무슨 문제라도 되느냐?”
“아… 니요.”
엽균은 답답하고 억울해 죽겠으나 그녀의 말에서 트집을 잡을 수가 없었다.
“됐다. 잘못된 게 없다고 생각하니 그럼 썩 나가 보거라. 여기서 투덜대지 말고.”
엽학문이 싸늘한 목소리로 그를 쫓아냈다. 이에 엽균은 몸을 바르르 떨고는 돌아서서 밖을 향해 걸어갔다.
문 입구에 도착한 그가 고개를 돌려 보니 저를 제외한 식구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혼사와 입적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엽균은 그 모습을 보며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설마 그동안 자신이 잘못된 행동을 했던 걸까? 하지만 어느 부분에서 잘못했단 말인가? 자신은 진심으로 그들에게 잘해 주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들은 자신을 속여 왔던 것이다. 그래 놓고 그건 선의의 거짓말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학문을 익히고 싶어 하지 않으니 그러라고 강요하지 않았을 따름이라고 했다. 분명 틀린 말이 아니었다. 분명 자신을 위해서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해 봐도 기분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 * *
한편, 덕명반. 무대 아래에 놓인 팔선상 앞엔 손님들이 앉아 있는데 대부분 연극을 감상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다들 모여서 최근에 있었던 재미있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참, 그 정안후부 엽씨 가문에서 또 흥미로운 일이 터졌던데!”
눈이 작은 한 노인이 흥이 잔뜩 오른 눈빛으로 말했다.
“쯧쯧, 그런 부잣집 사람들은 간교한 계책도 참 잘 낸단 말이야.”
은정랑과 허서의 일은 본래부터 공개하려 했던 일이기 때문에 당연히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튿날이 되자 도성 전체에 이 소식이 파다하게 퍼졌고 많은 사람들은 이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정안후부는 본래 도성 내 귀족들 사이에서 별 볼 일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그것도 이젠 옛날 일이 되었다.
작년에 사촌 여동생이 언니의 남편을 빼앗는 촌극이 벌어진 후로 정안후부는 대단한 유명세를 얻었다. 그 후, 그 사건에 이어 엽영교와 묘 공자, 태자의 삼각관계 추문이 터지지를 않나, 엽씨 가문 손녀사위가 장원 급제를 하는 일이 벌어지지를 않나. 바람 잘 날이 없는 집안이었다.
그런 이유로 이젠 정안후부에서 소식만 생겼다 하면 백성들은 알아서 묵묵히 해바라기씨를 들고 빙 둘러서서 구경할 준비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 사건 또한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과연 엽씨 가문에서 벌어진 사건답게 아주 흥미진진했다.
소식에 따르면, 엽승덕이 끼고 살던 첩실은 사실 첩실이 아니라 죽었다고 생각한 정실부인이었고, 의붓자식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아들은 의붓자식이 아니라 그의 적장자이며, 온씨는 후처에 불과했던 것이다.
“들어 보니 그 정실부인인 은씨는 아주 선량하고 전체적인 국면을 볼 줄 아는 여인이라고 하더군. 은씨가 엽씨 가문 세자의 생명의 은인이라 후야가 두 사람의 혼인에 동의했는데, 세자의 생모가 은씨를 들이느니 자신이 차라리 죽겠다며 극구 반대했대.
견디다 못한 은씨가 목숨을 끊으려고 했는데, 배 속에 이미 아이가 들어서 있던 게지. 그래서 차마 목숨을 끊을 수가 없어 죽은 척하고 그를 떠났던 거라고 하더군! 모자 사이가 자기 때문에 틀어지길 바라지 않았던 거야. 정말 선량하고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지.”
“그러게 말이야. 재가하기는 했어도 그 죽은 남편이 고자였다고 하더라고. 엽씨 가문 세자를 위해 수절하려고 일부러 그런 사람에게 시집을 간 거지. 정말 얼음처럼 맑고 옥처럼 깨끗한 사람일세.”
“게다가 도량도 넓고 전체적인 국면도 볼 줄 아는 사람이더군. 엽씨 가문 세자와 다시 만났는데도 온씨를 몰아붙이지 않고 자신이 원해서 아무 지위도 없는 외실로 지낸 거잖아. 그러는 바람에 멀쩡한 적장자가 의붓자식으로 오해받게 된 건데, 그게 다 엽씨 가문에 불화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그런 거지. 정말 정의롭고 위대한 사람일세!”
“그런데 또 다르게 생각해 보면 세상에 이렇게 바보 같은 여인이 또 어디 있겠어. 그리하면 자신만 억울한 게 아니라 자기 아들마저도 당연히 자신의 것이어야 할 모든 걸 잃게 되는 건데, 왜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느냔 말이야.”
“이제 정실부인이 돌아왔으니 후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당연히 아랫사람이 되는 거겠죠.”
구경을 하던 한 사람이 참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