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3화
“거짓말입니다! 전부 거짓말이에요!”
흥분한 채 마마가 앞으로 나서며 목청을 드높였다.
“거짓말이라고 했느냐? 못 믿겠으면 관매官媒를 찾아가 알아보거라. 그쪽에 기록이 다 있다! 우린 도성에서 살기 때문에 당시 정랑이 살던 상주의 관매가 혼인 증서를 작성했다. 그런 뒤에 내가 다시 도성의 관매를 찾아가 혼인 증서를 작성했다.
혼인 증서도 있고 혼례식도 올렸고 아버지도 동의하셨다! 부모님의 명과 중매인의 말도 있었고! 그런데도 내 정실부인이 아니라고 하는 게냐?”
엽승덕이 격양된 목소리로 따졌다.
“저런!”
채 마마는 정말이지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조사도 두려워하지 않다니, 설마 저 이야기가 전부 진실이라는 말인가?
“설령 그런 게 있다 하더라도 저희 온씨 가문에서는 몰랐습니다. 그러니 이건 사기 혼인입니다!”
“그 당시에… 나와 온씨 가문 대노야가 상의를 했었고 그분도 동의하셨다.”
엽학문은 작게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 사기 혼인 같은 건 없었다. 양가가 모두 원했던 일이다!”
“저희 온씨 가문 대노야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저희 대노야께서 돌아가셨으니 증언할 길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거겠죠!”
채 마마는 화가 나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일개 하인 주제에 그 입 다물지 못하겠느냐!”
엽승덕이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우리가 혼인 증서를 쓰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온씨와 정혼을 했다. 돌아가신 온 대노야는 당시 보통 분이 아니셨는데, 그분의 체면을 세워 주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엽씨 가문과 온씨 가문이 정혼을 맺을 때 내가 혼인을 했다는 사실을 관매가 대노야께 알리지 않았을 리가 있겠느냐? 대노야께서 설마 조사를 안 하셨겠느냐? 모두 알아보셨고 그 사실을 알면서도 정혼을 원하셨다.”
“맞다. 온 대노야께서도 동의하셨던 일이다.”
엽학문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때 모두들 은씨가 강에 투신해 자진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일이 일어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에휴……. 은씨는 승덕이에게 서를 낳아 줬을 뿐만 아니라 옥처럼 순결하게 정절을 지켜 왔습니다. 이제 어엿한 정실부인이 돌아왔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엽학문은 그리 말하며 집안 어른들을 휘둘러봤다. 이에 여섯째 증조부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문을 열었다.
“예전에 도성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정실부인이 죽은 줄 알고 다시 후처를 들인 게다. 그런데 정실부인이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오면서 후처에게 평처의 자리를 주게 되었다. 물론 정실부인이 윗사람이고 평처가 아랫사람이지. 그리고 엄격히 따지자면 첩으로서 예도 올려야 하고.”
이 말을 들은 은정랑의 눈빛에선 주체할 수 없는 희열이 보였다. 마침내 자신이 고귀한 후부의 정실부인이 되는 것이다. 운명이란 이렇듯 때론 참 묘했다.
“그럼 서는… 제 동생이 아닙니까……?”
이때 엽균이 멍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완전히 정신이 나간 듯한 모습이었다.
“맞습니다!”
채 마마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서는 균이 공자님보다 몇 개월 어립니다. 나리께서 은정랑을 먼저 아내로 맞이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은정랑이 죽었다고 생각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나리와 저희 마님은 정혼한 뒤에 일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삼서육례三書六禮(과거 한족漢族의 혼인 풍습 및 의식)를 치렀고 혼인한 뒤에 아이를 가져 낳았습니다. 그러면서 두 해가 지나갔죠. 그런데 어떻게 은정랑이 임신을 하고 허서를 낳을 수 있었습니까?”
“서는… 올해 열여덟 살이 아니라 스물한 살입니다.”
은정랑이 쭈뼛쭈뼛하며 입을 열더니 흐느끼며 말했다.
“당시… 제가 허씨 가문으로 시집을 갔습니다. 그런데 허씨 가문이 중간에 가세가 기울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허대실의 아버지가 다쳐 중병을 얻으셨는데, 그때 제가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낳고 몸조리조차 제대로 못 했지요. 전 허대실의 아버지를 봉양하고 있었는데 그때가 마침 춘절이 얼마 남지 않은 때라 관아에서 봉인封印(관리들이 춘절 전에 손잡이에 꿴 끈을 묶어 도장을 보관해 두면서 잠시 공무를 중단하는 의식)을 하는 바람에 출생 등록을 미루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해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죠.
나중에 허대실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그 일이 떠올랐습니다. 아이를 안고 관아로 가서 출생 등록을 했죠. 그런데 포졸들이 저희가 늦게 왔다고 출생연도를 그해로 기록할 거라고 어디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래서 허서의 나이가 몇 살 어려진 겁니다.
저희가 그리하면 잘못 기록되는 거라고 말하자 그 포졸이 저희의 초라한 행색을 보고는 고치기 귀찮다며 호통을 쳤습니다. 어찌 감히 따질 수 있었겠습니까? 그저 돌아갈 수밖에 없었죠.
집으로 돌아와 허씨 가문 족보에 아이의 이름을 올렸는데 원래는 정확한 생년월일을 기록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허씨 가문 수장께서 관아에 기록된 대로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나중에 아이가 과거 시험을 볼지도 모르는데 기록이 다르면 좋지 않을 거라고 하셨죠.
아무튼 관아에서 출생연도를 잘못 적은 경우가 많았고, 시골에 사는 아이들 중엔 그리된 아이들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허씨 가문에 아이는 허서 한 명뿐이니 다들 크게 문제 될 게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허서는 그리 말하며 조롱 어린 눈빛으로 엽균을 쳐다봤다.
“전 동생이 아니라 형입니다.”
“맞다!”
엽승덕이 고개를 끄덕이며 강조했다.
“서가 적장자이고 균이는 차남이며 평처의 적자인 겁니다!”
그 말을 들은 엽균은 머릿속에서 ‘쾅’ 하고 굉음이 울렸다. 정랑은 이낭이 아니라 적모였고, 허서는 동생이 아니라 형이었다. 자신은 엽씨 가문의 적장자가 아니라 적자인 차남이었고 거기다 평처의 소생이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란 말인가…….’
분명 정랑은 아이까지 딸린 가련한 과부였다. 그렇게 가련했던 여인이 그저 조그만 첩실 자리 하나를 원했을 뿐인데, 어떻게 아버지의 정실부인이 됐단 말인가. 그리고 그 결과,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는 적장자와 정실부인의 자리에서 평처의 아들과 평처로 끌어내려졌다는 말인가?
엽균은 정신이 아득해지고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어 버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혼하시죠!”
이때,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단어 하나하나를 이 사이에서 짜내듯 힘을 줘서 말해 목소리 자체는 크지 않은데도 우렁차고 강단 있게 느껴졌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보니 엽연채의 곱고 아리따운 얼굴이 서리를 맞은 듯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뭐라고 했느냐?”
“연채 너, 또 수작……! 부추기지 말거라.”
여섯째 증조부가 어안이 벙벙해 묻자 엽학문의 낯빛이 새파랗게 변했다. 그는 엽연채가 또 수작을 부린다고 그녀를 나무라고 싶었지만, 이제 엽연채는 장원 급제자의 부인이라는 생각이 들자 급히 말을 바꿨다.
이제 은정랑과 허서가 정안후부로 들어오면 밖에서는 분명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해댈 것이다. 그런데 온씨가 이혼까지 하자고 하면 얼마나 시끄러워지겠는가.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이혼 소리에 모두 반대했고, 여섯째 증조모가 중재에 나섰다.
“무슨 일이든 서로 상의를 해야지.”
엽학문의 누이도 움푹 들어간 입을 움직이며 말했다.
“어린 계집애가 어찌 이리 마음이 모진 것이냐? 이혼하라고 친어머니를 꼬드기다니.”
엽연채는 힘이 쭉 빠진 온씨를 부축하며 싸늘한 눈빛으로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엽학문의 누이를 쳐다봤다. 그런데 이때 온씨가 엽연채를 밀며 몸을 똑바로 세웠다. 초점 없는 눈을 한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이혼하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엽균이 반응을 보였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놀라움과 두려움이 섞인 얼굴로 온씨를 쳐다봤다.
“어머니…….”
“난 네 어머니가 아니다. 저 여인이 네 어미이지.”
온씨는 어두운 눈빛으로 자신을 닮은 엽균의 얼굴을 무심하게 쳐다봤다.
“네가 전에 모두가 다 같은 인간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나보고 그렇게 인색하고 모질게 대할 필요가 있냐고 했었지? 이제 됐구나. 저자는 나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차를 올리지 않아도 되고 첩으로서 예를 올릴 필요도 없다. 네가 원하는 대로 다 되었어.”
엽균은 그 말을 듣고는 입술을 떨었다. 고통스럽고 괴로워 울고 싶었지만, 막상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무슨 까닭으로 이혼을 한다는 말이오? 난 동의할 수 없소.”
엽승덕이 냉소를 지었고 그의 눈빛엔 조롱기가 가득했다. 작년에 정랑이 받았던 굴욕감을 이제 그들에게 배로 갚아 줄 시간이 된 것이다.
그러나 온씨의 초점 없는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엽씨 가문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엽영교 언니 등의 동의하지 않는 얼굴을 보고는 더 이상 이 사람들과는 할 이야기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냉랭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전 죽어도 타협하지 않을 겁니다! 절 아랫사람으로 만들겠다고요? 꿈도 꾸지 마세요!”
그녀는 이 말을 던지고선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고 엽연채, 채 마마, 엽미채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더니 서둘러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러자 뒤에서 엽학문 누이의 싸늘한 호통이 들려왔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자식도 있는 데다가 반평생을 살지 않았느냐. 자식들도 다 컸고 곧 손주도 볼 사람이 소란을 피우려는 것이냐! 다 같이 화목하게 살 수는 없는 게냐? 네 생각은 안 하더라도 네 자식들 생각은 해야 할 것 아니냐!
네 여식이 장원 급제자의 부인이 됐다고 자신만만한가 본데, 그저 그 아이가 젊고 예뻐서 지금 사위가 오냐오냐하는 것뿐이다. 우린 그 시절을 다 겪어 본 사람들이다. 젊고 예쁜 것으로 얼마나 버틸 것 같으냐?
일이 생기면 결국 기댈 곳은 친정이다! 이제 친정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형제가 나왔다.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기뻐 잔치를 열었을 텐데 넌 도리어 소란을 피우는구나! 지금 이 행동은 네 손으로 직접 자식들의 방패막이를 쳐내는 것이다.
가족이 무엇이냐? 서로 돕고 의지하는 사이이다! 그런데 넌 이런 것조차 모르는 것이냐! 속 좁고 전체적인 국면을 볼 줄 모르는 걸 보니 과연 첩은 첩이구나!”
나이가 들어 덜덜 떨리는 목소리인데도 한 글자 한 글자가 바늘처럼, 한마디 한마디가 서리처럼 느껴져 살을 에는 듯했다. 듣고 있자니 차가운 빙고氷庫에 추락한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온씨는 단 한 번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걷는 내내 그녀는 솜 위를 걷는 양 축축 처지는 느낌이 들어 지금 자신이 걷고 있는 게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이렇게까지 자신이 약하다고 느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당장이라도 숨이 뚝 끊어질 것만 같았다.
엽연채는 그녀를 부축하며 영귀원으로 들어갔다. 온씨는 문안으로 한 발짝 내딛자마자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어머니!”
“마님!”
엽연채와 채 마마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고, 염교와 혜연도 얼른 달려와 온씨를 부축해 일으키려고 했다. 그런데 온씨가 손사래를 치더니 스스로 몸을 일으켜 바닥에 앉았다.
고개를 든 그녀의 얼굴은 핏기가 하나도 없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온씨는 어두운 눈빛으로 엽연채를 쳐다보며 참패를 당한 자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연채야… 이 어미가 너한테 정말 미안하구나! 미안하다……. 미안해…….”
그녀는 그리 말하며 엽연채를 품에 안았고 쉰 목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꾹꾹 참았으나 결국 마음이 무너져 내려 목이 갈라지도록 통곡을 했다.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은 엽연채는 가슴이 너무 아파 눈물을 뚝뚝 흘렸다.
‘어머니, 그 누구에게도 미안해하실 것 없습니다. 어머니의 인생은 어머니의 것이에요. 다른 누군가를 위해 억울한 일을 겪으시면 안 됩니다. 어머니는 온씨 가문의 귀한 따님이며 엽씨 가문의 정실부인이자 안주인이십니다. 그건 어머니께서 마땅히 누리셔야 할 존엄과 품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