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2화
“맞아요. 정랑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엽승덕은 손씨의 말을 듣더니 은정랑에 대한 모욕이라는 생각이 들어 성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정랑은 혼인하기 전부터 제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게다가 뭐요?”
온씨가 냉소를 터트리더니 엽학문을 쓱 쳐다보며 말을 이어 갔다.
“아버님이 어렵사리 공부도 잘하고 공명도 얻은 손자를 얻으셨으니, 어디 간통해서 낳은 사생아라는 딱지가 저놈에게 붙는 걸 원하시겠어요? 당시에 아버님이 얻어 준 외실이라고 하실 거죠? 그런 다음 임신한 몸으로 시집간 것이라고 하시겠죠? 이렇게 속이시려는 거죠? 속이시겠죠! 계속해서 속이시겠죠!”
온씨가 이 말을 꺼내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멸시하는 눈빛으로 엽학문을 쳐다봤고, 이어 조롱 섞인 눈빛으로 방 한가운데에 서 있는 은정랑 모자를 힐끗 쳐다봤다.
물론 이 일은 적당히 넘어가자면 넘어갈 수 있었다. 지금 은정랑의 전남편과 시집 식구들은 전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니까. 공개 석상에서도, 관리들 사이에서도 적당히 무마할 수 있으며 그러면 공명이 거두어질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들 생각이라는 게 있는 사람들이었다. 가족들 사이에서 은정랑은 그저 외도를 한 음탕한 유부녀에 불과했다. 평생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는 천하고 추잡한 여인으로 낙인찍힌 것이다.
“그만하면 됐다.”
이때, 나이가 들어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보니 이가 빠져서 입과 볼이 움푹 들어가 있고 얼굴은 주름투성이인 나이 든 할머니가 보였다. 바로 엽학문의 누이였다.
엽학문의 누이가 눈꺼풀이 축 처진 두 눈으로 온씨를 쳐다보고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둘러 날을 골라 입적하거라!”
“그 말이 맞다.”
여섯째 증조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찌 됐든 간에 엽씨 가문의 핏줄이었다. 변변치 못한 놈이면 또 모를까, 학문에 재주가 있는 아이이니 당연히 입적해야 했다.
“날을 골라 입적하거라. 그리고 은씨는 내일 작은 가마를 타고 정안후부로 들어오면 된다.”
“입적해도 서자에 불과합니다! 저들은 인정하지 않지만 저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저 아이는 간통으로 낳은 사생아입니다.”
손씨가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그들을 헐뜯자 정랑과 허서는 음산하고 매서운 눈빛을 번뜩였다.
“잠시만요!”
엽승덕이 냉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작은 가마를 타고 들어온다고 하셨어요?”
“그럼 뭘 어쩌고 싶은데요?”
온씨도 냉소를 띠며 되물었다.
“설마 팔인대교八人大橋를 타고 들어오게 할 생각이에요?”
“그렇소. 팔인대교를 타고 들어와야지!”
엽승덕이 웃으며 대답했다.
“하! 어르신들, 저희 엽씨 가문에 이런 법도가 있습니까?”
온씨가 집안 어른들을 둘러보며 묻자 여섯째 증조부가 엽승덕을 쏘아보며 말했다.
“승덕아, 아직 소란을 덜 피운 게냐? 네가 아무리 이 은씨를 좋아해도 첩실일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일개 첩실이 팔인대교를 타고 집안으로 들어온다는 말이냐? 그럼 우리 엽씨 가문의 체면은 뭐가 되겠느냐? 온 도성의 비웃음거리가 될 게다!
큰조카, 자네 아들은 이미 관직을 잃었지만 자네는 아직 관리이지 않은가! 자네가 승덕이의 이낭이 팔인대교를 타고 집안으로 들어오는 걸 허락하면 자네가 계속 관리로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작은할아버지, 말끝마다 이낭이니 첩실이니 하지 마세요. 정랑은 첩실이 아닙니다!”
엽승덕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정랑은 첩실이 아니라 제 정실부인입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온씨의 낯빛이 확 어두워졌다.
“그러게 말이다. 평처平妻(일부다처제 제도에서 정실부인에 준하는 부인을 평처라고 부름. 단 실제 지위는 정실에 못 미침)를 들이겠다는 말이냐?”
여섯째 증조모가 미간을 찌푸리며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다.
“상인들이나 평처라는 걸 둔다. 혹은 정말 어쩔 도리가 없을 때에만 평처라고 부르지. 우리는 공훈이 있는 귀족이며 후부이니 그런 건 용납할 수 없다.”
“평처라고 해도 어쨌든 아랫사람이며 그저 지위가 좀 더 나은 것에 불과하다.”
여섯째 증조부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보탰다.
“본처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차를 올려야 하며 여전히 아랫사람의 신분인데 굳이 평처로 들여야겠느냐?”
“정랑이 온씨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차를 올려야 한다고 누가 그러던가요? 정랑이 아랫사람이라고 누가 그러던가요?”
엽승덕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랑이 본처입니다! 온씨가 평처이고요! 온씨가 아랫사람입니다!”
“그게 무슨 망발입니까?”
온씨 뒤에 서 있던 채 마마가 흥분해 앞으로 나섰다.
“저희 마님은 중매인을 통해 정식으로 맞이한 부인이십니다. 팔인대교를 타고 정안후부로 들어왔죠. 그런데 지금 저희 마님보고 유부녀의 몸으로 외도나 한 저 천한 여인에게 마님의 자리를 내놓으라 하시는 겁니까? 어쩜 그리 뻔뻔하실 수가 있습니까?”
“이건 너무 과하다.”
여섯째 증조부와 증조모 등 집안사람들 역시 눈썹을 치켜세우고 두 눈을 부라리며 동조했다.
“네 내자는 칠거지악을 범한 것도 아닌데 무슨 까닭으로 이러는 것이냐?”
“네 처가 저자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투기를 한다 해도 그건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또 네 처는 네 생모를 위해 상을 치렀고, 너에게 자식도 낳아 주었다. 관아에 널 고발하기는 했어도 첩실에게 네 처의 자리를 내놓으라고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여섯째 증조모가 어두운 표정으로 이치를 따졌다.
“전 저 사람에게 자리를 내놓으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정실부인의 자리는 본래 정랑의 것이었어요.”
엽승덕은 냉소를 지으며 반박해 나갔다.
“저는 정랑을 먼저 부인으로 맞이했고, 그다음에 온씨를 들인 겁니다.”
“헛소리 그만하세요!”
온씨가 두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이렇게 파렴치한 사람은 처음 보았다. 이제는 이런 허튼소리까지 꺼낼 줄이야!
“다들 조용히 하세요!”
엽학문이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치더니 온씨를 노려보며 말했다.
“승덕이 말이 맞다. 은정랑을 먼저 부인으로 맞이했고 네가 뒤에 들어온 게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여섯째 증조부는 들으면 들을수록 얼떨떨해져 영문을 캐물었다. 이에 엽학문은 연거푸 탄식했다.
“업보입니다! 이게 다 업보이죠!”
은정랑은 자리에 주저앉더니 무력한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때 일은… 없었던 걸로 치세요! 제가 아랫사람이 되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엽승덕이 얼른 은정랑에게 달려가 그녀를 일으키려고 했으나 어떻게 해도 그녀를 일으킬 수가 없자 하는 수 없이 함께 바닥에 주저앉아 그녀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당신은 이미 20여 년을 억울하게 지냈소. 그런데 또 당신에게 아랫사람이 되라고 하면… 우리 엽씨 가문은 천벌을 받을 거요!”
“큰조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여섯째 증조부는 인내심이 바닥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러자 엽학문이 또다시 탄식하며 대꾸했다.
“20여 년 전에 승덕이가 동문들과 외지로 놀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청석青石골이라는 곳을 지나다가 부주의한 바람에 뱀에게 물려 중독이 되었는데, 다행히도 그곳을 지나가던 은씨가 승덕이를 구해 줬습니다. 그리해서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죠! 승덕이는 은씨네 집에서 몸조리를 했고 두 사람은 차츰 서로에게 감정이 싹텄던 겁니다.
그래서 승덕이가 저에게 은씨를 처로 맞이하겠다는 서찰을 보냈고 저는 그리하라고 허한 뒤 은씨 집으로 승덕이를 보러 갔습니다. 가는 길에 사주단자도 가져갔죠.
그런데 승덕이 이 아이가 조급한 나머지 은씨와 그곳 관아에다 혼인 신고를 했던 겁니다. 그리고 그때 은씨의 노모가 갑자기 병에 걸리는 바람에 액막이를 하기 위해 은씨의 집에서 간단하게 혼례식을 치렀고요.
당시 승덕이의 생모인 오씨는 제 누님을 뵈러 비주에 갔었고, 때마침 승덕이가 또 병이 도져 저 혼자 은씨의 집에 찾아갔습니다. 가서 보니 은씨는 참한 처자였고 또 승덕이의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니 둘의 혼사를 승낙해 혼례를 치르게 했죠. 나중에 집으로 돌아오면 다시 성대하게 혼례식을 올리게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일을 알게 된 오씨가 죽어도 승덕이가 시골 처자를 아내로 맞이하는 꼴은 못 본다며 횡포를 부렸던 겁니다. 청석골에 있는 은씨의 집으로 달려가 혼사를 못 무르면 자신이 죽겠다며 협박까지 했죠. 제가 수차례 설득했지만 제 말은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맞습니다.”
엽승덕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정랑은 마음씨가 착한 사람입니다. 저와 어머니가 서로 다투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강에 투신하여 목숨을 끊은 척했습니다. 그때 저는 정랑이 죽은 줄 알았고 차마 그 마음 아픈 곳에 더는 머무를 수가 없어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녀는 죽지 않았던 겁니다. 그때 제 아이를 가진 상태였죠. 배 속에 아이가 들어 있는데 어떻게 미련 없이 목숨을 끊겠습니까? 그 뒤 정랑은 모두가 아시는 것처럼 허대실에게 시집을 갔던 겁니다.
그런데 그 허대실이라는 사람은 사실 고자였습니다. 허대실은 대를 이을 아들을 얻고 싶었고 정랑은 저를 위해 정절을 지키고 싶었으니 두 사람이 합심해 연극을 했던 겁니다. 허울뿐인 부부에 불과했던 거죠.
못 믿으시겠다면 피를 떨어뜨려 혈육인지 아닌지 판별해 보셔도 됩니다! 게다가 허서는 정랑의 배 속에서 일곱 달도 안 되어 태어난 아이입니다. 이도 믿기지 않으시면 얼마든지 조사해 보셔도 됩니다.”
그의 긴말에 사람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 이런 일이 있었다는 말인가?
은정랑은 눈물을 훔치는 척했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허서는 조롱과 득의가 반반 섞인 눈빛을 번뜩였다. 그동안 온씨는 자신들이 본인을 해칠까 봐 이쪽을 방비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순진하기는!’
자신들이 그런 어리석은 방법을 쓸 리가 있겠는가. 진작부터 이 기가 막힌 방법을 생각해 놓았는데 무엇 하러 그리하겠냔 말이다.
“그러니!”
엽승덕은 조롱기 가득한 눈빛으로 온씨를 쳐다보며 쐐기를 박았다.
“정랑이 본처이고 당신이 첩실이야! 머리를 조아리고 차를 올린다 하더라도 당신이 정랑에게 해야 하는 게지! 첩실로서 예를 올려야 한다면 그 또한 당신이 정랑에게 해야 하는 것이야!”
그 말에 온씨는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그대로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어머니!”
엽연채는 얼른 그녀를 부축했고 독기 어린 눈빛으로 엽승덕을 노려봤다.
“엽승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