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1화
엽승덕은 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끌어당기려 했지만 은정랑이 슬며시 그를 흘겨보며 그의 지나친 행동을 제지했다. 엽승덕은 자신에게 은근한 눈빛을 보내는 그녀를 보고는 더더욱 달달한 기분이 들었지만,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으니 자중하는 수밖에 없었다.
“천첩賤妾(부인이 자신을 낮추는 1인칭 대명사) 은씨가 아들 허서를 데리고 주인나리, 주인마님 그리고 자리에 계신 집안 어르신들과 큰아씨, 둘째 아씨, 승덕 나리의 형제분들과 그 부인들께 인사를 올립니다.”
은정랑과 허서는 무릎을 꿇고 엽학문, 묘씨 등에게 큰절을 올렸다. 엽학문은 손자가 자신에게 예를 갖추는 모습을 보고 이루 말할 수 없는 흥분을 느꼈다.
“그래, 그래. 어서 일어나거라! 전 마마, 어서 두 사람을 부축해 일으키거라.”
묘씨 곁에 있던 전 마마는 그 말에 표정이 굳었다. 저 천하고 뻔뻔한 인간들을 부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감히 엽학문의 말을 거스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전 마마는 하는 수 없이 앞으로 다가가 그들을 부축해 일으켰다.
“이보게, 큰조카, 대체 뭐 하자는 건가? 하도 앉아 있었더니 허리가 다 아프네. 그저 첩실 하나를 들이며 의붓자식에게 지위를 주는 것뿐인데 뭘 더 어쩌고 싶어서 이러는 건가?”
여섯째 증조모는 짜증 나 죽을 지경인 모양이었다. 정실인 그녀가 고작 첩실 하나 때문에 이 많은 사람들이 동원된 꼴을 어디 보고 있으려고 하겠는가. 이러면 정실부인들의 체면이 뭐가 되겠는가?
엽균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여섯째 증조모님, 첩실은 사람이 아닙니까? 이 두 사람은 그저 조그만 지위 하나를 달라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 서슬 푸르게 이들을 몰아붙이셔야겠습니까?”
온씨는 엽균의 말을 듣고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당장이라도 아들을 목 졸라 죽여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신이 어쩌다가 저런 머저리 같은 놈을 낳았다는 말인가!
“큼큼! 조용히 하거라!”
엽학문이 헛기침을 하며 엽균을 제지했다.
“제가 공표해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사실 서는 저희 엽씨 가문 핏줄입니다. 이 아이는 의붓자식 같은 게 아니라 저희 엽씨 가문의 핏줄이에요. 승덕이와 은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지요.”
“뭐라?”
그 말이 방 안에 크나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고 묘씨는 안색이 확 변했다. 어쩐지, 전에 엽학문에게 어째서 엽승덕과 그 외실을 도우려 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엽학문이 정확히 말을 해 주지 않아 대관절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걸까 의문스러웠으나, 허서가 그의 친손자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제일 먼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사람은 온씨가 아니라 뜻밖에도 손씨였다. 손씨와 엽승신은 늘 엽승덕 가족이 망해 버리기를 바라 왔으니, 지금 이 일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엽씨 가문 세자인 엽승덕의 마음엔 늘 저 외실뿐이었고 적장손인 엽균도 똑같이 그녀에게만 관심을 기울였다. 이 부자는 모든 걸 밖으로만 퍼다 날랐고 엽학문은 그런 그들의 행동을 몹시 거슬려 했다.
엽연채가 지금 장원 급제자의 부인이 되기는 했지만 엽승덕 부자는 이미 그녀와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상태였다. 엽승덕 가족이 자기들끼리 물어뜯게 놔두고 자신들 내외는 어부지리나 얻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허서가 엽씨 가문 핏줄이라니? 그럼 엽승덕은 밖으로 퍼다 나른 게 아니라 자신의 친아들에게 가져다준 셈이 된다. 게다가 허서는 거인이라는 공명까지 세웠다.
반면, 엽씨 가문의 두 손자가 얼마나 형편없는지는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나는 한량이고 또 다른 하나는 머저리였다.
지금 엽씨 가문의 핏줄이라는 자가 툭 튀어나왔는데, 그는 학문에 재주가 있어 공명도 세운 자였다. 이렇듯 전도가 유망한 손자가 나타났으니 앞으로 엽씨 가문이 누구의 손에 떨어지게 될지야 뻔하지 않은가!
“이게 무슨……?”
엽균은 완전히 넋이 나가 버렸다.
엽균은 전에 허서가 자신의 친동생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다면 장애물이 이렇게나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엽균은 순간 오싹한 느낌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왜 단 한 번도 이 사실을 자신에게는 알려 주지 않았을까! 왜 자신을 속인 걸까?
엽균은 새파래진 얼굴로 물었다.
“아버지, 허서가… 허서가 정말로 아버지의 친아들입니까? 그런데… 왜 저한테는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그의 목소리는 따지는 듯도 애원하는 듯도 했다.
“네가 물어본 적이 있기라도 했느냐!”
엽승덕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쳐다보자 엽균은 표정이 확 굳었다. 그렇다. 물어본 적이 없기는 했다. 단 한 번도 말이다.
게다가 정랑은 착하디착한 사람 아닌가. 자신을 일부러 속였을 리도 없고, 또 속여 봤자 그들에게 득 될 것도 없었다. 분명 말 못 할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균아, 넌 전에 서가 네 친형제였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지 않더냐? 그런데 어째서 기뻐하지 않는 것이냐?”
엽승덕이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쓱 흘겨봤다.
“기쁘지 않은 게 아닙니다. 당연히 기뻐할 일이죠…….”
엽균은 그리 말했지만 실은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왜인지 가슴이 답답해질 뿐이니 그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다독였다.
‘별일 아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난 속물들과는 다르다. 설마 허서가 내 것을 빼앗아 갈까 봐 두려워하는 것인가? 설령 허서가 아버지의 친아들이라고 해도 그저 서자에 불과한 것을.’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엽균은 그제야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
한편, 온씨는 엽승덕 부자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냉랭한 눈빛을 번뜩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은정랑 모자에 대해 그녀는 온갖 추측을 다 해 보았고 허서가 어쩌면 그들의 사생아일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엽승덕이 어떻게 그렇게까지 간과 쓸개를 다 빼 주었겠는가.
“아……. 그리된 거였구먼?”
여섯째 증조부와 증조모는 이리 말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집안사람들 몇몇이 귓속말로 소곤거리는데, 여섯째 증조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승덕이의 친아들이고 우리 엽씨 가문의 핏줄이라고 하니 그럼 당연히 사람들을 불러 공표하는 게 맞지.”
“할아버지, 할머니, 집안 어르신들, 고모님들, 숙부 두 분과 숙모 두 분을 허서가 뵈옵니다.”
허서는 그들에게 큰절을 올렸다. 그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속으로 더할 나위 없이 통쾌했고, 특히 엽균 이 얼간이의 충격받은 표정을 보니 이보다 더 재미있는 구경이 없다 싶어 희희낙락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 입 다물거라!”
참다못한 손씨가 발악하듯 소리치자 엽학문은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더 이상 소란을 피우면 밖으로 쫓아낼 것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손씨는 이번엔 온씨를 밀며 채근했다.
“형님, 뭐라고 말 좀 해 보세요. 이렇게 저들을 집안으로 들이실 거예요?”
“지난번에 자네가 저 둘을 보며 참사랑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면서 나보고 좀 너그러워지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러나 손씨의 기대와 달리, 온씨는 냉랭한 눈빛으로 그녀를 힐긋하며 비아냥댈 뿐이었다.
손씨는 분노가 더더욱 치밀었다. 전에 그렇게 말했던 건 허서가 의붓자식이었기 때문이며, 은정랑이 더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나이기 때문이었다.
또 당시에는 그들이 정안후부로 들어와 봤자 자신들에게는 해악을 끼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온씨와 엽연채에게만 거슬리는 존재이며 엽승덕 가족들의 관계를 더욱 엉망으로 만들 존재라고만 여겼다. 어디 지금처럼 자기들에게도 거슬리는 존재가 될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은정랑과 허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온씨의 표정을 보더니 득의양양한 눈빛을 번뜩였다. 그 직후, 허서는 더는 참지 못하고 엽연채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맑고 아름다운 얼굴로 더없이 평온한 표정을 지은 채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을 따름이었다.
허서의 말끔한 얼굴이 순간 싸늘하게 변했으나 그는 이내 냉소를 지었다.
“연채야, 내가 말했었지. 네가 날 오라버니라고 부를 날이 있을 거라고 말이야.”
엽연채는 기가 막혀 ‘하’ 외마디 소리를 내며 찻잔을 내려놓았고 온씨는 그 말을 듣더니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이 사생아 놈이 감히 우리 연채를 도발하는 것이냐? 이 천한 놈,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엽균은 이 광경을 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전에는 허서와 은정랑이 너무도 가련하다고 생각했다. 늘 자신의 도움을 바라는 모습이었는데, 지금 엽연채를 도발하는 허서에게서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 가련하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대고 감히 건방을 떠는 것이냐!”
대로한 온씨는 싸늘한 목소리로 단어 하나하나를 이 사이에서 짜내듯 힘을 줘서 말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서리가 맺힐 것 같은 음침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냉소를 흘렸다.
“그래 봤자 서자 주제에! 그것도 ‘간통’을 해서 태어난 사생아 주제에!”
‘간통’을 해서 태어난 사생아라는 말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맞습니다. 간통을 해서 태어난 사생아입니다! 간통을 해서요!”
손씨가 얼른 동조하며 꽥꽥거렸다.
“듣자 하니 저 여인은 남편이 8년 전에 세상을 떠나자 아이를 데리고 도성으로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는 이미 꽤 큰 사내아이였죠. 어찌 된 걸까요? 남편이 살아 있을 때 큰아주버님과 간통을 했던 거겠죠?
흥, 천하고 뻔뻔한 음란한 여인이에요! 남편이 버젓이 살아 있을 때 다른 사내와 놀아나고 사생아까지 낳은 거죠. 아직까지 얼굴을 들고 살아 있는 것도 부족해 전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바로 도성으로 달려와 간통을 한 사내를 찾은 겁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거인이라는 공명을 얻었다니요! 간통을 해서 태어난 사생아는 과거 시험을 볼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니 거인이라는 공명을 거둬야 해요!”
“그 말이 맞다!”
자리에 있던 집안 어른들도 수군거렸고 엽영교의 언니들마저 경멸 가득한 표정으로 은정랑을 힐끗 쳐다봤다.
“무슨 망발을 하는 게냐!”
엽학문은 손씨가 듣기 거북한 말을 떠들어 대자 표정이 확 어두워지더니 매서운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간통으로 태어난 사생아라고 소문이 나면 허서가 얻은 공명은 분명 거둬질 것이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여섯째 증조부는 나이가 들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간통을 해서 태어난 사생아 같은 게 아닙니다. 유부녀가 외도를 하다니, 당치도 않습니다.”
엽학문이 노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