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0화
“오늘 이렇게 가족회의를 열게 되어 가까운 친척들과 여식들, 손녀까지 모두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채는 몸조리 중이라 박원이가 대신 참석했습니다. 오늘 이렇게 회의를 연 건 기쁜 일을 공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저께 연채의 부군이 장원 급제를 했습니다. 시집간 손녀이기는 하지만 우리 엽씨 가문도 체면이 섰죠.”
“이보게, 큰조카. 우리 늙은이들을 부른 게…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인가?”
하좌의 맨 앞에 놓인 권의에는 팔십 대 노인이 앉아 있었는데, 수염과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하고 얼굴엔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이 사람은 엽학문의 당숙으로 현재 가문에서 항렬이 가장 높은 사람이었다. 항렬에 따르면, 엽연채는 그를 여섯째 증조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 일은 우리 모두 이미 알고 있지요. 집안에서 연회를 베풀며 축하라도 하려는 겐가?”
여섯째 증조부 옆엔 나이가 들어 몸을 덜덜 떠는 노부인이 앉아 있었다. 바로 그의 아내였다.
“흠, 이 일 때문은 아닙니다. 친손녀이지만 어쨌든 시집을 갔으니 초대는 주씨 가문에서 하고 저희는 참석만 하면 되죠.”
엽학문이 마른기침을 하며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대는 건 당연히 그저 본론에 들어가기 전 몸을 풀기 위함이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저희 엽씨 가문에 겹경사가 났다는 겁니다. 하나는 손녀사위가 장원 급제를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 큰아들 쪽 모자를 엽씨 가문으로 들이겠다는 겁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모두 깜짝 놀랐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씨와 묘씨도 이 일을 처음 알게 되었기에 그 말을 듣고는 대경실색했고, 두 여인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온씨와 엽연채를 쳐다봤다.
반면, 온씨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이 일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 여인의 아들은 진사로 합격하지 못했고 또 그 여인도 나이도 많으니 밖에서 계속 허송세월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정안후부로 들어오지 않고 버티다가 만약의 일이라도 생기면 삽시간에 의지할 곳이 없어지니, 당연히 첩실의 지위를 얻고자 할 것이었다.
온씨는 냉소를 짓더니 비웃는 눈빛으로 엽승덕을 빤히 쳐다봤다.
“하하, 결국 정안후부로 들어오는군요! 우리가 전에 그렇게 들어오라고 할 때는 안 들어오더니. 정말 미안하게 됐네요. 제가 계속 집에 없어서 그편에게 제 자리를 내어 줄 수 없었겠죠. 그 여인은 억울하게도 이제 첩실이 되어야겠네요.”
그래서 자신이 그간 추씨 가문에서 지낸 것 아닌가. 그들이 자신을 해치는 걸 막기 위해서 말이다.
온씨를 쳐다보는 엽승덕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런데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엽균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어머니, 어머니는 어째서 아직도 이러시는 겁니까? 그때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들어오라고 하셨는데도 안 들어온 게 아니라 과거 시험을 치른 후에 들어가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래서 지금 들어오려는 것 아닙니까?
어머니는 어째서 아직도 이리 매몰차게 구시는 겁니까? 아량을 좀 베푸실 수는 없는 겁니까? 어머니께서 이러시니… 제 체면이 깎일 대로 깎였습니다!”
엽균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럽고 화가 났다. 지금은 둘째, 셋째 숙부뿐만 아니라 열 명가량의 집안 어른들과 큰고모 부부, 작은고모 부부, 심지어 고모할머니까지 함께 계시는 자리 아닌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렇듯 냉정하고 인색하게 행동하는 여인이 하필 자신의 어머니라니, 엽균은 부끄러워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형님.”
나씨가 온씨를 살짝 잡아당겼다. 어쨌든 상황이 이렇게까지 됐으니 너그럽게 행동해야 한다. 그래 봤자 첩실에 불과하지 않은가.
“누굴 말하는 게냐?”
여섯째 증조부는 미간을 찌푸렸고 옆에 앉아 있는 그의 부인도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누굴 입적한다는 게냐?”
“여섯째 증조부님, 증조모님. 정랑 모자를 말하는 겁니다!”
엽균이 또다시 나서서 그들에게 설명을 해 주었다.
“계속 송화 골목에서 살았는데 이제 정안후부로 들어오려는 겁니다.”
“아! 생각이 났다.”
여섯째 증조부는 희끗희끗한 눈썹을 달달 떨며 말을 이었다.
“승덕이의 그 외실을 말하는 게지?”
자리에 앉아 있던 몇몇 집안 어른들은 말없이 미간을 찌푸렸고, 여섯째 증조모가 바싹 말라 쪼글쪼글해진 입을 벌렸다.
“그냥 데리고 들어오면 되지, 굳이 가족 회의까지 열어야 되느냐?”
“그러게 말이오!”
여섯째 증조부가 엽학문을 바라보며 나무랐다.
“큰조카, 자네는 이 늙은이들의 성치 않은 몸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구먼. 그래도 우리는 그나마 괜찮지. 도성 안에 살고 있으니 말이네. 한데 자네 누님은 칠십이 넘은 노인이네. 그 먼 비주에서 며칠 동안 흔들리는 마차를 타고 오는 바람에 뼈마디가 다 쑤실 지경인데, 겨우 첩실을 들이는 일 때문에 불렀다는 건가?”
“그러게 말입니다!”
몇몇 어른들도 일제히 엽학문을 꾸짖기 시작했다.
“그저 첩실을 집안으로 들이는 일 아닌가? 의붓자식을 데리고 들어온다 하더라도 족보에 기입하고 서출인 양자라는 지위를 주면 충분한 일이거늘, 굳이 이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야 할 필요가 있느냐 이 말이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이렇게 법도도 모르는 집안이 어디 있는가? 이 이야기가 밖으로 흘러나가면 우리 엽씨 가문 사람들의 체면은 바닥에 떨어질 걸세.”
이 상황을 보고 있던 온씨, 묘씨, 나씨 그리고 엽영교는 속이 다 후련해졌다. 별것도 아닌 것들이 번번이 설쳐댔으니 욕을 먹어도 쌌다. 다른 사람들도 다 자기들처럼 뻔뻔할 거라고 생각했단 말인가?
엽균은 이들의 말을 듣더니 쭈뼛거리며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엽학문이 은정랑과 허서를 위해 가족 회의를 연 것이라고 말했을 때, 엽균은 말할 수 없이 기뻤고 이를 통해 정랑과 허서의 체면을 살려 주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첩실의 지위이기는 해도 어쨌든 이제는 아주 떳떳하게 집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온씨도 감히 그들을 핍박하며 난처하게 하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한목소리로 비난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그만들 하십시오!”
엽학문이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귀한 손자를 의붓자식이라고 불러대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여섯째 증조부님, 증조모님. 그리고 자리에 계신 숙부, 숙모님들. 엽씨 가문의 수장인 제가 어찌 그런 법도도 모르는 일을 벌이겠습니까? 우선 그 모자부터 안으로 들이겠습니다!”
엽승덕이 그들을 부르러 가려는 찰나, 엽균이 손을 번쩍 들며 일어섰다.
“제가 가겠습니다. 제가 갈게요.”
그러더니 돌아서서 밖으로 뛰어나갔다.
온씨는 신이 난 엽균의 모습을 보고는 분통 터져 했으나 엽연채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에 조롱기가 스칠 뿐이었다.
한편, 은정랑과 허서는 이미 정안후부에 와 있었다. 그들이 안녕당 근처의 조그만 응접실에서 긴장한 얼굴로 차를 마시고 있는데, 엽균이 안으로 뛰어 들어오더니 헤벌쭉 웃어 보였다.
“정랑, 서야. 할아버지께서 부르신다!”
“아… 알겠어요.”
은정랑은 심호흡을 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 드디어 온 것이다.
“서야, 정랑. 긴장할 것 없어요.”
엽균은 긴장한 그녀의 모습을 보자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해요. 집안사람들이 듣기 싫은 소리를 할 거예요. 그저 첩실을 들이는 것뿐인데 이 많은 사람들을 불렀다는 등의 이야기를 할 거예요.”
그 말을 들은 은정랑의 눈빛에 조롱기가 스쳤다. 허서도 내심 그를 비웃기는 마찬가지였으나 눈썹을 추켜세우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걱정할 것 없어요! 내가 보호해 줄게요! 절대로 그 사람들이 두 사람을 업신여기게 놔두지 않을 거예요!”
엽균이 가슴팍을 두드리며 장담했다.
“알겠어요. 그럼 균이 공자님께 부탁 좀 드릴게요.”
은정랑은 조그만 붉은 입술을 씩 올리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형님, 역시 저희에게 제일 잘해 주는 사람은 형님이세요.”
허서가 허허 웃으며 고마움을 표했다.
“허허, 내가 아니면 또 누가 두 사람에게 잘해 주겠어.”
엽균은 헤실거렸다.
이렇게나 가여운 정랑과 허서가 어렵사리 첩실과 서자가 되려는 것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라고 해 봐야 고작 이런 보잘것없는 것들인데, 그걸 그리 내주기 싫다고 중간에서 이렇게 방해를 해대다니, 어떻게 그런 불공평한 일을 참고 있을 수 있겠는가? 약자들이 강한 힘을 가진 자들에게 억압당하는 꼴을 자신이 어떻게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갑시다! 어서 가요.”
엽균이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 그는 걷는 동안 주변 풍경을 가리키며 모자에게 말을 걸었다.
“봐요. 예쁘지 않아요? 이제 이곳이 곧 두 사람의 집이 되는 거예요.”
“그렇네요!”
은정랑이 사방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주변엔 정자와 누각, 다리와 석가산이 보였고 어디 한 군데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제 이곳이 자신의 집이 되는 것이다.
한편, 안녕당에서는 나이 지긋한 집안 어른들이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이가 많을수록 법도를 중시하는 법이니 당연했다.
그러나 참는 수밖에 없었다. 현재 집안의 수장이 엽학문이고 또 그가 제일 부유하기도 하니 대부분은 엽학문에게 도움을 구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래서 그가 사람을 불러 오는 걸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너무 상식에서 벗어난 일을 벌일 경우에는 따끔하게 말을 할 생각이었다.
잠시 후,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앞장선 엽균 뒤로 어떤 모자가 따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삼십 대로 보이는 여인은 키가 작아 귀엽고 아담해 보였고, 얼굴이 조그맣고 갸름했으며 눈썹은 고운 버들잎 모양에, 눈은 컸고 입은 작았다. 그녀는 흰 바탕에 자잘한 매화 문양이 들어간 장화粧花 비단으로 만든 대금식 배자를 입었고, 머리에는 푸른 비취로 만든 보요 두 개를 꽂고 있었다.
그녀는 예의 바른 미소를 짓고 있어 단정하고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 그 곁의 젊은이는 서생들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외모도 깔끔하고 풍채도 고상했다. 두 사람의 옷차림과 치장은 격식을 갖춘 데다 분위기도 부드러워 보여 쉽게 호감을 살 외모였다.
“정랑.”
엽승덕은 푹 빠진 눈빛으로 은정랑을 쳐다봤다. 마침내 그녀를 집안으로 들이게 된 것이다. 드디어 은정랑이 떳떳하게 이 집안 중앙의 본채에 서 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