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259화 (259/858)

제259화

저녁이 되자 피곤에 지친 엽연채는 방바닥에 주저앉아 따뜻한 물에 조그만 발을 담그고 있었다.

“아가씨, 잊으시면 안 돼요. 모레 초여드렛날에 가족 회의가 열리니 친정집에 가셔야 돼요.”

추길은 그리 말하며 그녀의 다리를 안마해 주었다.

“그래.”

엽연채는 축 처진 모습으로 대답했다. 요 며칠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주운환이 장원 급제를 한 뒤로는 내내 제대로 쉬지를 못했다.

“셋째 도련님을 불러야 할까요?”

“공자께서는 내일 조정에 나가 황제 폐하를 뵙게 돼. 별다른 이유도 없이 조정에 하루 나간 다음 바로 휴가를 신청하라고 할 수는 없잖니.”

추길의 물음에 엽연채는 옅은 한숨을 쉬더니 이렇게 대꾸했다.

“으, 너무 피곤하구나!”

그러고는 몸을 돌리자 뼈에서 뚜둑거리는 소리가 났다. 혜연은 얼른 엽연채의 두 다리를 깨끗이 닦아 준 다음 그녀가 편이 잠들 수 있도록 침실로 이끌었다.

이튿날, 맥이 풀어진 엽연채는 하루 동안 푹 쉬었고, 그다음 날인 삼월 초여드렛날 마차를 타고 정안후부로 갔다. 엽연채는 수화문에 멈춰 선 마차에서 내리다가 손씨와 마주치게 되었다.

“무슨 일로 굳이 부른 건지 모르겠네요.”

손씨는 군소리를 지껄였고, 여설은 그런 그녀를 부축하며 마차에서 내렸다.

주운환이 장원 급제를 했기 때문에 손씨는 온씨와 엽연채가 우쭐거리고 묘씨 등은 당연히 엽연채와 그쪽 식구들을 추켜세울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손씨는 엽이채를 돌본다는 핑계로 장씨 가문에 뿌리를 내리고 영영 집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 유이가 장씨 가문으로 찾아와 그녀에게 반드시 집으로 돌아와야 하며 장박원도 함께 와야 한다고 전했다.

손씨가 마차에서 내리자 장박원은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수화문으로 들어서기 전에 엽연채가 푸른 덮개가 달린 작은 마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손씨와 장박원은 낯빛이 확 변했고 그녀를 피해 가려는 찰나, 엽연채가 그들을 보고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아는 척을 했다.

“숙모, 제부.”

손씨는 허허허 웃고 말았다. 엽연채의 입꼬리에서 느껴지는 득의양양한 미소에 손씨는 짜증이 치밀고 질투심이 타올랐으며 창피하고 분통이 터졌다.

등받이가 없는 네모난 작은 걸상을 밟으며 마차에서 내려오는 엽연채는 맑고 아름다운 얼굴로 눈부시게 화사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득의만면한 모습이 딱 장원 급제자 부인이었다.

장박원은 엽연채를 보더니 표정이 확 구겨졌지만 그 찬란하고 환한 미소에 시선을 사로잡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찬란한 미소는 따뜻한 햇살처럼 보였다.

장박원은 저도 모르게 집에 있는 엽이채가 떠올랐다. 그녀는 수백만 냥을 빚지기라도 한 양, 매일같이 울 듯 말 듯한 재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장박원은 곧 자신의 생각에 황당해했다. 전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그 모습이 애처롭고 가냘파서 어여쁘게 보였고, 엽연채는 아름답기는 하지만 너무 화려하고 기가 센 드센 여인으로 보였다.

그런데 지금은 엽이채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귀찮게 느껴졌고 엽연채는 햇살처럼 빛나는 매력적인 사람으로 보였다. 그녀는 다른 사람을 환하게 비추어 그 사람의 마음속 어두운 부분을 말끔히 씻어 버리고 마음속에서 희망이 싹트게 해 줄 것만 같았다.

이런 생각이 들수록 장박원의 마음은 점점 더 괴로워졌고 가슴속에 분노가 드세게 치밀었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거다!’

장박원은 얼른 엽연채가 엽이채보다 낫다는 생각을 부정했다. 인정하면 자신의 선택이 틀렸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틀렸을 리가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전의 자신이 대체 뭐가 되겠는가.

엽연채가 보니 장박원은 몸이 비썩 말라 있었고 눈 밑에는 그늘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녀는 보기 흉하게 초췌해진 그의 모습을 보더니 좀 우습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휙 돌리고 먼저 가 버렸다.

장박원은 그녀가 자신을 훑어보자 갑자기 경직되고 긴장되었다. 엽연채가 왜 자신을 쳐다본단 말인가? 설마 옛정이 떠오르기라도 했는가? 그 서자보다 자신이 더 좋아서 이러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장박원은 좀 흥분이 되었는데 그녀는 그를 한번 쓱 쳐다보더니 아무 미련 없는 모습으로 떠나가 버렸다. 엽연채가 그런 태도를 보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장박원은 순간 어리둥절해했다. 그러나 이내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저 천하고 음탕한 계집! 이미 혼인했으면서 날 쳐다보며 유혹하려고 하다니!’

한편, 엽연채가 수화문 안으로 들어서자 엽영교가 그녀를 맞이하러 왔다.

“연채야.”

“고모? 어디 가세요?”

엽연채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고모는 가족 회의가 열리는 안녕당에 가 있을 줄 알았는데, 왜 이쪽으로 왔담?’

“널 데리러 왔지.”

엽영교는 호호 웃으며 그녀와 팔짱을 끼고 앞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조잘조잘 떠들며 걸어가고 있다가 안녕당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팔각지붕 정자에서 엽균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는 휘파람을 불며 안녕당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엽영교가 싸늘하고 어두운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균이 넌 전에는 집안에 무슨 일이 있든 간에 멀찌감치 피해 있곤 하지 않았니! 오늘은 가족 회의가 열리는 날이란다. 큰 새언니와 할머니도 다 계신데 너까지 오는 게냐?”

엽균은 그녀가 자신을 비웃자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고모, 아무리 그래도 저도 고모의 조카예요. 그런데 매번 이렇게 절 밀어내셔야겠어요? 어찌 이렇게 매몰차고 냉정하게 구시는 거예요.”

엽영교가 기가 막혀 침묵하자 엽연채가 냉랭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고모, 신경 쓰지 마세요. 잠시 후에도 저럴 수 있는지 어디 두고 보죠.”

엽균은 답답하고 기분이 언짢았다.

“뭘 어쩔 건데? 어머니를 통해 날 혼내려는 모양이지? 한데 넌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구나. 이번에는 네가 괜찮을지 내 두고 볼 것이다!”

“아, 궁금하네요. 무슨 일이기에 내가 괜찮을지 두고 본다는 걸까.”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비웃음을 날렸다.

“하,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나도 네가 알아 봤자 무서울 것 없다.”

엽균도 냉소를 지으며 받아쳤다.

“아버지께서 이미 내게 말씀하셨어. 할아버지께서 정랑과 허서를 정안후부로 들이는 일을 허락하셨다고 말이야. 오늘 회의는 이 사실을 공표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봐라. 할아버지마저도 정랑과 허서를 받아들이겠다고 하셨는데, 너랑 어머니만 도량이 좁아 그 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다.”

말을 마친 엽균은 콧방귀를 뀌더니 잰걸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뭐라고?”

그의 말에 엽영교의 조그만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 모자를 정안후부로 들인다는 말이야? 한데 큰오라버니는 줄곧 그 첩실을 정실로 만들려고 했잖아? 그런데 그 여인을 첩실로 만들려고 하겠어?”

“들이기 싫어도 들여야겠죠!”

추길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동안 저희가 저치들을 계속 조심해 왔잖아요. 저 사람들이 마님을 해치고 싶어도 마님이 추씨 가문에서 지내셨기 때문에 손 쓸 길이 없었겠죠. 그런데 그 여인은 젊지 않잖아요. 지금 정안후부로 들어오지 않고 몇 년 더 지나면 나이가 들어 괄시를 당할 테니, 그땐 첩실도 될 수 없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을 테죠.”

이 말에 엽영교는 미간을 더더욱 찌푸렸다.

“그 모자가 얼마나 계산적인데. 이낭이 된대도 난 싫어. 차라리 밖에서 지내는 게 낫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오다 보니 그들은 어느새 안녕당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낯선 여종과 하인들이 낭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엽영교는 항렬이 높은 집안 어른들이 이미 도착했으며 이들은 그 어른들의 하인임을 바로 짐작했다.

엽학문과 묘씨는 상석에 앉아 있었다. 하좌의 양쪽으로는 의자들이 죽 놓여 있는데, 열 명 정도 되는 육칠십 대 노인과 노부인들이 그곳에 자리했다. 그중 몇 명은 격식 있는 차림을 하고 있는 반면, 또 다른 몇 명은 아주 초라한 차림이었다.

어디까지나 엽학문의 식구들만 정실이 낳은 적자 자손의 계통인지라, 나머지 사람들은 전부 방계였다.

외지로 시집간 엽영교의 두 서녀 언니들도 정안후부로 돌아와 있었다. 엽영교의 큰언니와 둘째 언니 그리고 둘의 남편들은 엽씨 가문 사람들 맞은편에 놓인 권의에 앉아 있었다.

이 자리에는 엽학문의 적녀 누이도 얼굴을 비쳤는데, 칠십이 넘은 노쇠한 몸을 이끌고 며칠 전 비주備州에서 출발해 막 도성에 도착한 참이었다.

엽승덕 삼 형제, 온씨를 비롯한 며느리들은 앉을 자리가 없었다. 이에 엽승덕 형제는 집안 어른들 뒤에, 온씨 등 며느리들은 맞은편에 있는 엽학문의 적녀 누이 뒤에 서 있었다. 손씨는 나씨 옆에 서 있고, 장박원은 엽영교 작은언니의 남편 옆에 앉아 있었다.

엽연채가 안으로 들어가자 몇몇 집안 어른들과 엽영교의 언니들이 그녀를 쳐다봤다.

“어머, 장원 급제자의 부인께서 오셨네요.”

엽영교의 큰언니가 미소를 지으며 가장 먼저 인사했다.

다른 이들도 관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고, 그중 칠십 대로 보이는 한 어른이 미소를 지으며 듣기 좋은 말을 건넸다.

“우리 엽씨 가문 여식 중에도 이런 복을 누릴 아이가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구나.”

그 말에 엽승덕의 눈빛은 싸늘해졌고 엽학문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둘은 마음이 복잡했는데 그나마 주운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두 부자는 주운환이 황제를 뵈러 조정에 나간 그다음 날 바로 휴가를 내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이날을 골랐다.

엽연채는 미소를 짓더니 앞으로 다가가 그들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할아버지, 자리에 계신 어르신들, 고모할머님…….”

엽연채가 그들을 일일이 부르고 나니 묘씨가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권했다.

“네 둘째 고모 옆에 가서 앉으렴.”

엽연채는 지금 손님의 신분이니 어머니가 서 있더라도 자신은 자리에 앉아야 했다. 엽연채는 사양하지 않고 작은고모 옆으로 가서 자리에 앉았고 엽영교는 그녀의 뒤에 섰다.

작은고모는 엽연채를 끌어당기며 그녀에게 황제가 베푼 연회는 즐거웠는지 따위를 물어봤다. 온씨는 여러 친척들의 주목을 받는 딸의 모습을 보자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흠, 모두 도착한 것 같군요.”

엽학문이 헛기침을 하며 말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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