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7화
“대부인, 둘째 부인, 아가씨들. 처음 뵙겠습니다.”
엽연채는 속으로 그들의 관계를 정리해 봤다. 설 대부인은 설씨 가문 큰아들의 아내이고 여섯째 소저는 그녀의 딸이며, 둘째 부인은 설씨 가문 둘째 공자의 아내이고 설옥인은 그녀의 서녀였다.
전에 주씨 가문에 경조사가 있으면 설씨 가문에서는 그저 설옥인을 대표로 보낼 뿐이었는데, 이제 주운환이 장원 급제를 하고 주 백야도 황제의 부름을 받은 데다가 황제가 그를 기억하기까지 하니 설씨 가문 사람들이 총출동한 것이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엽연채가 그들을 정자의 의자로 안내했다. 그런데 이때 또 다른 여종이 와서 보고를 올렸다.
“셋째 마님, 친정 식구들이 오셨습니다.”
“그래.”
엽연채는 얼른 밖으로 나가 그들을 맞이했다.
설씨 가문 사람들이 물가에 지어진 정자 안에 앉아 있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가 큰 소리로 설옥인을 불렀다.
“설옥인, 이리 오려무나!”
설옥인이 고개를 돌려보니 비 이낭이 반대편 다리에서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설옥인이 난감한 표정을 짓자 설씨 가문 둘째 부인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안 가고 뭐 하느냐? 얘는 참……. 널 부르고 있잖니.”
비 이낭은 주종과의 생모이지만 그저 이낭에 불과하니 설옥인의 시어머니는 진씨였다. 그런데 설씨 가문 둘째 부인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의 친딸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럼… 전 저쪽으로 가 보겠습니다.”
설옥인은 난감한 얼굴로 일행에게 말하고서는 바로 정자 밖으로 나갔다.
엽연채가 정자 밖으로 향하니 여종의 안내를 받아 백로원 근방까지 온 온씨 등이 그녀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굳은 표정의 엽학문은 뒷짐을 진 채 앞장섰고 엽승신, 엽승강, 온씨, 엽영교가 그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엽학문은 엽연채를 보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엽연채도 무덤덤하게 ‘할아버지.’ 하고 한 번 부르고는 온씨와 엽영교에게 다가가 그들을 끌어당겼다.
“어머니, 고모.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죠!”
엽학문은 엽연채가 자신을 본체만체하자 가슴이 답답해지며 말로는 표현 못 할 노여움이 치솟았다. 전에는 이 손녀가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건 더욱 질색이었다. 그랬다고는 하나 지금 그녀가 감히 자신이 안중에도 없단 태도를 보이자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엽연채를 따라가던 온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마침 장씨 가문에서 세삼洗三을 지내 식구들끼리 장씨 가문으로 한 사람씩 보냈단다. 너희 할머니와 셋째 동서, 미채가 장씨 가문으로 갔어.”
당연히 장씨 가문으로 갈 거라고 생각했던 엽학문이 주씨 가문에 가겠다고 고집을 피울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랬군요.”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저도 혜연이를 저 대신 그쪽으로 보내 선물을 전달했어요. 자, 백로 정자로 가시죠!”
그들이 호숫가를 따라 걸어가며 보니 햇빛에 반짝거리는 호숫물과 푸른 초목, 부평초가 눈에 들어왔다. 일행은 잠시 후 다리를 건너 물가에 지은 정자에 도착했다.
주운환은 소식을 듣고 이미 그곳에 와 있었다. 그는 온씨를 보더니 깍듯이 예를 올렸다.
“장모님, 고모님.”
온씨는 주운환을 보더니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동안 고생 많았으니 푹 쉬거라.”
주운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리하겠다고 대답했고, 그런 후에 엽학문과 엽승신 형제를 모시고 밖으로 나가 사내들과 시간을 보냈다.
엽연채는 온씨 등을 자리에 앉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온사월을 비롯한 온씨 가문 사람들이 함께 걸어왔다. 엽연채는 온사월을 온씨 곁으로 데려가 그녀 곁에 착석하도록 했다.
호숫가의 팔각지붕 정자는 사내들을 대접하는 곳인데, 그곳에서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다들 그리로 몰려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엽영교가 호숫가를 가리키며 궁금해하는데 추길이 황급히 이쪽으로 걸어왔다.
“셋째 마님, 비 이낭이 저쪽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는 모양입니다.”
“비 이낭이?”
엽연채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주씨 가문은 상전이 적은데 손님들은 이리 많으니 어떻게 다 일일이 통제할 수 있겠는가? 애초에 이 자리는 비 이낭 같은 사람은 오면 안 되는 자리였다. 그러나 그녀를 지켜볼 겨를이 없었다. 또 그녀가 이렇게 뻔뻔히 사람들 앞에서 추태를 보일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가자. 가서 봐야겠구나.”
엽연채는 추길과 함께 서둘러 정자를 나섰다. 걸어가던 그녀는 불현듯 비 이낭이 설옥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그녀와의 혼사를 거듭 무르려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 엽영교는 이런 구경을 좋아해 얼른 온씨를 끌고 그곳으로 향했다.
그들이 꽃무늬가 조각된 커다란 다리를 지나 청석판이 깔린 길을 따라 걸어가니 석가산을 끼고 지어진 낭가廊架가 나왔다. 양쪽으로 자라나는 키가 큰 푸른 대나무가 낭가 위로 구부러져 있어 수려하고 그윽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사람들은 낭가 밖의 석가산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엽연채와 엽영교가 걸어가 보니 안쪽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천한 것. 너 오늘 내 손에 죽어 봐라!”
엽연채가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 보니 비 이낭이 설옥인을 붙잡고 그녀를 때리고 있었고 주종과는 굳은 표정으로 그곳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준수하게 생긴 열여덟 살 정도 되어 보이는 한 사내도 서 있었다. 그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선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고 있었다.
“여기서 무슨 소란을 피우는 게냐?”
주 백야와 진씨 등도 서둘러 이곳으로 몰려왔다.
“나리, 나리께서 절 대신해 이 일을 해결해 주셔야 합니다!”
비이낭은 ‘아이고’ 소리를 내며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고, 설씨 가문 사람들이 오는 모습이 보이자 설옥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망할 계집애가 제부와 붙어먹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방 공자께서 어찌 옥인이와 사통하셨다는 겁니까?”
설씨 가문 여섯째 소저는 성이 난 목소리를 내며 비 이낭을 죽어라 노려봤고 이어 고개를 돌려 준수하게 생긴 사내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방 공자는 바로 그녀의 정혼자로, 한 달쯤 뒤에 혼례식이 예정돼 있었다.
“그런 일은 결코 없었소.”
방 공자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황급히 해명했다.
“내가 왜 저 사람을 마음에 들어 하겠소!”
설옥인은 출신과 외모 모두 여섯째 소저보다 못했다. 거기에 성격도 줏대 없고 나이도 여섯째 소저보다 몇 살 더 많은데 그가 눈이 삐지 않고서야 어찌 설옥인을 마음에 들어 하겠는가? 세상 모든 사내가 다 장박원이라는 사람처럼 눈이 삔 줄 아는 건가?
“이런 짓을 해 놓고 인정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비 이낭은 냉소를 짓더니 ‘아이고, 아이고’ 하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한탄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나.”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설 대부인은 힘줄이 툭툭 불거질 정도로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 이 일은 그녀의 예비 사위와 관련된 일이며 딸 일생의 행복과도 연관된 문제였다.
“여기 계신 방 공자가 그랬습니다! 이분이 설 여섯째 소저의 정혼자이시죠?”
주종과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이분이 제 예비 동서이니 함께 술이나 하려고 불렀습니다. 술에 취한 방 공자를 부축하다가 옷을 끌어당기게 됐는데, 글쎄 이분의 소맷부리에서 두두肚兜가 나온 겁니다. 그 두두를 펼쳐 봤더니, 글쎄 설옥인의 이름이 수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도 제 정혼녀가 제부가 될 사람이랑 사통했다고는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비 이낭을 불러 일부러 설옥인의 옷을 적셔 함께 옷을 갈아입으며 보도록 했는데, 설옥인의 두두에도 이것과 같은 형태의 ‘설’ 자가 수놓여 있었습니다.”
주종과는 분노와 상심으로 가득 찬 얼굴임에도 흥분이 끓어오르는 눈빛을 띠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비 이낭이 울부짖었다.
“전 그런 적 없어요……. 그런 적 없단 말이에요…….”
설옥인은 눈물을 흘리며 거듭 부정했다.
“그런 적 없다고?”
비 이낭은 목이 쉬어 갈라지는 소리를 내더니 갑자기 달려들어 그녀의 옷을 찢어 버렸다.
“이것 좀 보세요. 같은 형태의 자수이지 않습니까! 봐 봐라. 저게 너의 그 불결한 두두가 아니더냐!”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엽연채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들 앞에서 여인의 옷을 찢어 버리는 건 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 않은가. 게다가 이곳에는 사내들도 있었다.
추길이 비 이낭에게 다가들더니 그녀를 확 밀쳐 버렸다.
“아이고, 이게!”
비 이낭은 그녀에게 밀쳐져 비틀거리면서 목청을 높였다.
“방 공자,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설씨 여섯째 소저는 의심 어린 눈길로 방 공자를 쳐다봤다. 그녀의 얼굴에서 격양된 감정이 여실히 드러났다.
“난 그런 짓을 한 적이 없소!”
방 공자는 억울해 죽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두두는 정말로 그쪽의 소맷부리에서 나왔잖소.”
구경을 하던 한 사내 손님은 일이야 커지든 말든 이런 말을 내뱉었다.
“맞소!”
여러 사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 그들은 방 공자, 주종과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방 공자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자 주종과가 그를 부축했고 그러다가 그의 소맷부리 안쪽을 만지게 됐는데, 뜻밖에도 두두가 끌려 나온 장면을 모두 목격했다.
“난… 정말로…….”
방 공자는 정말이지 분통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 두두가 언제 그의 옷소매 안으로 들어간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짓을 벌여 놓고 인정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비 이낭이 또다시 크게 울부짖었다.
“상관없습니다. 파혼하겠습니다! 이 혼사는 반드시 물릴 겁니다! 두 사람의 애정이 이렇게나 깊으니 그 뜻을 이뤄 주면 되죠. 설 대부인, 안 그렇습니까?”
그리 말하며 그녀는 설 대부인을 쳐다봤다. 설 대부인은 피를 토할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이 예비 사위에게 그런대로 만족하고 있었다.
방 공자는 출신도 평범하고 학식을 대단히 갖춘 사람도 아니었지만, 그녀는 부귀영화를 탐내지 않아 그저 딸이 행복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설 대부인도 방 공자를 믿고 싶었지만 이 일은 딸의 일생이 걸린 중대한 일이므로 대충 넘어갈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