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6화
녹지는 낯빛이 확 변했으나 하는 수 없이 사실대로 고했다.
“공주 마마께서… 어울리는 짝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어울리는 짝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일순 현기증을 느낀 진씨는 엽연채를 빤히 쳐다보며 다시금 물었다.
“제대로 말한 것이냐?”
“어떻게 말해야 제대로 말한 겁니까?”
엽연채는 낮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저는 하소군왕께서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 물어보며 제 큰시누이가 아직 혼인하지 않았다고 운을 뗐을 뿐인데, 마마께서 제 의중을 알아차리시더니 바로 거절의 뜻을 전하셨습니다. 어제 태자비 마마를 통해 큰시누이가 태자부에서 쫓겨났던 일까지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진씨는 지난번 태자부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더니 그대로 탑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슴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진지항 일만 없었다면 하소군왕과의 혼사가 성사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렇게 마음이 괴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진지항은 탐화로 뽑혔는데, 딸은 더 좋은 혼처를 구하지 못했다. 진씨는 지금 느껴지는 이 처절한 기분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어머님, 전 최선을 다했습니다.”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예를 올린 후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혜연이 그녀의 뒤를 쫓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혼담을 꺼내라는 주인마님의 요구에 한번 응해 주셨으니 앞으로 또 이런 일로 찾으시면 더는 응하시면 안 됩니다.”
“물론이다.”
엽연채는 냉소를 지으며 동조했다. 주묘서가 분수를 아는 사람이었다면 혼담을 꺼내고 중매를 서 주는 일이 그리 대수롭지 않았을 것이며, 자신 또한 시누이가 좋은 곳에 시집가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진씨 모녀는 말썽을 부리지 않고는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안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면 모녀가 자신을 해코지를 할 테고, 그렇다고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면 자신이 그 사내를 해코지하게 되는 셈이었다.
엽연채가 일상원을 떠난 뒤로도 탑상에 앉아 있는 진씨는 화가 나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녀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러 온 백 이낭은 진씨의 표정을 보더니 감히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늴리리쿵더쿵……. 하하하!”
이때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며 주 백야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초대장이 한가득 들려 있었다. 주 백야는 초대장을 항탁 위에 올려놓더니 붓을 집어 들고는 빼곡하게 글을 써 내려갔다.
주 백야는 미소를 지으며 운을 뗐다.
“부인 말이 딱 들어맞았소. 자네가 ‘셋째가 장원 급제를 하면’이라고 말했는데 정말로 장원 급제를 하지 않았소. 허허허!”
작년에 주운환이 거인이 되었을 때, 자신은 성대한 연회를 베풀려고 했었다. 그런데 진씨가 찬물을 끼얹으며 거인이 된 것에 불과한데 성대한 연회를 베풀 것까지는 없다며, 장원 급제를 하면 그때 성대하게 치러도 늦지 않다고 빈정댔었다.
그때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장원 급제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이냐며, 장원 급제는 고사하고 진사로 합격하는 것도 몹시 어려운 일이라고 내심 반박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녀와 말다툼을 벌일 배짱은 없어 그저 자신의 뜻을 꺾고 말았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진씨가 했던 말이 상서로운 축복의 말이었던 셈이다.
“자네의 상서로운 말 덕분이니 이번에는 정말로 성대하게 치를 것이네.”
주 백야가 하하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진씨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고 자신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런 말은 절대로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주 백야는 안색이 좋지 않은 진씨를 보더니 그녀의 속이 어떤지 알아차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운환이가 좋은 성적으로 과거 시험에 합격했으니 우리 가문도 이제 고난을 헤쳐 나온 셈이오. 이제 더는 우리 가문을 몰락한 가문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오. 그럼 묘서와 묘화도 좋은 가문에 혼담을 꺼낼 수 있을 테고.”
그 말에 진씨의 마음은 더욱 괴로워졌다. 방금 전에 엽연채를 공주부로 보내 주묘서의 혼담 이야기를 꺼내게 했는데 그 결과가 좋지 않았다.
주 백야는 초대장을 다 작성한 뒤 이렇게 말했다.
“내일 연회는 셋째 아가에게 맡기는 게 어떻소?”
“하하, 당연하죠.”
진씨는 골이 잔뜩 나 있었다. 엽연채에게 맡기지 않으면 자신이 손님맞이를 도맡아야 하는데, 그럼 속이 더 뒤집힐 것 같았다.
주 백야는 아주 만족스러워하더니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진씨는 너무 가벼워서 금방이라도 하늘로 뛰어오를 것 같은 주 백야의 발걸음을 보며 어두운 표정으로 탑상 위에 앉아 있었다.
이때, 조용하던 백 이낭이 입을 열었다.
“공주부는… 원래부터 과분한 상대라는 느낌이 좀 있었습니다.”
진씨는 공주부가 주묘서에게는 과분한 혼처라는 그녀의 말에 낯빛이 어두워지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게 무슨 뜻이냐? 어?”
백 이낭은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용기를 내어 말했다.
“부인께서… 인정하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솔직히 말해 공주부는 분수에 맞지 않은 혼처였습니다. 하소군왕은 군왕의 작위를 받으신 분인 데다가 황제 폐하의 총애를 듬뿍 받고 계신 분입니다. 조만간 관직도 내려지겠지요.
저희 가문은 그쪽에서 생각하는 혼처 축에도 끼지 못할 겁니다. 왕족, 공주, 군주郡主 정도는 돼야 하겠죠. 게다가 그분은 이제 겨우 열여섯 살이신데 어디 되는 대로 짝을 지어 주려고 하시겠습니까?
저희 주씨 가문은 몰락한 가문이었다가 이제서야 가까스로 빛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건 셋째 도련님께서 좋은 성적으로 과거 시험에 합격하신 덕분이고요. 그런데… 하필이면 큰아가씨께서 태자부에서 그런 일을 벌이셨던 바람에 공주 마마께서 그 사실을 아시고 아가씨를 거절하신 거죠.”
자신이 신양 공주였어도 주묘서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씨의 낯빛이 점차 써늘해졌으나 백 이낭은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마저 내뱉었다.
“마님, 셋째 도련님께서 좋은 성적으로 과거 시험에 합격한 건 이제 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님께서 도련님을 난처하게 만들고 맞서려고 하시면 저희에겐 득이 될 게 없습니다. 차라리 도련님을 이용해 우선 큰아가씨를 좋은 배필에게 시집보내야 합니다. 그리되면 세자야께서 좋은 관직을 얻는 데도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겁니다.”
“지난번에도 자네가 셋째 아가를 이용해야 한다고 말했지. 그런데 지금 결과를 보거라……!”
진씨가 노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백 이낭은 어이가 없었고 눈빛에는 조롱기가 스쳤으나 그녀는 조심스러운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예, 셋째 마님을 이용하지 않으셨습니까? 지난번에 안사돈인 온씨가 저희 가문을 방문해 큰아가씨께 혼담을 꺼내지 않으셨습니까?”
진씨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분명 혼담을 꺼내러 왔었고 그녀가 소개한 상대는 이번 시험에서 탐화가 되었다. 그런데 자신이 거절했던 것이다.
“그러니 이번에는 반드시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큰아가씨의 나이가 적지 않습니다.”
백 이낭이 강조했다. 주묘화도 점점 나이를 먹고 있었다. 그런데 주묘서가 시집을 가지 못하면 주묘화의 혼담은 꺼낼 기회조차 없었다.
* * *
이튿날, 연회는 백로원白露園에서 열렸다.
그런데 주 백야는 원래 득승대得勝臺에서 연회를 베풀고 싶어 했다. 득승대는 주씨 가문에서 성대한 연회를 베풀 때 사용해 온 장소로, 과거 주씨 가문 장수들이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면 매해 이곳에서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득승대 아래로는 연극 무대가 마련되어 있고 사면이 2층으로 지어진 누각으로 둘러싸여 있어 백 명은 충분히 앉을 수 있는 자리였다.
주 백야가 사람들을 시켜 득승대를 청소하고 있었는데, 한동안 처소 밖으로 나오지 않던 그의 어머니가 뜻밖에도 측근 마마媽媽를 보내왔다.
마마가 냉랭한 목소리로 주 백야에게 고했다.
“마님께서 전쟁터에서 돌아온 것도 아니니 그곳에서 연회를 베풀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주 백야는 언짢았지만, 어머니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어 울상을 지으며 난죽거로 가서 주운환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원래라면 득승대에서 연회를 베풀어야 마땅한데, 너희 할머니께서 전쟁터에서 돌아온 것도 아니라며 허락하지 않으셨다.”
주운환은 담담히 할머니의 뜻에 동조했다.
“원래부터 그곳에서 연회를 베풀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신 조상님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던 곳입니다. 그분들만이 그 공간을 누릴 자격이 있으시죠.”
주 백야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기회가 있을 겁니다.”
“그래! 관리로서 열심히 노력해 상서 같은 고위직에 오르게 되면 할머니께서도 아무 말씀 하지 못하실 게다.”
주운환의 속뜻을 모르는 주 백야는 허허 웃으며 이리 동문서답했다. 주운환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연회석은 백로원에 차려지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축하연 당일, 아침이 밝자 주씨 가문 대문이 활짝 열렸다. 여러 가문의 손님들이 잇달아 대문으로 들어섰다.
정원의 건물들은 다소 낡은 상태였지만 곳곳에 초롱이 달려 있고 오색 천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여기에 사람들로 북적거리니 번성하고 화려했던 예전의 모습을 어느 정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엽연채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여종들이 여손님들을 백로 정자로 안내하면 엽연채가 그곳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주 부인.”
이때, 누군가의 옅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엽연채가 고개를 돌려 보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여종들의 안내를 받으며 다리에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중 풀잎 문양이 들어간 연녹색 곡거曲據를 입은 한 소녀가 눈에 익었다. 바로 설옥인이었다. 그녀 곁에는 마흔 살 전후로 보이는 귀부인 둘과 열다섯 정도 되어 보이는 아리따운 소녀가 서 있었다.
“아이고, 장원 급제자의 부인이 아니신가! 과연 백문이 불여일견일세.”
가장 부티 나게 차려입은 한 귀부인이 앞으로 다가서더니 엽연채의 손을 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들을 모시고 온 녹엽이 한 명 한 명 신분을 알려 주었다.
“이분은 설 대부인이십니다. 호부시랑戶部侍郞 설 대인의 부인이시지요. 여기 이분은 둘째 부인이십니다. 셋째 마님과 둘째 아가씨는 이미 아는 사이시죠. 이분은 설씨 가문 여섯째 아가씨이고 호부시랑의 가장 어린 적녀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