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5화
“진 부인, 감축드립니다.”
그때 다른 탁자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쪽 탁자에도 여러 명의 귀부인과 규수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중 살짝 살집이 있는 한 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항 공자가 재능이 흘러넘치는 인재라 시험에 합격할 줄은 진작에 알았습니다. 그런데 탐화로 합격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 말에 진 부인은 함박웃음을 지으면서도 겸양했다.
“황제 폐하의 은총 덕분에 운 좋게 그리된 것뿐이지요.”
“운은 무슨 운입니까! 다 실력이지요. 젊고 유망한 인재예요!”
살짝 통통한 그 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진 부인을 재차 추어올렸다.
그런데 이때, ‘꽝’ 소리가 들려왔다. 진씨와 주묘서가 놀라 저도 모르게 탁상을 내리친 것이었다. 그들은 ‘탐화’라는 말에 엄청난 충격을 받아 낯빛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탐화였다니, 그럼 삼등 아닌가! 게다가 이렇게 젊은 사람이!’
그는 이십 대이니 그야말로 앞길이 창창한 사내였다.
진씨는 갑자기 뼛속 깊이 후회가 되었다. 그때 딸의 혼사에 응했으면 자신에겐 탐화가 된 사위가 생겼을 테니, 비천한 서자에게 밀리지 않았을 것이다.
주묘서는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밖에서 마주친 진지항이 제 앞을 가로막아 섰을 때, 거들먹거리며 자신은 태자부에 출입하는 사람이라고 잘난 체를 했던 기억이 선명했다.
그때 자신은 진지항이 제게 어울리는 짝이 아니라는 어투로 그를 낮잡아보았다. 그런데 자신은 그 이튿날 태자부에서 쫓겨나고 그는 이렇게 탐화가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주묘서는 이내 마음을 바꾸어 먹었다. 그의 평범한 생김새가 여전히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음속으론 아니꼬운 기분이 들었다.
진씨와 주묘서는 고개를 숙였다. 혹시라도 진 부인이 자신들을 알아볼까 봐 자리에 앉아 있기가 영 불편해졌다. 연회가 절반쯤 진행됐을 무렵, 진씨 모녀는 더는 이곳에 머무를 수가 없어 서둘러 자리를 떴다.
미시未時(오후 1시~3시) 이각이 되어서야 황제는 연회석을 떠났고, 주운환과 진사들은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환관 몇 명을 따라 화청원 밖으로 나갔다. 이에 엽연채와 다른 여인들은 먼저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엽연채가 동화문東華門에 도착하니 진씨 모녀가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엽연채가 가까이 다가오자 진씨가 이렇게 운을 뗐다.
“방금 전에 궁에서 신양 공주 마마와 아주 좋은 시간을 보냈다. 공주 마마께서 묘서를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더구나!”
엽연채는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그들이 철면피처럼 다가가 인사를 건네니 공주가 예의상 몇 마디 답해 준 것뿐인데, 그걸 가지고 마음에 드네 아니네를 말한다는 말인가?
진씨가 거듭해서 호들갑을 떨었다.
“그래도 네가 신양 공주 마마와 좀 더 친하고, 또 넌 묘서의 새언니이니 시누이 일생의 행복을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네 어머니께 신양 공주부에 가서 혼담을 꺼내 달라고 부탁을 드리거라!”
“저희 어머니는 신양 공주 마마와 일면식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중매인 역할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엽연채가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차라리 매파를 시켜 마마 댁에 방문하라고 하시지요.”
“매파?”
진씨는 냉랭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혼담을 꺼낼 때 여인 쪽에서 사내 집으로 매파를 보내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리하면 이쪽이 굽히는 모양새가 되는 것이다. 사내 쪽에서 여인 집으로 매파를 보내야 훨씬 모양새가 보기 좋았다.
“왜 그러시죠?”
엽연채의 눈빛에 조롱기가 스쳤다. 그럼 지체 높은 그쪽에서 고개를 숙이고 자기 여식에게 구혼을 청하길 바란다는 말인가?
진씨는 화가 나 죽을 지경이었다.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적당한 중매인을 구할 방법이 없으니 울분이 치밀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럼 네가 중매를 서라! 공주 마마를 찾아뵙고 네 큰 시누이의 혼담을 꺼내거라.”
“제가요?”
엽연채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지금까지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그런 일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넌 출가를 하지 않은 어린 소저도 아니지 않느냐? 중매를 서는 게 뭐 어떻다고?”
진씨는 불만 섞인 목소리로 그녀를 채근했다. 아까 신양 공주가 특별히 엽연채를 불렀고 친근하게 그녀를 끌어당기기까지 했으니, 엽연채가 중매인이 되는 건 아주 좋은 방법 같았다.
“그럼 그리 정해진 거다! 조만간 셋째의 축하연이 있으니 네가 신양 공주 마마께 초대장을 보내거라. 공주 마마께서 방문하시면 네가 혼사 이야기를 꺼내는 게지.”
엽연채는 눈알을 굴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굳이 축하연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내일 당장 공주부에 가지요.”
중매를 서라 하니, 하면 그만이었다. 무서울 게 뭐가 있겠는가.
진씨는 생각 외로 엽연채가 시원하게 응하자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 이 일은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됐다. 더욱이 진지항이 탐화가 된 참이니, 반드시 주묘서를 고귀한 자제와 정혼을 시켜야 면이 설 것이었다.
그들은 마차에 올랐고 한나절이 지나서야 마침내 정국백부에 도착했다. 혜연과 추길이 수화문에서 엽연채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녀를 보자마자 서둘러 다가왔다.
“아가씨, 돌아오셨군요!”
“그래.”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서과원으로 향했다.
“궁에서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죠?”
추길이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하늘의 궁전처럼 아름답던가요?”
“그런대로 괜찮더라.”
엽연채가 풉 하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하늘의 궁전처럼 아름다울 게 뭐가 있니. 밖에 사는 백성들은 후부侯府나 백부伯府도 하늘의 궁전처럼 아름답다고 하더라. 사실 별것 없었어. 그냥 좀 더 크고 고급스러운 것뿐이야.”
세 사람은 궁명헌 안으로 들어갔다. 엽연채는 제일 먼저 나한상 위로 몸을 던지더니 신발을 벗어 던지며 앓는 소리를 냈다.
“으, 피곤해 죽겠구나.”
“참, 아가씨. 정안후부에서 서찰을 보내 왔어요.”
혜연이 서찰 한 장을 꺼내며 알렸다.
“어머니가 보내신 게냐? 아님 고모가?”
엽연채는 몸을 돌리며 서찰을 건네받았다.
“아니요. 집안에서 보낸 거예요. 후야께서 보내신 것 같은데 집안에 무슨 일이 있나 봐요!”
“방금 전에 제가 봤는데, 삼월 초여드렛날에 집안에서 가족 회의를 연다고 적혀 있었어요.”
혜연의 말에 엽연채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가족 회의를 연다고?’
엽연채가 서찰을 펼쳐 보니 정말 혜연이 말한 대로였다.
‘무슨 가족 회의를 연다는 거지? 이 시기에 가족 회의를 연다는 건 허서의 일을 공표하겠다는 건가? 하나 허서와 은정랑은 서자가 되는 걸 달가워하지 않을 테고, 엽승덕은 더더욱 그걸 허락할 리가 없는데…….’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걸까요?”
추길도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은정랑과 허서를 엽씨 가문으로 들이려는 거겠지. 엽승덕이 할아버지께 허서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말했거든.”
“그게 무슨……!”
엽연채의 대꾸에 추길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난번에 엽연채가 엽균을 나무랄 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었다니! 추길은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헛웃음을 쳤다.
“하, 제 딴에는 숨긴다고 숨긴 모양인데 어떡해요? 아가씨께서 알아 버리셨잖아요!”
“어쩌면 좋죠?”
혜연은 초조한 마음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직 허대실이 도착하지 않았잖아요!”
“걱정 말거라. 이미 오고 있는 중이다.”
이때, 발걸음 소리가 울리더니 녹엽이 안으로 들어왔다.
“마님께서 공주부로 초대장을 보내셨어요. 내일 아침이 밝자마자 출발해야 하니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래.”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하품을 했다.
* * *
이튿날 아침, 엽연채가 단정하게 차려입은 후 동쪽 측문으로 가 보니 진씨와 주묘서가 이미 그곳에 서 있었다.
진씨가 엽연채에게 당부했다.
“중매하는 자리에 어머니가 있는 건 좋지 않으니 네가 가서 공주 마마의 의중을 잘 살펴보고 오너라. 녹지야, 네가 셋째 아가와 함께 가거라.”
엽연채와 녹지는 함께 마차에 올랐고 주묘서는 그곳에 서서 일이 성사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오늘은 본인의 혼담을 꺼내러 공주부에 가는 것이니 그녀는 그곳에 함께 갈 수 없었다.
마차는 밖을 향해 나갔고, 이각쯤 지나 공주부의 동쪽 측문에 멈춰 섰다. 두 여인은 마차에서 내린 후 시녀의 안내를 받아 공주 처소의 본채로 향했다.
신양 공주는 탑상에 앉아 한 마마媽媽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오는 엽연채와 녹지를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제 봤는데 무슨 일로 아침이 밝자마자 온 것이오?”
“공주 마마를 뵈옵니다.”
엽연채가 얼른 그녀에게 예를 올렸다.
“예의 차릴 것 없네. 어서 앉으시게.”
신양 공주가 상냥하게 미소를 지으며 답례했다.
아죽이 차를 내왔고 그들이 잠시 한담을 나누고 있는데, 녹지가 슬그머니 엽연채의 옷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엽연채의 눈에 조롱기가 스치더니 그녀는 곧장 입을 열었다.
“공주 마마, 듣자 하니 하소군왕께서 올해 열여섯이시라고…….”
“맞네!”
신양 공주가 고운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답했다. 갑자기 자기 아들 나이를 묻는다? 신양 공주는 불현듯 전에 진씨가 엽연채와 함께 저택을 방문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자기 아들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진씨의 눈빛이 이상했었다.
‘그 뻔뻔한 인간이 정말로 내 아들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 일로 엽연채도 난처하게 만들고 있구나!’
엽연채가 말을 이었다.
“저희 큰시누이가 올해 열다섯인데 아직 혼인 전입니다. 혹시…….”
신양 공주는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더니 냉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주 부인, 내 의중을 떠볼 것 없소. 우리는 그런 사람을 원치 않소. 어제 태자비가 그대들을 불러 차를 끓이고 말린 꽃을 만들게 했다고 하지 않았소? 궁에서 나간 후 태자비가 그대 큰시누이의 행실에 대해 이야기해 주며 그자를 쫓아냈다는 이야기까지 해 주었소! 하하, 우리 하씨 가문은 그런 사람은 추호도 원치 않소.”
“아. 그렇군요.”
엽연채가 담담히 말을 받으며 녹지를 쳐다보니 그녀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엽연채는 얼마간 더 앉아 있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진씨는 일상원에서 그들을 기다리느라 목이 빠질 지경이었다. 그녀는 엽연채와 녹지가 돌아오자 얼른 그들을 맞이하며 물었다.
“어떻게 됐느냐?”
엽연채가 녹지를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말해 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