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4화
한편, 정선제는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양왕이 너무 이치를 따져 가며 지나치게 사람을 몰아붙인다는 생각에 불만스러웠다.
그러나 이 아들은 늘 이래 왔다. 조금도 손해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황실의 체면까지 거론하자 정선제는 싸늘한 눈빛으로 정 황후를 쳐다보며 상황을 정리했다.
“이 일은 확실히 황후의 조카딸이 잘못한 것이니 이렇게 정리된 걸로 하시오.”
정 황후의 얼굴이 어둡게 변했으나 황제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그녀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정선제는 상황을 원만히 수습하려고 다시 입을 열었다.
“됐다. 그럼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고 연회를 시작하자꾸나!”
양왕은 콧방귀를 뀌더니 그제야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정 황후는 화가 나 죽을 지경이었다. 물에서 건져지는 조카가 시야에 들어오자 분통이 더더욱 터졌으나 자리에 머물러 있기 부끄러워 정선제를 부축하며 얼른 그곳을 떠났다.
주위에 있던 진사들은 모두 혀를 내두르며 조용히 수군거렸다.
“양왕 전하는 정말 소문대로 까다로운 성격이시네. 무지막지하고 냉혹하신 분이야.”
엽연채는 멀어져 가는 양왕의 뒷모습을 보며 ‘훅’ 하고 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주운환이 걸어오고 있었다.
“양왕비 마마 쪽은 어때요?”
엽연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괜찮으셔요.”
주운환이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하나 엽연채가 여전히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이자 말을 덧붙였다.
“마마를 보러 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양왕 전하는 다른 사람이 자기 사람을 건드리는 꼴은 절대로 못 보는 분이시지요. 그러니 염려하지 말고 갑시다. 곧 연회가 시작될 것 같군요.”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함께 연회장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슬슬 그곳을 떠나는데, 주묘서가 갑자기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두 눈을 번쩍 떴다. 스물셋 정도 되어 보이는 그 청년은 평범한 외모에 하늘색 도포 차림이었는데, 진사 몇 명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그곳을 떠나고 있었다.
주묘서는 그를 보더니 입을 삐죽거리며 몹시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묘서야, 왜 그러느냐?”
진씨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아는 사람을 봤어요.”
주묘서는 작게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그러자 진씨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누구를 이야기하느냐? 네가 이런 곳에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한데 나는 어찌 모른단 말이냐?”
“그 진지항이요.”
“진지항이 누구지?”
“지난번에 작은 새언니의 어머니께서 혼담을 꺼냈던 그 사람이요.”
진씨는 어리둥절했다. 지난번 온씨가 혼담을 꺼냈을 때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않아 그녀는 그 진씨 가문 공자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진씨가 미간을 찌푸리자 주묘서는 손가락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진씨가 그 방향을 쳐다보니 진사로 보이는 사내들이 무리를 이루어 함께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고, 그중 키가 크고 말끔해 보이는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귀공자 티가 나는 그 사내를 보고는 그가 진지항임을 알아차렸다.
“그래 봤자 진사에 불과하다. 아쉬울 게 뭐가 있느냐.”
진씨는 작게 콧방귀를 뀌며 주묘서를 이끌었다.
“가자. 곧 연회가 시작된다.”
진사로 합격했으니 보통내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신양 공주 슬하의 하소군왕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황실의 자제가 훨씬 존귀한 신분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진씨는 못내 마음이 찜찜했다. 어찌 됐든 자기 딸이 거절한 사람이니 당연히 못 나갈수록 좋았다. 그런데 떡하니 진사로 합격을 했으니 불쾌한 기분이 절로 들었다.
화청호의 백옥 단에서 연회가 시작되었다. 꽃문양이 조각된, 다리가 짧은 삼사십 개의 상이 펼쳐져 있고 그 위론 맛있는 요리와 좋은 술이 올라 있었다.
정선제와 정 황후는 상석에, 하좌의 왼편에는 태자비가, 오른편에는 노왕 부부가 자리했다. 상 하나가 비어 있었는데 엽연채는 그 자리가 양왕 부부의 자리임을 눈치챘다. 하지만 양왕비가 물에 빠지는 바람에 그 부부는 아마 연회에 참석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 아래로 유 재상과 육부의 상서 등 중신들, 또 전시에서 일갑, 이갑 안에 든 상위권 합격자들이 자리했다. 또 총애를 받는 황실의 자제들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부부가 함께하는 자리이기에 엽연채도 백옥단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자리가 부족한 관계로 멀리 호숫가에 마련된 연회석에 앉게 되었다.
“연회를 시작하거라!”
상석에 앉은 정선제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자 관현악기로 연주되는 음악이 울려 퍼지며 붉은 빛깔의 얇은 비단 치마를 입은 무희들이 앞으로 줄지어 나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엽연채는 이런 궁중 행사에는 처음 참석해 보았기에 흥미진진한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한 곡이 끝나자 무희들은 퇴장했고 이어 부드러운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때 정선제가 채결을 힐끗 쳐다보자 채결이 앞으로 한 걸음 나오더니 장황한 개막사를 읊었다. 이번 전시에서 합격한 진사들을 칭송하는 내용이었다.
“재능이 흘러넘치는 인재들이여, 분발하여 나라를 위해 충성하거라. 다음의 내용을 잘 듣고 명을 받들거라.”
주운환과 조범수 등 일갑과 이갑 안에 든 진사들은 얼른 몇 걸음 앞으로 나와 정선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장원 급제자 주운환에게는 한림원翰林院(국사 편수·조칙 작성·황제 자문 등의 역할을 담당한 기관) 편찬編纂직을 내리며, 2등인 방안 조범수와 3등인 탐화 진지항에게는 한림원 편수編修직을 내리겠다. 4등인 전여와 이갑 안에 든 진사들에게는 서길사庶吉士(한림원의 관명. 진사 가운데 문학에 뛰어난 사람을 뽑아 임명함)직을 내리며, 나머지 진사들에게는 조고朝考(진사로 급제한 사람들에게 천자가 직접 과제를 내어 다시 치는 시험)의 결과가 나온 후 관직을 내리겠다. 이상!”
“황은이 망극하옵나이다.”
관직에 기용된 여섯 명은 얼른 황제에게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올렸다.
“일어나거라!”
정선제는 미소를 짓더니 주운환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장원은 주씨 가문 자제이던데! 정국백부… 주씨 가문이렷다?”
“예, 폐하.”
주운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오, 주씨 가문 사람은 오랜만에 보는구나.”
정선제는 감회가 새로웠고 또 그리운 마음도 들었다.
“지금 주씨 가문 주인은 주정이더냐?”
“예, 가친이십니다.”
“그자를 본 지도 오래되었구나. 가서 불러오너라.”
정선제의 시선은 여전히 주운환의 수려한 얼굴에 향해 있었다. 이 낯익은 얼굴을 보고 있으니 관심이 더 쏠릴 수밖에 없었다.
정선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어린 환관이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곳에 자리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조정의 중신들이라 정선제가 주 백야를 불러오라고 하자 서로 눈을 맞추더니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황제의 부름을 받는 건 은총을 누리는 영예로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주 백야가 걸어 들어왔다. 정선제가 고개를 들어 보니 주 백야는 회색 무늬 비단으로 만든 도포를 입고 있고 머리카락은 한 올도 빠지지 않게 단정하게 묶었으며 얼굴에는 혈색이 돌고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나이 든 모습까지 감추기는 어려웠고 다리도 좀 절고 있었다. 전쟁에서 패하며 얻은 상처가 한평생 회복되지 않았던 것이다.
“소신, 주정이 황제 폐하를 알현하옵니다.”
주 백야는 얼른 무릎을 꿇고 정선제에게 큰절을 올렸다. 정선제는 주 백야의 모습을 보자 일순간 감개무량해졌다.
그는 자신이 황위를 놓고 다툼을 벌일 때 주씨 가문을 어떻게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는지 아직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당시 주씨 가문은 그야말로 하늘에 떠 있는 태양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랬던 가문이 지금 이 꼴로 몰락해 버릴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정선제의 시선이 또다시 주운환에게 향했다.
“주씨 가문에서 장원 급제자가 배출되다니. 내 이 옥여의玉如意 한 쌍을 그대에게 하사하노라.”
“황송하옵나이다, 폐하.”
황제가 자신을 불러줬을 뿐만 아니라 옥여의까지 하사하자, 주 백야는 너무 기뻐서 눈물을 다 쏟을 지경이었다.
황제의 하사는 그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평범한 백성이 장원 급제를 한 것과는 경우가 아주 다르지 않은가. 자신들은 원래도 공훈이 있는 귀족이었으나 몰락한 상태였다. 그런데 지금 장원 급제자가 나왔고 황제 또한 그 가문의 주인을 보겠다고 친히 불러 옥여의까지 하사했다.
그러니 온 가족이 적어도 명예에 있어서, 도성 사람들 사이에서 지위가 한 단계 상승한 셈이었다. 앞으로 누가 감히 주씨 가문을 몰락한 가문이라고 비웃겠는가. 자신들은 이제 청렴한 귀족일 뿐, 몰락한 귀족이 아니었다.
한편, 진씨는 주묘서 자매를 데리고 호숫가의 낭가廊架(휴식과 풍경 감상 등을 위해 설치된 건축물. 형태는 구름사다리와 흡사함) 아래에 놓인 탁자에 귀부인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그녀가 백옥 단 쪽을 쳐다보니 저 멀리 황제의 부름을 받고 간 주 백야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진씨는 그 모습을 보더니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앞으로 주씨 가문은 더 이상 전과 같은 모습이 아니리라. 다만… 이 모든 것이 주운환 그 서자 놈이 가져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진씨는 또다시 꺼림칙하고 속이 편치 않았다.
“어머니…….”
이때, 주묘서가 울분 섞인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됐다!”
진씨는 딸을 쏘아보며 딱 잘랐다. 그녀는 주묘서도 주운환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려는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
주묘서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진지항이라는 사람 말이에요. 그 사람도 지금 백옥 단에 있어요.”
“뭐라고?”
깜짝 놀란 진씨가 주묘서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정말로 하늘색 옷차림의 한 사내가 백옥 단에 앉아 있었다. 주운환 바로 옆이었다. 그러자 진씨는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저곳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이갑 안에 든 진사인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높은 등수로 합격했겠는가.
주묘서는 아직 하소군왕과 딱히 정해진 관계도 아니었다. 그런데 진지항이 주묘서에게 정식으로 구혼을 했을 때 자신들이 그에게 퇴짜를 놨다. 그러지 않았다면 그 혼사는…….
“됐다. 이제 와서 이야기해 봤자 무슨 소용이냐?”
진씨는 영 좋지 않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갑 안에 들었을 뿐이다. 위에 일갑 안에 든 자들이 딱 버티고 있지 않느냐!”
주묘서는 입술을 꽉 깨물며 그릇에 올려진 반찬을 젓가락으로 쿡쿡 찔러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