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3화
두 사람이 함께 이곳저곳을 거닐다 보니 호수에 설치된 백옥교白玉橋 위에 사람들이 몰려 있는 모습이 보였고, 호수에선 원앙새 두 마리가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조앵기는 호수 위에 떠 있는 원앙새를 가리키며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것 좀 봐요. 원앙새 한 쌍이 싸우고 있어요, 쯧쯧.”
그 말에 엽연채는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그 두 마리는 모두 수놈이었기 때문이다. 조앵기가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뒤에서 그녀를 힘껏 밀쳐 버렸다. 엽연채가 ‘풍덩’ 소리를 들었을 때 조앵기는 이미 물에 빠진 후였다.
“꺅!”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사람이 물에 빠졌다! 양왕비 마마이신 것 같은데!”
엽연채도 깜짝 놀라 소리쳤다.
“왕비 마마! 누구 수영할 줄 아는 사람 있으세요?”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더니 잇달아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엽연채는 더욱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수영을 할 줄 아는 궁녀도 없는 것이냐?”
이렇게 성대한 연회에, 그것도 호숫가에 수영할 수 있는 궁녀조차 배치해 두지 않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우웁! 사람 살려!”
조앵기는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주위에 있던 귀공자들과 소저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궁녀 하나가 황급히 뛰어와 외쳤다.
“지금 찾아보겠습니다!”
궁녀는 그리 외치며 뛰어갔다.
* * *
한편, 양왕은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팔각지붕 정자에서 주운환, 조범수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호숫가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고, 벽옥 술잔을 들고 있던 양왕이 술을 들이켜려는 찰나 궁녀 하나가 황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양왕 전하, 양왕비 마마께서 물에 빠지셨습니다.”
양왕의 잘생긴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그는 술잔을 확 던졌다.
“그 어리석은 여인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게냐!”
그리 말하는 양왕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고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양왕 전하, 노여움을 가라앉히세요.”
그의 뒤를 따라가던 언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염려했다.
양왕 일행이 호숫가에 도착해 보니 물에 빠진 조앵기가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이때 호수 기슭에 서 있던 민무늬 도포를 입은 오십 대로 보이는 한 중년 사내가 큰 소리로 외쳤다.
“걱정 마세요. 제가 구하러……!”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양왕이 굳은 표정으로 그를 냅다 걷어찼다. 사내는 ‘악’ 소리를 내며 20척尺(1척은 약 30cm)가량을 날아갔다.
사람들은 그 사내가 멀리 나가떨어지며 귀를 째는 듯한 비명소리를 내는 걸 보고는 깜짝 놀라 숨을 헉하고 들이켰다.
이어 고개를 돌려 보니 양왕이 어깨에 두르고 있던 소매 없는 두꺼운 외투를 벗어 던지고 ‘풍덩’ 소리를 내며 호수에 뛰어드는 게 아닌가. 그러나 조앵기 쪽에선 이미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고 그녀는 ‘꼬르륵’ 소리를 내더니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엽연채는 절박한 마음에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촤악’ 소리가 나더니 양왕이 조앵기를 품에 안고 물속에서 튀어나왔고, 그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훅 내쉬었다.
양왕은 한 손으로 혼절한 조앵기를 붙잡고 뭍을 향해 헤엄쳤다. 한 마마媽媽가 일찌감치 기다란 대나무 장대를 가지고 와 있었다. 양왕이 그녀가 건넨 장대를 잡자 그녀는 뭍 쪽으로 힘껏 장대를 잡아당겼다.
양왕과 조앵기가 뭍에 도착하자 언서와 언동이 얼른 손을 내밀었고 양왕은 조앵기를 품에 안은 채 뭍으로 기어올랐다.
양왕은 물속에서 발버둥 치다가 옷매무새가 흐트러져 두두兜肚(부녀자의 앞가슴을 가리던 가리개)의 일부분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땅에 던져 놓았던 소매 없는 외투를 잡아채 그녀를 감싼 뒤 그녀를 품에 안고 밖으로 걸어갔다.
삼월 초라 날씨는 그런대로 따뜻했지만 호숫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온몸이 흠뻑 젖은 양왕은 추위 때문에 이내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양왕은 어두운 얼굴로 빠르게 걸어갔다. 이곳을 훤히 꿰고 있는 그가 화청원을 나가 몇 개의 궁전을 지나치니 그가 출궁 전에 지냈던 목수궁沐壽宫이 나왔다. 양왕은 안으로 들어갔고 침실에 도착한 그는 조앵기를 침상 위로 확 내팽개쳤다.
조앵기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온몸이 흠뻑 젖은 채로 원앙새 문양이 들어간 비단 이불 위에 누워 있는 그녀는 추위 때문에 조그만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침상 위의 조앵기를 내려다보는 양왕의 매력적인 얼굴은 서리라도 내린 양 냉랭하고 음침했다.
“양왕 전하…….”
조앵기의 시녀들은 모두 밖에서 무릎을 꿇고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었다.
“방금 전에 누가 같이 있었느냐?”
양왕이 어두운 표정으로 앞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소… 소인이옵니다!”
연한 남색 옷을 입은 시녀가 벌벌 떨며 말했다. 양왕은 다가가 그녀를 냅다 걷어차 버린 후 밖으로 나가 버렸다. 발에 걷어차인 그 시녀는 바닥에 나뒹굴었고 명치 부분에서 얼얼한 통증을 느꼈다.
언서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따라오고 뭐 하느냐!”
시녀는 입가의 핏자국을 닦으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남아 있는 시녀들은 서둘러 조앵기의 옷을 갈아입혔다.
목수궁 밖으로 나온 양왕은 곧장 화청원으로 향했고 소름 끼치게 음산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어리석은 여인이 하루가 멀다 하고 허튼 짓거리를 벌이더니 오늘은 물에 빠졌구나. 이 몸이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느냐!”
“양왕 전하, 우선 옷부터 갈아입으십시오! 이런 날씨에는 고뿔에 걸리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양왕은 언동을 상대하지도 않고 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화청원에 도착해 보니 사람들은 아직도 방금 전 조앵기가 물에 빠졌던 곳에 모여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태자비와 신양 공주, 진씨 모녀도 소식을 듣고 그곳에 와 있었다. 조앵기가 꼴사납게 물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태자비와 노왕비는 조롱 어린 눈빛을 보였다.
“누가 한 짓이냐?”
이때, 오한이 들도록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보니 고운 자주색 망포를 입은 양왕이 보였다. 그는 물에 흠뻑 젖은 채라 긴 머리칼이 등 뒤에 붙어 있었으며, 얼굴에도 물기가 어려 본래도 수려한 그의 얼굴이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다.
“쟁아.”
이때, 나이 든 사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선제가 채결 등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밝은 황색 예복을 입은 귀부인이 함께하고 있었다. 화려함과 귀티가 흐르는 동글반반한 얼굴에서 태자의 생김새가 보였다. 바로 정 황후였다.
“무슨 일이냐?”
정선제는 온몸이 젖은 양왕을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바마마.”
이때, 신양 공주가 앞으로 다가서며 말문을 뗐다.
“어찌 된 일인지 양왕비께서 물에 빠지시는 바람에 양왕 전하께서 양왕비를 물에서 건져냈습니다.”
“뭣이? 물에 빠졌다고? 그래도 뭐 별 탈 없으면 됐다.”
정선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 넷째 며느리를 떠올리고는 절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양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째서 아직도 옷을 안 갈아입은 게냐. 어서 가 보거라. 온몸이 흠뻑 젖었는데 그러다 감기에 걸린다.”
그러나 양왕은 물러나지 않고, 사람들을 쳐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재차 추궁했다.
“누가 벌인 짓이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어리둥절해하더니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되었다. 그는 지금 조앵기가 물에 빠진 일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저와 양왕비 마마는 함께 호수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원앙새를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풍덩’ 소리가 나더니 마마께서 물에 빠지셨습니다.”
엽연채가 있는 그대로 고해바쳤다. 그때 모두들 호수에 떠 있는 원앙새들에 정신이 팔려 조앵기가 어떻게 물에 빠졌는지 보지 못했다.
“발을 헛디뎠나 보구나.”
정선제가 말했다.
“맞습니다! 사소한 일에 불과한데 굳이 쓸데없는 의심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태자비가 냉랭한 목소리로 동조했다.
그러나 양왕은 냉소를 지었고, 이어 그의 차디찬 시선이 목수궁에서 함께 나온 시녀에게 향했다. 그러자 그녀는 몸을 덜덜 떨며 앞으로 나오더니 양왕과 정선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소인은 양왕비 마마의 시녀입니다. 멀리서 양왕비 마마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는데… 보라색 옷을 입은 한 소저께서 양왕비 마마를 밀쳤고 마마는 그대로 물에 빠지셨습니다.”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양왕의 눈이 순간 싸늘하게 변하더니 사람들을 쓱 훑어보았고, 이내 열여섯 정도 되어 보이는 아주 아리따운 아가씨에게 그의 시선이 꽂혔다. 그녀는 보라색 옷을 입고 있었고 이곳에서 보라색 옷을 입은 이는 그녀밖에 없었다.
그 소저는 안색이 확 변하더니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전… 전 아닙니다…….”
한편, 정 황후와 태자비는 소저를 보더니 낯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녀는 영국후부의 일곱째 여식이자 정 황후의 친정 조카였다.
친조카는 아니고 사촌 동생의 적차녀嫡次女이기는 하나 어쨌든 간에 영국후부 사람이었다. 지금 그녀가 사람을 밀어 물에 빠뜨리는 악독하고 추악한 짓을 벌였다고 하니 영국후부의 체면이 뭐가 되겠는가.
“양왕, 어찌 시녀 하나의 말만 믿고 이렇게 멋대로…….”
정 황후가 한마디를 채 다 잇기도 전에 양왕이 갑자기 그 소저 앞으로 걸어가더니 발을 뻗어 그녀를 걷어찼다. ‘풍덩’ 하는 큰 소리와 함께 그녀는 물속에 빠져 버렸다.
“꺄악! 사람 살려!”
정 소저는 물속에서 허우적대며 발버둥을 쳤다.
“양왕, 이게 뭐 하는 짓이오? 어서, 어서 저 아이를 꺼내거라!”
정 황후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궁녀들은 허둥거리더니 개중 한 명이 이내 그녀를 구출하러 물속에 뛰어들었다.
“양왕, 이게 뭐 하는 짓이오?”
정 황후는 화가 나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오해이든 아니든, 실수이든 고의이든 간에 저자가 내 사람을 물에 빠뜨렸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훈계를 받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지요!”
양왕의 냉소에 정 황후는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저 오해에 불과하오. 더군다나 어찌 됐든 간에 내 외가 쪽 식구인데 양왕이 저 아이를 걷어차 물속에 빠뜨리면 영국후부의 체면이 뭐가 되겠소?”
“황후 마마의 집안 아이가 물에 빠져 체면이 깎였다고 하셨는데, 그럼 어엿한 왕비인 양왕비가 물에 빠졌으니 우리 황실의 체면은 뭐가 되겠습니까?”
양왕은 픽 하고 비웃었고 그의 말에 정 황후는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