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1화
“그분은 일찌감치 장가를 가셨단다!”
웃음을 멈춘 기설유가 이렇게 말하자 쌍환계 머리 소녀는 조그만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더니 언짢은 목소리를 냈다.
“어떻게 해 보겠다고 말한 적 없거든요. 그분이 양왕 전하께 필적할 만한 외모를 가졌다고 하기에 그냥 좀 보고 싶은 것뿐이에요.”
“아.”
기설유가 다시 살포시 미소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그분의 아내도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아름답다고 하더라. 작년 초에 자매끼리 혼사를 가로챈 일이 있었잖아. 너희들도 들어 봤지? 그게 그분 아내의 이야기야.
서자에게 시집가서 안됐다고들 했는데, 이렇게 과거 시험에 떡하니 합격할 줄 어디 상상이나 했겠어? 두 사람은 처음부터 운명으로 정해져 있던 거지.”
정자에 모여 있던 소녀들은 그녀가 뒤에 한 말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아름답다.’라는 말만 듣고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일제히 기둥에 기대어 앉아 있는 한 소녀를 쳐다봤다.
열다섯 정도 되어 보이는 이 소녀는 흰색 꽃무늬가 촘촘히 수놓아진 연보랏빛 비단 적삼과 진한 녹색 마면군馬面裙을 입고 있었다. 영사계靈蛇髻(위진남북조 시대부터 여인들이 했던 머리모양) 머리를 한 그녀는 난초 모양의 녹옥석 보요를 꽂은 채였는데, 꽃보다 아름다운 작은 얼굴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정말이지 보기 드문 절세미인이었다.
“상관운 소저의 미모가 도성 제일이라는 걸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소저 미모에 견줄 만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키가 크고 늘씬한 한 소녀가 그리 말하며 상관운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상관운은 작게 콧소리만 냈다. 그렇다고 인정한 셈이었다.
유곡요는 상관운과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아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말이 있죠. 제가 그 주씨 가분 셋째 부인을 직접 뵀거든요. 지난번 양왕 전하 생신 축하연에서 그분이 바둑으로 절 이겼는데, 제 생각에는 그분은 바둑 실력도 좋지만 외모는 그보다 더 뛰어나요.”
주변의 소녀들은 그 말을 듣고 모두 깜짝 놀랐다.
“유 소저를 이겼다고요?”
“네, 전 진심으로 승복했어요.”
자신이 바둑 대결에서 졌다는 이야기에 관심이 쏠리자 유곡요는 살짝 난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따가 그분이 오면 상관 소저도 진심으로 탄복하게 될 거예요.”
그녀는 그리 말하며 상관운을 쳐다봤다. 그러자 상관운은 눈썹을 추켜세우고 붉은 입술을 쓱 올리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소녀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호숫가에 심어진 조그만 화초밭 곁에 서 있던 진사들 몇몇이 일제히 한쪽을 바라보았다.
“오, 장원 급제자가 왔구나. 어서 가서 가르침을 청해 보자.”
그들은 그리 말하며 입구 쪽으로 향했고, 정자 안의 소녀들은 모두 이름표를 나누던 손을 멈추고 그쪽을 쳐다봤다. 여러 명의 진사가 몇 사람을 둘러싸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열여덟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 꼿꼿한 자세로 서서 그 진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수수한 연청색 도포를 입었는데, 그 빛깔이 날카로운 눈썹과 살짝 위로 솟은 눈꼬리와 조화를 이뤄 서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는 귀티와 화려함을 풍기며 맵시 있는 풍채를 뽐내고 있었고, 그뿐 아니라 짙은 향기를 가진 난초처럼 고결한 분위기도 가지고 있었다.
소녀들은 그를 보더니 모두 대단히 놀라워했고, 쌍환계 머리를 한 소녀는 국화 문양이 들어간 둥글부채로 얼굴을 살짝 가리며 말했다.
“과연……. 흠… 서자이긴 하지만 저런 인품과 용모에 재능마저 뛰어나니 저분에게 어울리는 짝이 어디 있겠습니까?”
“있단다.”
유곡요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가 소년 장원 급제자 쪽을 살펴보니 그 옆으로 수홍색 치마폭이 살짝 드러나 있었다.
“여매야, 가서 주 부인을 모셔오너라.”
유곡요의 여종인 여매는 알겠다고 대답하고선 서둘러 그쪽으로 걸어갔다. 기설유와 다른 소녀들이 보니 여매는 빠르게 걸음해 소년 장원 급제자에게 예를 올렸고,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건네자 그 장원 급제자 옆으로 한 소녀가 걸어 나왔다.
여매를 따라 걸어오는 여인은 해당화 무늬가 촘촘히 짜인 짙은 분홍색 월화군月華裙을 입었는데, 매우 아름답고 멋스러운 자태였다. 천천히 걸어오는 소녀는 옷차림이 간소해 오히려 그녀 자신이 더욱 화려하고 고와 보였다.
연꽃처럼 아리따운 조그만 얼굴은 시선을 압도할 만큼 매력적이었고, 반짝거리는 눈동자는 누구라도 설렐 만큼 아름다웠다. 환한 빛이 흐르는 얼굴은 장미처럼 요염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녀가 걸어오는 모습을 본 정자 안의 아가씨들은 모두 숨을 헉 하고 들이켰다. 이어 다들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이렇게 생각했다.
‘상관운이 밀리게 생겼네.’
이때, 상관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새침데기라는 걸 알고 있는 소녀들은 그녀가 일어서는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설마 도발하려는 건 아니겠지?
한편, 엽연채는 정자 안의 얼굴들을 보더니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유곡요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엽연채가 앞으로 다가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려는 찰나, 녹색 옷을 입은 상관운이 걸어오더니 갑자기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엽연채는 어리둥절해하며 입을 열었다.
“그쪽은…….”
“절 잊은 거예요?”
상관운이 하하 웃으며 예전 일을 언급했다.
“지난번에 성 밖에서… 저와 함께 도망쳤잖아요.”
엽연채는 화들짝 놀라며 그녀가 누구인지 떠올렸다. 이 소녀는 지난번에 인신매매범에게 붙잡혀 갔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눈앞의 소녀를 기억해 낸 엽연채는 이어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함께 도망치다가 넘어지면서 나를 잡아당겼고, 그 바람에 함께 나뒹굴면서 나는 발목이 삐었지. 그리고 이 소저는 나중에 혼자 양왕에게 구출되었고.’
“아… 그 소저였군요!”
엽연채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땐 확실히 그녀를 원망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녀도 넘어지면서 급한 나머지 손을 뻗어 잡아당겼던 것이다. 누구나 당황하면 그럴 수 있으니 탓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제 이름은 상관운이에요. 저희 아버지는 상관 자 수 자이시고요.”
상관운이 자신을 정식으로 소개했다. 이 말에 엽연채는 또 한 번 당황했다. 당시 인신매매범에게 붙잡혀 정신이 몽롱할 때도 들었던 말이다. 상관운은 죽기 살기로 이렇게 외쳤었다.
“내 아버지는 금위군 대장이신 상관수 대인이다! 그런데 감히 날 납치하다니!”
“상관 소저, 주 부인과 아는 사이인가 보네요?”
기설유는 어리둥절해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소저들도 모두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유곡요도 이상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엽연채는 분명 자신이 여종을 보내 불러온 사람이니 먼저 자신과 인사하는 게 맞았다. 그리고 그리한 데는 상관운을 눌러 주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상관운과 구면이라는 말인가?
“네!”
상관운은 미소와 함께 답한 후 엽연채를 쳐다보며 재차 반가워했다.
“우리가 이렇게 인연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오늘 또 보게 되다니.”
“그러게나 말이에요!”
엽연채는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 양왕 전하께서 저를 구출해 주신 후에 소저는 어떻게 됐어요? 부윤 대인의 사람들과 함께 갔나요?”
상관운은 목소리를 확 낮추었다. 인신매매범에게 납치를 당했던 일이 알려지면 평판에 흠집이 날 테니 입 밖으로 함부로 꺼내서는 안 되었다.
엽연채는 입꼬리를 올렸다. 양왕이 저쪽을 구출한 후 이쪽은 버리고 떠났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너무 창피하지 않은가. 엽연채는 하하 웃으며 적당히 둘러댔다.
“네. 부윤 대인과 함께 갔어요.”
“아, 그랬군요.”
상관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어깨 위로 늘어진 긴 머리칼을 빙글빙글 돌렸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시녀 한 명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주 부인, 저희 공주 마마께서 부르십니다.”
엽연채가 고개를 돌려 보니 신양 공주를 곁에서 모시는 시녀 아죽이었다. 그녀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알겠다.”
엽연채는 상관운과 유곡요 등에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여러분, 전 공주 마마께서 부르셔서 먼저 가 볼게요.”
“네.”
상관운의 대답을 뒤로하고 엽연채는 아죽과 함께 화청원을 걸어갔다. 가면서 보니 연회에 참석한 손님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어 함께 모여 있었고, 진사와 젊은 관원들은 정자에서 시를 읊고 있었다.
명문가의 규수들과 귀공자들은 호숫가에 모여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고 중신들은 물가에 지은 정자에서 정사를 논하고 있었다. 걸어가는 내내 온화한 풍경이 펼쳐졌다.
화원의 초목은 다듬어져 가지런했고, 정자와 누각들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길게 이어지는 낭하 사이로 빽빽이 맞닿아 있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정자들이 보였다.
엽연채와 아죽은 낭하에 올라 구불구불 이어져 있는 길을 걸어갔고, 마침내 채색화가 그려진 문루門樓에 자리한 사각지붕 정자에 도착했다.
정자 안에는 화려한 치장을 한 귀부인과 규수들이 앉아 있었고 그중 몇 명은 엽연채도 아는 사람들이었다. 한 명은 신양 공주이고 또 다른 한 명은 태자비였다. 다른 여인들은 그들 곁에 앉아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당황스럽게도 진씨도 주묘서 자매를 데리고 그곳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엽연채 눈에 제일 띄는 사람은 바로 분홍색 옷을 입은 한 소녀였다. 그녀는 주황색 등받이가 달린 긴 걸상에 앉아 주황색 기둥에 기대어 있었다.
그 소녀는 치마가 가슴 부분까지 올라오는 복숭아꽃이 수놓인 분홍색 유군을 입고 있었고, 가슴 앞부분에는 덩굴무늬가 들어간 짙은 보라색 명주 끈을 묶어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차림새였다. 소녀는 희고 보드라운 조그마한 얼굴을 숙인 채 외롭게 정자 구석에 앉아 과일을 베어 물고 있었다.
소녀는 엽연채를 보더니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고 이내 그녀의 얼굴에는 기쁨과 놀라움이 섞인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촉촉이 젖은 커다란 눈망울로 그녀를 쳐다봤다.
‘조앵기도 와 있었구나.’
그러나 엽연채가 조앵기에게 알은체를 하기도 전, 정확히는 정자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신양 공주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녀는 엽연채를 안쪽으로 인도하더니 미소를 지으며 주변에 인사시켰다.
“보세요. 이쪽이 바로 장원 급제자의 부인이랍니다. 나와도 인연이 있죠. 이 외모면 상관 가문의 소저도 밀리지 않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