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0화
“아이고. 아이 낳은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러는 게냐. 울지 말거라. 그러다 몸 상한다.”
손씨는 얼른 그녀를 타일렀다.
“박원이도 마음이 너무 상해서 그런 거다. 너도… 그것들이 득세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언짢아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박원이는 더 말할 것도 없지!”
그리 말하는 손씨는 마음속에서 노여움이 북받쳤다. 그런데 멍한 눈빛을 한 엽이채가 갑자기 이렇게 물었다.
“방금 전에 할머니와 숙모가 오셨으니… 잠시 후에 그 계집애가 절 비웃으러 오지 않을까요?”
엽이채가 출산을 하자 장씨 가문에선 친척과 친지에게 사람을 보내 이 소식을 알렸다. 가까운 사이거나 짬이 난 사람들은 엽이채를 보러 직접 왔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하인을 보내 인사를 전했다.
손씨는 엽연채가 와서 우쭐거릴 모습이 떠오르자 안색이 확 변했고 속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좀 있으면 분명 저희를 찾아와서 온갖 자랑을 늘어놓을 거예요!”
엽이채는 생각할수록 견딜 수가 없었다. 저 멀리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몸 상태가 이러니 누워 있는 것 말고는 다른 수가 없었다.
“큰마님, 혜연이 왔습니다.”
이때, 밖에서 류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어 혜연이 물건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둘째 아가씨, 아가씨가 출산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저희 아가씨께서 저를 보내 안부 인사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엽이채는 엽연채가 자신을 비웃으러 오지 않았다는 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혜연 또한 타인에게 관용을 베푸는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그녀는 크게 시름을 덜 수 있었다.
혜연은 인사를 몇 마디 건넨 후 바로 자리를 떴다. 엽이채는 그녀가 나간 쪽을 쳐다보더니 생각할수록 불쾌한 기분이 들어 화가 난 목소리로 씩씩거렸다.
“하하, 그 서자 남편이 과거 시험에 붙으니 저희를 업신여기는 거예요! 오늘 할머니와 숙모도 직접 저를 보러 오셨는데 그 계집애만 안 왔잖아요.
과거 시험에 붙었다 하더라도 그저 가난한 관리에 불과합니다! 이제 겨우 득세를 하게 되니 못난 놈이 분별없이 설치며 날뛰는 거죠! 저희 시할아버님이 3품 고관인 대리시경이신 건 생각도 안 하나 봐요! 제 주제에 잘난 척은 무슨!”
“내 말이 그 말이다.”
손씨는 그들을 한껏 질투하고 미워했다. 전에 잘나갔던 건 자신들이었는데 이젠 달랐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울화가 치밀어 올라 그녀는 엽연채가 예의도 모르고 경솔하다며 그녀를 실컷 욕했다.
* * *
주운환이 장원 급제를 한 뒤, 주 백야는 손에서 힘이 다 빠질 정도로 많은 축하 서찰과 선물을 받았다.
전에는 집안에서 큰 행사나 혼례식을 치를 때 초대장을 보내도 사람들이 열성적으로 참석해 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하인만 보내 응대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친척들이 알아서 정국백부를 방문해 축하 인사를 전하며 선물을 건넸다.
이튿날 아침, 주씨 가문 사람들은 황제가 베푸는 궁중 연회에 참석할 준비로 바빴다. 엽연채는 아침이 밝자마자 화장대 앞에 앉아 머리를 빗었고, 추길은 옷장에서 옷을 고르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던 추길이 갑자기 불평 섞인 어조로 말했다.
“시험에 합격하실 줄 알았으면 화려한 봄옷을 두 벌 더 만들 걸 그랬어요. 보세요. 지금 집는 것마다 다 이 모양이에요.”
“아무거나 한 벌 고르면 돼.”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다독였으나 추길은 바로 반박했다.
“어떻게 아무거나 고를 수 있겠어요? 처음으로 궁에서 베푸는 연회에 참석하시는 거잖아요. 게다가 귀한 집 여식들은 모두 연회에 참석한다고 들었어요. 다들 화려하게 치장하고 올 거예요. 그리고 도성 제일의 미녀와 제이의 미녀 같은 것도 있다던데 저흰 보지도 못했잖아요.”
추길은 자기가 모시는 아가씨의 용모에 대해 늘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도성은 아주 넓고 그들이 왕래했던 귀한 여식들은 몇 명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오늘은 주운환에게 아주 중요한 날이었다.
‘아가씨는 장원 급제자의 부인이신데, 다른 아가씨들이 더 화려한 치장을 하고 오면 아가씨가 밀리실 수 있잖아.’
추길은 이각 동안 고심한 후에야 마침내 엽연채에게 입힐 옷을 결정할 수 있었다. 몸치장을 마친 후 추길은 주운환을 불렀고 부부는 함께 동쪽 측문으로 향했다. 진씨와 주묘서, 주묘화는 진작부터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묘서는 엽연채를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리며 타박했다.
“작은 새언니. 왜 이렇게 늦게 와요!”
그 곁에 선 진씨의 엄숙한 표정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이 서자 놈이 과거 시험에 합격했으니 엽연채가 자신이 한 수 더 위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지, 적모인 자신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건 아닐지 전전긍긍했다.
“진시辰時(오전 7시~9시)의 절반이 흐르면 출발할 것이니 아직 일각이 남았다.”
주운환이 주묘서에게 이리 대꾸하자 진씨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전에는 열 마디를 해도 이 서자 놈은 찍소리도 못 했는데, 이젠 한 마디 했을 뿐인데도 바로 반박을 했다.
“아유, 다들 와 있었구나.”
이때, 주 백야가 미소를 지으며 수화문을 넘어 그들 쪽으로 걸어왔다. 그는 소매가 넓고 둥근 옷깃이 달린 검은색 금포를 입고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전에 늘 함께했던 의기소침함과 우울함은 온데간데없고 희색이 만면했다.
주 백야는 머릿수가 적은 데 의아해했다.
“그런데 어째 큰애 부부는 보이지 않는 게냐? 둘째도……. 에헴, 왜 큰애 부부는 안 보이는 게냐?”
주운환이 시험에 합격한 후로 주종과는 기가 팍 꺾여 있었다. 그러니 어디 함께 황제가 베푸는 연회에 참석하려고 하겠는가.
“큰애는 원래부터 밖에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는 성격입니다. 그리고 큰아가는 학해가 병이 나는 바람에 마음이 불안해 집에서 아이를 돌보겠다고 했습니다.”
이리 말하는 진씨는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자신이라고 서자를 위한 축하연에 어디 참석하고 싶겠는가.
하지만 딸이 점점 나이를 먹고 있었다. 이번 연회에 신양 공주도 분명 참석할 테니 딸과 그 군왕郡王이 혼약을 맺도록 할 것이다. 혼약을 맺고 나면 신양 공주의 권세를 이용해 큰아들에게 좋은 관직을 내려 줄 수 있으니 이 빌어먹을 종자에게 밀리지 않을 것이었다.
“그럼 가자꾸나!”
주 백야는 허허 웃으며 앞장섰다.
주 백야, 진씨, 주묘서는 크고 화려한 마차에 올랐고 엽연채와 주묘화는 푸른 덮개가 달린 조그만 마차에 탔으며 주운환은 말에 올라탔다.
* * *
화청원華淸園은 황궁에서 풍경이 가장 수려하고 그윽한 화원이었다. 곳곳에 기이한 화초가 자라고 물가에 지은 정자와 누각이 가득했다.
커다란 화청호華清湖에는 꼭대기가 뾰족한 팔각지붕이 달린 정자가 세워져 있었다. 유리 유약을 발라서 구운 오지기와는 아름다운 봄 햇살을 받아 휘황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으며, 붉은 수화주垂花柱는 번성과 화려함, 존귀함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물가에 지어진 두 정자는 용과 봉황새가 조각된 백옥 다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중간에는 역시 백옥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단壇이 있어 연회를 베푸는 장소로 쓰였다.
푸른 호숫물은 정자를 감돌고 있고 원앙새와 물오리는 부평초를 쫓아가고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백옥 단에는 꽃문양이 조각된, 다리가 짧은 삼사십 개의 상이 펼쳐져 있었다. 잠시 후 이곳에서 황제가 사람들에게 술을 권할 것이었다.
그런데 백옥 단에 놓인 작은 상들로는 오늘 이곳에 참석할 손님들이 모두 자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황제와 상위 십 등 안에 든 진사, 조정의 중신들만 그곳에 자리하고, 나머지 관원들과 귀한 가문의 자녀들을 위한 연회는 화청호 기슭에 마련되었다.
사시巳時(오전 9시~11시)가 다 되어 가자 각 가문의 연회 참석자들은 대부분 도착한 후였다. 화청호 기슭에 위치한, 양옆으로만 벽이 있고 앞뒤로는 벽이 없는 커다란 건물에는 이번 과거 시험에 합격한 진사들이 시를 읊으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석가산 뒤편에는 열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 두 명이 몰래 건물 쪽을 훔쳐보고 있었다.
노란 옷을 입은 아리따운 소녀가 물었다.
“저 중 누구야?”
“기둥 옆에 앉아 바둑을 두고 있는 사람.”
흰 바탕에 매화 문양이 들어간 옷을 차려입은 또 다른 소녀가 대답했다.
“바둑 두는 사람? 딱 네 취향인데!”
노란 옷의 소녀가 가벼운 웃음을 띠며 이리 대꾸하더니 그쪽을 유심히 쳐다봤다.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영민하고 시원스럽게 생긴 그 청년은 하얀빛을 띤 노란빛의 낙낙한 도포를 입고 있는데, 색이 잘 받아 얼굴에 윤기가 돌아 보이며 부드럽고 우아해 보였다.
“저 사람이 전시에서 4등을 한 전려傳臚(전시에서 이갑과 삼갑 중 일등을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칭호)야. 듣기론 장원 급제한 사람 다음으로 제일 잘생긴 사람이래.”
노란 옷의 소녀가 웃으며 이리 덧붙이자 흰옷 차림의 소녀는 얼굴을 붉히며 ‘픽’ 웃었다.
“단지 잘생겨서 고른 건 아니거든. 재능이 넘치는 사람이잖아.”
“재능이 넘치는 건 바로 너 아냐? 최고의 재녀잖아.”
노란 옷의 소녀는 깔깔거리며 그녀를 놀리고는 말을 이어갔다.
“어쨌든 외조부님께서 너를 곤경에 빠뜨릴 리 없잖아. 이미 정해진 거지?”
“외할아버지께서 이미 정해졌다고 말씀하셨어.”
흰옷 소녀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대답했다.
“그럼 올해 혼인 축하주를 마실 수 있겠구나.”
“설유 언니, 곡요 언니. 연회석 탁자 위에 이름표를 놓을 건데 언니들은 안 올 거예요?”
가까운 곳에 위치한 투구 모양의 지붕이 달린 정자에는 여러 소녀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갑자기 두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두 소녀는 얼른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
흰옷 소녀는 바로 유곡요였고, 노란 옷 소녀는 그녀의 사촌 여동생인 기설유였다. 두 사람은 정자 안으로 들어가 붉은색 등받이가 달린 노란색 나무 걸상에 앉았고 네다섯 명의 소녀와 이름표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중 전지纏枝 문양이 들어간 하늘색 배자를 입고 쌍환계雙環髻 머리를 한 열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녀가 말했다.
“장원 급제를 한 분은 아직 안 오신 거예요?”
“네가 그분을 기다려서 뭐 하려고?”
기설유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되묻자 쌍환계 머리를 한 소녀가 솔직히 대꾸했다.
“듣자 하니 그분이 되게 잘생기셨다고 하더라고요.”
정자에 있던 소녀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