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9화
엽승덕이 송화 골목으로 돌아와 보니 이미 유시酉時(오후 5시~7시)의 절반이 지난 후였다. 영존거의 대청에는 밥상이 차려져 있었고, 은정랑은 응접실에 앉아 구럭을 뜨고 있었다. 희미한 등불 아래, 그녀의 조그맣고 갸름한 얼굴에선 부드럽고 아름다운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엽승덕은 그쪽으로 걸어가 은정랑을 번쩍 안아 들었다.
“꺅! 뭐 하시는 거예요?”
은정랑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하하.”
엽승덕은 그녀를 안고 한 바퀴를 돌고 나서야 그녀를 내려주었다. 그러고는 그녀를 품에 안은 채 탑상 위에 기대어 앉았다.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인데 이렇게 반편이처럼 웃으시는 거예요?”
은정랑이 농담 섞인 말을 건넸다.
“내가 방금 전에 아버지와 이야기를 잘 마쳤소. 삼월 초여드렛날에 일가를 불러 가족 회의를 열 것이고, 그때 허서의 신분을 공개할 것이오. 그런 뒤 삼월 스무닷새에 정식으로 허서를 입적할 것이오.”
그는 그리 말하며 모든 세부 사항을 하나하나 그녀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자 은정랑은 감동과 놀람을 담아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승덕 나리. 정말로 저를 정실부인으로, 서를 적자로 만드실 생각이시군요……. 그런데 그럼 균이 공자는요? 균이 공자는 나리의 친아들이잖아요. 그리되면… 균이 공자는 분명 상심할 거예요.”
그러자 엽승덕은 애정이 듬뿍 담긴 얼굴로 말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그럴 만한 가치가 있소.”
“나리…….”
은정랑은 눈시울을 붉히며 그를 쳐다봤다.
“당신이 서를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고 있소. 내 어찌 당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설움을 겪도록 놔두겠소?”
“네, 저는 서를 아끼고 그 아이는 나리와 마찬가지로 저에겐 목숨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균이 공자는… 균이 공자도 아끼지만…….”
“당신 마음이 어떤지 다 알고 있소.”
엽승덕은 눈물을 쏟는 은정랑의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서는 당신 배 속에서 열 달 만에 나왔으니 당연히 그 아이에게 가장 좋은 걸 주고 싶겠지.”
“서를 엽씨 가문 핏줄로 입적하면, 엽씨 가문의 적자로 삼으면… 제 아들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나리의 아드님은 큰 손해를 보게 됩니다…….”
은정랑은 그리 말하며 닭똥 같은 눈물을 떨구었다.
“그리되는데도… 전 이 일에 동의를 했으니 전 정말이지… 너무 이기적인 여인입니다!”
“맞소. 당신은 이기적인 여인이오!”
그러나 엽승덕은 말과는 달리 은정랑의 눈물에 마음 아파하며 그녀를 꼭 안아 주었다.
“그러나 당신은 위대한 어머니이기도 하오! 세상에 자기 아들을 위해 필사적이지 않은 어머니가 어디 있겠소? 그러니 당신은 이기적이지만 동시에 위대하오. 당신은 그저 평범한 여인이자 평범한 어머니인 것이오. 그리고 난 그런 당신을 사랑하오! 사랑이 넘치고 감정에 충실한 당신 말이오.”
은정랑은 잔꾀를 쓸 수도, 이기적으로 굴 수도, 남을 모해할 수도 있다. 또 투기도 부리고 교활한 술수도 쓸 수도 있다. 곤경에 빠진 온씨를 보며 통쾌함을 느끼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그의 눈에는 귀여워 보이기만 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난 기꺼이 모든 것을 희생할 것이오.”
엽승덕이 진심을 전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이용해 그녀를 아낄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어 그는 스스로에게 감동했다.
자신은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할 것이며, 혈육 간의 정 따윈 얼마든지 버릴 것이다. 이 세상에 자신과 같은 사람은 또 없을 것이다. 사랑을 위해 자신의 생명과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람 말이다.
‘다른 이들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이 사랑은 순결하고 또 위대한 것이다.’
엽승덕은 자신이 세상에 둘도 없는 위대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세 사람들이 가장 위대한 사랑을 언급할 때 어쩌면 그들의 사랑을 언급할지도 모른다. 견우와 직녀의 사랑처럼 천고千古에 전해질지도 몰랐다.
“정랑, 내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쳤소. 내가 최고지 않소?”
엽승덕은 그녀를 품에 안고 어깨 앞 우묵한 곳에 얼굴을 묻으며 그녀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다. 은정랑은 미소를 지으며 바로 동조했다.
“당연히 나리가 최고죠.”
이 사내는 일편단심 저만을 사랑해 주었다. 이에 은정랑은 의기양양해했다. 세상 어떤 여인이 이렇게 해낼 수 있겠는가?
엽승덕은 자신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하려고 했다. 친자식마저도 해쳐 가며 자신의 아들을 적자 자리에 앉히려고 하고 자신을 더욱 귀하게 대우해 주려 했다.
‘이런 사내에게 시집가지 않을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은정랑의 대답을 얻은 엽승덕은 싱글벙글했다. 그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자신이 그녀에게 진심을 전했으니 그녀도 자신에게 진심을 되돌려 주기만 하면 됐다.
* * *
한편, 밖에서 거리 행진을 한 주운환은 한나절을 걷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장원 급제자가 입는 진홍색 도포를 입은 그는 황금 꽃무늬가 들어간 오사모를 벗어 손에 들고 있었다.
주 백야는 일부러 대문을 활짝 열고 발판을 놓아두었다. 그는 주운환에게 그걸 밟고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주운환은 입꼬리를 씰룩거렸지만 꾹 참고 얌전히 따랐다.
그런 후, 주 백야는 함께 일상원으로 가서 잠시 앉아 있자고 말했지만, 주운환은 피곤하다며 거절했다. 돌아가서 쉬겠다고 하니 주 백야는 하는 수 없이 그를 놓아주었다.
주운환은 서과원으로 걸어가는 동안 꽤 많은 여종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이곳은 전에는 인적이 드물어 황량하기만 했다. 귀신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던 곳인데, 오늘은 걷는 내내 어여쁜 여종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주운환에게 예를 올렸다.
뒤에서 주운환을 쫓아오던 여양과 여한은 그 모습에 비웃음을 지었다. 서과원은 전에는 재수 옴 붙은 곳이라고 불렸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모여들고 있었다. 인간이란 참 현실적인 동물이었다.
주운환이 난죽거로 돌아오니 엽연채가 까치발을 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치맛자락에 옅은 금색 해당화 문양이 들어간 수홍색 월화군月華裙(치마의 주름 부분에 오색 빛깔이 들어간 치마) 차림으로, 손에는 조그마한 등롱을 들고 있었다. 문 앞에 걸려고 하는 것 같았다.
주운환은 그 모습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뭐 하고 있습니까?”
“이건 장원등壯元燈이에요.”
엽연채가 돌아서며 대답했다.
“장원 급제를 했는데 집이 썰렁하면 안 되죠.”
“그렇지요.”
주운환은 그녀의 팔이 위에 닿지 않는 걸 보고는 자신이 대신 등롱을 들어 문 양쪽에 걸었다. 등롱이 잘 걸리자 엽연채가 말머리를 돌렸다.
“오늘이 삼월 초이틀인데 강왕 전하와 허대실은 언제 돌아올까요?”
“곧 올 겁니다. 들어 보니 칭주에 도착했다고 하더군요. 삼월 중순 전에는 도착할 겁니다.”
주운환의 대답에 엽연채는 풀 죽은 모습을 보였다. 주운환은 실망한 듯한 그녀의 눈빛을 보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이왕 오래 기다린 거 하루 이틀쯤 더 기다리는 게 대수겠습니까. 그리고 요 며칠 동안은 바쁠 겁니다. 내일은 황제 폐하께서 합격자들에게 베푸는 연회가 있을 거고, 그 연회가 끝나면 집안에서 축하연을 베풀 테니까요.”
“황제 폐하께서 베푸는 연회에 가족들도 참석하나요?”
엽연채는 황궁에서 열리는 연회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친정에서 그런 연회에 참석한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주운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평범한 궁중 연회와 다를 것 없습니다. 단지 진사들이 많이 참석하는 것뿐이지요.”
그리 말하고 있는데 갑자기 주 백야가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운환아, 가자. 가서 조상님께 절을 올리자꾸나.”
그 말에 주운환은 입꼬리를 씰룩거렸으나 끝내 주 백야에게 끌려갔다.
엽연채가 궁명헌으로 돌아와 잠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추길이 서찰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장씨 가문에서 서찰을 보냈습니다. 이채 아가씨가 아이를 낳았다고 합니다.”
엽연채는 그제야 그쪽 일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엽이채가 해산할 즈음이었다.
“아들이냐 딸이냐?”
“아들입니다.”
추길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답했다.
엽연채는 엽이채가 아들을 낳으리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는 전생에서도 한 번에 사내아이를 낳았다. 일 년이나 시일이 당겨졌긴 해도 이번 생에서도 역시나 단번에 사내아이를 품에 안았다.
“선물을 준비해 보내거라!”
엽연채는 전생에서 아이를 낳지 못했기에 출산 선물로 무엇을 보내야 할지 잘 몰라 적당히 말했다.
“아가씨, 직접 보러 가지 않으세요?”
혜연이 묻자 엽연채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내가 걜 눈곱만큼도 보고 싶지 않다는 건 둘째 치고, 그저 예의상 보러 가도 걘 분명 내가 자랑하러 왔다고 생각하겠지. 가 봤자 원망이나 듣지 않겠어? 그러니 네가 선물을 들고 가서 전달하면 된다.”
그리고 꼭 출산 직후에 가서 봐야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세삼洗三(아이가 태어난 지 3일째가 되는 날, 아이를 씻기며 그 아이의 명이 길기를 축하하는 자리를 가짐)과 만월滿月(아이가 태어난 지 한 달이 되면 돌잔치처럼 축하하는 자리를 가짐)에 가 보면 되었다.
혜연은 나가서 흑설탕과 달걀, 쌀 한 말 그리고 배내옷 몇 벌을 준비한 후, 몸보신 식품을 함께 챙겨 곧장 장씨 가문으로 향했다.
* * *
그 시각 장씨 가문.
장씨 가문에선 증손자가 태어났다는 기쁨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참으로 이상한 분위기였다.
엽이채는 새 문양이 들어간 새하얀 면 소재의 넓은 말액을 머리에 두른 채 침상에 누워 있었고, 손씨는 그녀 곁에 앉아 품의 아이를 어르고 있었다.
주운환이 춘시에 장원 급제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손씨는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돌아가면 엽연채와 온씨가 떵떵거리는 모습을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때마침 딸이 아이를 낳자 그녀는 몸조리를 도와준다는 핑계를 대고 계속 장씨 가문에 머물고 있었다.
한편, 엽이채는 창백한 얼굴을 한 채 초점 없는 눈빛으로 평범한 무늬가 들어간 침상 휘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건 자신이 예상했던 아이를 낳았을 때의 분위기가 아니었다.
자신은 임신한 후로 가슴 가득 희망을 품었고 모든 영광을 아이에게 돌렸으며 떡두꺼비 같은 사내아이를 낳기 위해 매일같이 진심으로 치성을 드렸다. 마침내 소원 성취를 했으나, 전에 상상했던 즐겁고 흥겨운 분위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물론 아이가 태어난 후 가족들이 와서 자신에게 축하를 건넸고 맹씨도 와서 손자를 안아 보며 즐거워하다가 돌아갔다. 하지만 장박원은 낙방을 하고 주운환은 장원 급제를 하는 바람에 아들의 탄생이 가져온 기쁨은 희석되고 말았다.
게다가 자신의 남편이자 아이의 아버지인 장박원은 자신이 산실로 들어가고 아이가 태어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과 아이를 보러 오지 않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엽이채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