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8화
그 시각, 정안후부.
엽학문은 서재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유이가 황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후야, 큰아가씨의 부군이 장원 급제를 하셨습니다.”
“장원 급제라고?”
엽학문은 장원 급제라는 말에 흥분한 나머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예.”
유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엽학문은 복잡한 기분이 들었고 또 마음이 쓰렸다. 장원 급제는 모든 학자들이 갈망하는 꿈같은 일이었다. 자신 또한 진홍색 도포를 입고 용마를 타고 거리를 행진하는 꿈을 여러 번 꿨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손녀사위가 장원 급제를 한 것이다. 하필,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손녀의 남편이 말이다.
“후야, 주인마님과 큰마님이 돌아오셨습니다!”
첨향이 안으로 들어오며 고했다. 전에는 이런 보고를 올리지 않던 첨향이 태도를 싹 바꾼 것은 오늘 엽연채의 부군이 장원 급제를 했으니 온씨도 귀한 사람으로 변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돌아왔으면 돌아온 거지, 무어가 대수라고.”
콧방귀를 뀐 엽학문은 괜히 문서를 정리하는 척하며 허세를 부렸다. 그러나 이내 그 문서들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뒷짐을 지고 밖으로 나갔다.
엽학문은 화원을 한 바퀴 돌다가 안녕당으로 걸음했다. 아직 안으로 들어가기 전인데도 안쪽에선 간간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들어 보니 묘씨 등이 방금 전 장원이 거리 행진을 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엽학문은 안으로 들어서며 온씨를 보고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나 평소처럼 증오가 그득한 태도는 아니었다. 그는 엽연채의 일로 온씨도 몹시 미워했는데, 그녀가 엽승덕을 감옥에 처넣은 후론 더욱 미워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렇게 밉살맞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황제 폐하께서 합격자에게 베푸는 연회가 끝나면 주씨 가문에서도 연회를 베풀 거예요. 그때 저희도 큰 선물을 보내는 게 좋겠어요.”
나씨가 미소를 지으며 이리 말하자 온씨는 눈도 떠지지 않을 정도로 함박웃음을 지었다.
“크흠.”
이때, 엽학문이 굳은 얼굴로 다가섰다. 그러자 온씨는 입을 다물고 더 이상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전처럼 위축되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온씨 모녀는 오래전부터 엽학문에게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사위가 장원 급제를 했으니 그녀도 배짱이 좀 생겨 있었다.
엽학문은 묘씨 옆에 놓인 탑상에 앉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는데 자신이 오자 갑자기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엽학문은 대번에 기분이 언짢아져 얼굴 근육을 파르르 떨었다. 자신이 뭣 하러 이곳에 왔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묘씨는 고개를 숙인 채 차만 마시고 있었다. 엽영교 일이 있은 후로 묘씨는 엽학문을 죽도록 미워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자신의 남편이자 엽영교의 아버지였고, 지금 자신은 의지할 곳이 하나도 없기에 그의 앞에서는 계속 순종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가끔씩은 지금처럼 그의 뜻에 따르고 싶지 않을 때가 있었다.
엽학문이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유이가 황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후야…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무슨 급한 일?”
엽학문은 미간을 찌푸렸으나 유이가 보내는 눈짓을 보더니 허서 쪽에 일이 생겼음을 알아차리고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오자 유이가 말했다.
“세자야께서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엽학문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곧장 서재로 향했다.
“아버지.”
창가에 놓인 태사의에 앉아 있던 엽승덕은 그를 보더니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됐다. 부자간에 예는 무슨.”
엽학문은 찻상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부자가 서재에 자리하자 엽승덕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 이제 전시도 다 끝났는데……. 에휴, 원래는 허서가 시험에 합격해 위풍당당하게 입적돼야 하는 건데 시험에 떨어졌으니…….”
“떨어졌어도 입적은 해야 된다! 설마 또 미루려는 게냐?”
엽학문이 안달 난 목소리로 염려하자 엽승덕이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입적 이야기를 하러 온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 진작에 했어야 했다.”
엽학문은 밖에서 떠돌고 있는 손자가 곧 입적한다는 생각을 하니 얼굴에 미소가 번졌으나 이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허서가 이번 시험에서 낙방한 게 못내 아쉽긴 한 것이다.
그래도 아직 젊으니 시험에 붙는 건 조만간 있을 일이었다. 엽학문은 이 손자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사실 이 아비가 이미 생각은 다 해 두었다. 삼월 초여드렛날이 길일이니 우리 문중門中의 중요한 사람을 몇 명 불러 가족 회의를 연 후에 이 대사大事를 공표할 것이다. 그런 뒤 삼월 스무닷새에 정식으로 허서를 입적하고 조상님께 제사를 지낼 것이다.”
가족 회의를 열어 여럿이 논의하긴 해야 하지만, 엽학문이 마음먹었으니 이미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후작 지위를 세습한 엽학문은 일가 중에서 신분과 지위가 가장 높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허서가 이렇게 우수한데 그 아이에게 서자가 되라고 하면 너무 억울한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엽승덕이 반대하자 엽학문은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어쩔 수 없다. 설마 온씨를 폐하고 은정랑을 아내로 들이겠다는 말이냐? 그럼 결과가 너무 뻔하지 않느냐? 그리하면 사람들은 분명 우리가 공명을 얻은 서자 때문에 본처를 폐했다고 떠들 것이다. 그럼 허서의 평판은 어찌 되겠느냐?”
“저에게 완벽한 방법이 있습니다.”
엽승덕은 이어 엽학문에 귀에 대고 자신의 계책을 속살거렸다.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아버지께서 허락만 하시면 됩니다.”
엽학문은 그의 방법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확실히 좋은 방법이기는 했다.
‘하지만…….’
엽학문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재차 미간을 짓이겼다.
“어쨌든 그건 좀 아닌 것 같다. 그 아이가 잘되면 적자이든 서자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주운환을 봐라. 그 아이도 서자가 아니더냐?”
그 말에 엽승덕의 품위 있는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자신이 어떻게 은정랑에게 첩이 되는 설움을 겪게 할 수 있겠는가. 또 어떻게 그녀의 아들에게 서자가 되는 설움을 겪게 할 수 있겠는가.
아쉬운 대로 참고 견디게 할 생각이었다면 지금까지 끌고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방법을 강구하고 노력해 온 건 정랑이 위풍당당하게 정안후부로 입성하게 해 주기 위해서였다.
엽승덕이 냉소를 지으며 말을 받았다.
“아버지, 돌려 말씀하지 않으셔도 아버지께서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다 알고 있습니다. 주씨 가문 그놈이 장원 급제를 하니 그것들이 아쉬워진 거겠죠. 그래서 그것들한테 밉보일까 봐 이러시는 거죠.”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엽학문은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성을 냈다.
“이런 불효막심한 놈……! 지금 무슨 망발을 하는 게냐?”
“그럼 아니십니까?”
엽승덕이 분노로 가득 찬 얼굴로 받아쳤다.
“허서는 첫 시험에서 떨어진 것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아이를 이렇게 내치시는군요. 과연 공명과 관록을 위해서라면 혈육도 돌보지 않으시네요.”
“이, 이게 또 무슨 망발인 게냐?”
엽학문은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기세였다.
“허서는 내 친손자다. 내가 고작 남 때문에 그 아이를 내팽개치겠느냐? 남의 아들이 아무리 좋아 봤자 내 혈육은 아니다.”
이리 부정하고는 한숨을 쉬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지금 그쪽은 장원 급제를 했다. 향후 허서가 시험에 합격하고 관리가 되면 서로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기어코 그 아이를 적자로 입적하면 그쪽에선 우리를 죽어라 미워하지 않겠느냐? 그럼 돕는 건 고사하고 짓밟지만 않아도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그 말에 엽승덕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는 저희가 허서를 서자로 입적하면 그쪽에서 수작을 부리지 않고 저희를 가만 놔둘 것처럼 이야기하시네요!”
엽학문은 그 말을 듣고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에 엽승덕은 냉소와 함께 그를 설득했다.
“지금 서자는 고사하고, 그들은 허서를 정랑과 정랑의 죽은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로만 보고 있는데도 그렇게 허서를 꺼려하며 못 잡아먹어서 안달입니다! 허서가 허씨 가문 핏줄이라 한들 그것들에게 무슨 영향을 주겠습니까? 허서가 허씨 가문 핏줄이라는데도 막다른 골목으로 밀어붙이고 있지 않습니까?”
그 말에 엽학문은 깜짝 놀라더니 입을 오므렸다.
“적자든 서자든 신분에 관계없이 허서가 입적되고 성을 엽씨로 바꾸면 그들은 절대로 그 아이를 가만두려 하지 않을 겁니다. 적서에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차라리 허서가 제 밑으로 입적되고 적자가 되면 그 아이에게 쉽게 손댈 수 없게 그것들을 억누를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버지?”
“그 말이 맞다.”
엽학문은 엽승덕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허서가 관리가 됐을 때 그 녀석이 허서를 억누르거나 혹은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이야기하셨죠.”
엽승덕은 또다시 ‘하하’ 냉소를 터트리며 말을 이어 갔다.
“그 주씨 가문 서자가 어떻게 불리한 처지에서 벗어나 단번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습니까? 다 과거 시험을 통해서 아닙니까! 앞으로 우리 허서가 걸어갈 길 또한 과거 시험입니다.
그 녀석이 장원 급제했다 하더라도 이제 막 관리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됐을 뿐입니다. 그 녀석이 어찌 소란을 피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 허서도 과거 시험을 볼 건데 그 녀석이 어찌 뒤에서 수작을 부릴 수 있겠습니까?
다음번에 허서가 좋은 성적을 거두면 황제 폐하의 눈에 들어 중용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주씨 가문 녀석이 정말로 시야가 넓다면 서로 잘 도울 겁니다. 서로 돕고 보살피는 거죠.
설령 그 녀석이 시야가 넓지 않더라도 허서가 입적되어 적자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 녀석이 뻔뻔하게 허서를 억누르려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 녀석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도량이 좁다고 할 겁니다! 그럼 그 녀석도 관리로서 잘 지낼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야겠죠.
어떤 면을 고려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 저희가 허서를 적자로 삼으면 저들은 손해를 볼까 봐 함부로 달려들지 못할 겁니다.”
엽학문은 들으면 들을수록 사리에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이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지, 그럴 생각이 있으신지에 달렸습니다.”
“원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느냐?”
엽승덕이 쐐기를 박자 엽학문이 안달 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꿈속에서조차 그런 훌륭한 친손자가 생기길 간절히 바랐다!”
엽학문은 자신의 진심을 말했다. 그는 원래부터 허서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려고 했다. 이제 필요한 것들도 잘 갖춰졌고 주운환 쪽도 염려할 필요도 없음을 깨달았으니, 당연히 허서를 적손嫡孫으로 입적할 것이다.
엽승덕은 기대 이상의 성과에 아주 기뻐했다. 그는 엽학문과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눈 후에야 그곳을 떠났다.